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36)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36화(36/203)
036
왜인지 모르게 목이 탔다.
나는 찻잔을 향해 다가가다 멈칫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차를 입에 가져는 내 머릿속에는 한 단어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정략혼이라······.’
부정할 수 없는 좋은 방법이다.
전생과 현생.
과거와 현재.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얼굴도 알지 못했던 남녀가 한 이불을 덮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차 한잔해보라는 누님의 제안은 만나보고 결정하라는 호의가 듬뿍 담겨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운명적인 사랑을 하겠습니다.’ 같은 철없는 생각은 당연히 하고 있지 않았다. 누님 앞에서 할 헛소리도 아니었고.
“그러고 보니 올해 누님의 성인식이 있군요.”
리오넬 왕국은 전통적으로 17살이 되는 해 5월에 성인식을 치른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내년에도 저 정원을 바라보며 티타임을 가지고 싶지만,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여자도 계승권이 있을 정도로 여성에 대한 인권이 상당히 높은 왕국이지만, 그 혜택을 누리는 건 ‘마법사’나 ‘기사’의 자질이 어렸을 때부터 두드러졌던 이들에게나 돌아간다.
평범한 귀족가의 여식 대부분은 아무리 늦어도 19살이면 가문이 정한 약혼자와 혼례를 올린다. 17살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바로 출가하는 이들도 많고.
‘그걸 피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파혼 후 신전으로 끌려가 수녀가 되거나, 정계나 군부 요직에 앉을 정로도 능력이 뛰어나거나, 집안의 가주가 되거나.
그래서 파혼 후, 정계 요직에 앉아, 오빠들을 제치고 가문 계승 싸움에서 승리한 밀로아 백작이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서 연예인 취급을 받는다.
뭐, 왕족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좋은 사람과 인연이 이어질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후후, 든든하구나.”
누님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아까 말했던 건 어떻게 생각하니?”
“······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님이 주선해 준 사람을 만나서 얘기가 잘 통해도 약혼까지 갈 수 있나?
예전에야 내가 남작령 시골 처녀랑 결혼한다 해도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반응의 왕실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다른데.
목이 탔다.
나는 미지근해진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렴. 아, 혹시 꼭 혼례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러니? 안심하려무나. 꼭 결혼으로 이어진 사이가 전부가 아니란다.”
“쿨럭, 켁! 켁!”
개방적인 누님의 말에 사레가 걸려버렸다.
“어머, 어머. 에반, 괜찮니? 어서 물 좀 가져오너라.”
***
다음날.
알폰소와 함께 왕궁을 나섰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나온 건 아니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생을 자각하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닥쳤던 사건들에 상당히 지쳐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누님이 언급한 정략혼이 결정타를 날리며 번아웃이 와버렸다.
평소와 같이 새벽 시간에 눈을 떴는데, 도저히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쭉 자버렸다.
“어떻습니까. 공기가 다르죠? 왕궁은 뭐랄까······ 가만히 있어도 기가 쪽 빨리는 느낌이죠. 자 숨을 크게 쉬어 보세요. 이렇게 스읍-”
아침을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침대에만 누워있던 나를 알폰소가 굳이 왕궁 밖으로 끌고 나온 거였다.
현 위치는 왕도 바로나의 광장.
오는 도중 미행이 붙어 마차는 버려버리고 직접 걸어왔다.
중앙 분수대에서 뿜어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알폰소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숨을 들이 마셔봤다.
스읍- 하아-
“별로 다르지도 않구만.”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 대답에 녀석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저건 연기다. 확실하다.
사실 투덜거린 것과 달리, 녀석 말대로 아침에 일어났을 때처럼 숨 쉴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힐 것 같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풀린 날씨와 화창한 햇빛 탓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신년 축제가 코앞이라 바로나 전체가 준비로 한창이었다. 광장에도 벌써 노점상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저씨! 거기 제 자리예요!”
“시방, 뭐라는 겨? 먼저 자리맡은 사람이 임자제.”
“아, 이 아저씨 아무것도 모르시네. 아저씨 어디 촌구석에서 왔죠? 축제 기간에 노점을 피려면 왕궁의 허가증이 필요한 거 모르세요? 봐요, 여기 허가증. 여기 제자리 맞잖아요.”
“옘병, 그런 법이 어딨어. 난 몰러. 먼저 온 사람이 임자여.”
“아, 진짜.”
