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38)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38화(38/203)
038
요리는 그 이름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티본스테이크에 뿌려진, 냄새만 맡아도 코끝이 아릿한 걸쭉한 검붉은 소스가 지옥 불구덩이를 연상케 했다.
식사하는 동안은 대화가 없었다.
불가능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나 또한 지옥을 체험했다. 정신과 다르게 육체는 매운맛에 적응을 못 한 탓이었다.
“후우, 후우. 알폰소, 거기 우유 좀.”
“여기 있습니다.”
식사를 끝내고도 다들 한동안 우유를 입에 머금고 열을 식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프란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내가 잠깐 흥분했었는데, 농담이 아니야. 왕궁에 들러붙어 있어봤자 일찌감치 비명횡사할 확률이 높으니까 내 제자가 