노점상 자리를 가지고 투덕거리는 여자와 남자의 모습을 구경만 해도 고갈되었던 에너지가 차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케이프에 딸린 후드를 푹 뒤집어쓴 덩치 큰 인간 둘이 자신들을 구경하는 걸 깨달은 남자가 슬그머니 짐을 챙겨 떠났다. 노점을 피는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알폰소를 계속 경계했다.
뭔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그대로 있다가는 신고라도 할 것 같았다.
“가자.”
“넵. 안 그래도 이동하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 맞다.
왕궁을 나온 김에 확인할 게 하나 있었다.
“알폰소, 페리쥬르 제과점으로.”
“아, 거기 초콜릿 쿠키가 진짜 유명하긴 하죠. 안내하겠습니다.”
제과점에 도착해 초콜릿 쿠키 한 봉지를 계산하며 주인장에게 물었다.
“혹시 근래에 도둑이 든 적 있습니까? 재고가 안 맞는다든가. 특히 이 초콜릿 쿠키.”
후드를 푹 눌러쓴 이가 수상한 질문을 해서인지 그가 내 위아래를 훑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귀족들이 즐겨 찾는 소재의 옷을 입고 있는 걸 확인하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공손히 대답해줬다.
“그런 일 없습니다.”
“그렇군요.”
계속 궁금했었다.
[만물상]에서 구하는 물건이 현실에서 가져오는 건지, 아니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지. 예상은 했었지만, 제과점 주인의 대답으로 확실해졌다.제과점을 나온 후로는 발이 움직이는 대로 길을 걸었다. 어쩐지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 이대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언뜻 들었다.
그렇게 내키는 대로 이동하던 중.
“그쪽은 조금 그렇습니다.”
알폰소가 나의 발길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이 조금 으슥해지는 것 같았다. 골목 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오물 냄새가 훅 풍겨왔다.
상하수도가 잘 발달 되어있는 바로나에서 맡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역한 냄새.
“저기가 빈민촌인가?”
“뭐, 그렇죠. 길도 협소해서 습격이라도 받으면 위험합니다.”
“미행은 떨쳐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저런 곳은 왕자님이 도망가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빈민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저도 감당 못 하는 이들도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말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똥을 먹어봐야 알 정도로 내가 사리 분별이 없진 않다.
얌전히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저나 알폰소가 감당을 못할 정도라······.
근위기사급 호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 왕자님! 마법사의 재능이 없더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으십니다!
– 아무렴요. 왕자님의 외조부님, 그리고 건국 시조도 기사셨습니다. 왕자님에게는 분명 기사의 피가 흐르는 겁니다!
– 내일부터 바로 수련 시작할까요? 하하하!
그 생각과 동시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어릴 적 호위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번아웃이 왔단 핑계로 아침 내내 침대에 퍼질러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이 목을 옥죄어왔다.
“왕궁으로 돌아가자.”
“벌써요? 점심은 먹고 가죠. 제가 먹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맛집을 알고 있습니다.”
“맛을 못 느낀다며?”
“매운맛은 느낍니다. 혹시 못 드십니까?”
아, 매운맛은 통각 쪽이었지.
“못 먹긴.”
없어서 못 먹었지.
내 눈빛을 본 녀석이 빙긋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그리고 시장을 통과할 무렵.
“이거 안 놔!!”
((잠깐 식사 좀 같이하자는데 더럽게 비싸게 구네.))
소란스러운 현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때놈이네요.”
“그래, 때놈이네.”
특유의 악센트가 귀를 거슬리게 하는 하믈 제국어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들!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야, 저년이 뭐라는 거야?))
((저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냐고 묻는 겁니다.))
((저년도 닥치게 해.))
제국의 귀족으로 보이는 뚱땡이가 한 미모의 여인을 희롱하고 있었다. 여인도 수행인들을 대동한 걸로 봐선 귀족가의 영애인 걸로 보였다.
‘호위는······ 기절해있군.’
그녀의 호위는 제국 귀족 호위에게 제압당해 의식을 잃고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놈들!”
퍽!
목청이 터지라 호통치던 여인의 유모 정도로 보이는 이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꺄아악! 유모!”
“아가씨, 여기 이분은 하믈 제국에서 오신 귀한 분입니다. 식사 한번 하고 귀중한 선물도 받으신 뒤 집에 가실 수 있으니 함께 가시죠.”
제국 귀족의 통역이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을 잡아끌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안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하믈 제국의 귀족으로 의심되는 탓에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인 것 같았다.
뭐, 사실 기사도 아닌 저들이 도움 될 거 같진 않았다.
아무리 때놈들이 리오넬 왕국을 소국이라며 비하하고 우습게 보지만, 타국의 왕도 한복판에서 귀족가 영애를 희롱할 정도로 막 나가는 뚱땡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귀족가의 영애를 저리 대할 정도면 평민이었으면 강제로 기절시켜 끌고 갔겠네.
바로 유령손으로 놈의 이마를 찔렀다.
━━━━━━━━━×
글러트 한 하이스
성별 : 남
나이 : 22
종족 : 인간
[스탯] [스킬] [관계 : 평상]━━━━━━━━━
‘한?’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리오넬 대신 리온을 성으로 삼는 왕국의 왕족처럼 직계는 아니지만 하믈 제국의 황족이다.
아무래도 신년 연회에 참석하러 온 놈인 모양이었다.
“알폰소, 저 때놈의 호위 제압할 수 있겠어?”
“어··· 만약 왕자님에게 시비를 건다면 목숨을 걸고 도망갈 시간을 벌어드리겠습니다.”
역시 나 자신의 무력을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실력 있는 호위기사가 절실했다.
아직 믿을 건 주둥아리뿐인가······.
주변을 다시 한번 쓱 둘러본 후 알폰소에게 말했다.
“그 말 믿는다.”
“네? 지금 나서시려고요?”
이 나라의 왕족으로서 왕국민이 하믈 제국의 뚱땡이에게 희롱당하는 꼴은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만하지.))
조금 어눌할지는 몰라도 놈들의 언어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뭐야, 네놈은?))
나는 후드를 벗으며 입을 열었······.
“5왕자님이다!”
“에반 왕자님이다!”
“왕자님! 저 때놈들을 당장 깜빵에 처넣어 주세요!”
“와아아아아! 때놈들 꺼져라!”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쥐 죽은 듯 구경하고 있던 시장의 인원들이 소리를 높였다.
그저 조금 어눌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을 뿐인데, [지지도]가 하늘을 치솟는 것 같았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뭐야, 이 소인 새끼들 왜 이래?))
((리오넬 왕국의 왕자랍니다.))
((그래서 뭐. 나보고 여기서 물러나라고?))
((······ 분위기가 영. 오늘만 날이 아니니 돌아가시죠. 제가 기가 막힌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쯧, 안내해. 너, 운 좋은 줄 알아.))
그래도 왕국의 왕자인 나까지 제압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았는지 뚱땡이가 뒷짐을 쥔 채 자리를 떠났다.
놈이 패거리를 이끌고 사라지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5왕자님 만세!”
“만세!”
“근데, 뭐라고 하신 거야?”
“그걸 내가 어찌 알아.”
“5왕자님. 얼마 전 청문회 때도 느꼈는데, 때놈들 말을 그렇게 유창하게 하시고. 엄청 똑똑하신 거 같지 않아?”
나는 슬쩍 지지도를 눌러봤다.
[바로나 : 12%]2%나 늘었네?
“아주머니, 아주머니. 일어나세요. 이봐요, 그쪽도 정신 차리고.”
알폰소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의식 잃은 여인의 유모와 호위를 깨웠다.
“아가씨!!”
“이 때놈들!!”
“유모, 벨카스 경, 정신 차렸어?”
“아가씨, 때놈들은?”
“지켜드리지 못한 이놈을 죽여주십시오!”
“됐어. 벨카스 경 잘못이 아니야.”
둘이 깨어난 걸 확인한 영애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내게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5왕자님.”
“할 일을 한 거뿐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치안대를 바라봤다. 그들이 내 시선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됐다, 일개 병사인 저들이 무슨 죄겠냐.
“경솔하셨습니다.”
응?
“벨카스 경은 저래 보여도 왕실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4성 기사입니다. 그런 이를 제압한 자를 호위로 끌고 다니는 때놈이 혹시 왕자님에게도 해코지하면 어쩌시려고 그렇게 나서셨습니까.”
영애의 말처럼 대책 없이 나선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그나저나 4성 기사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여자라······ 입고 있는 옷은 그렇게까지 비싸 보이지 않는데.
정체가 살짝 궁금해졌다.
나는 유령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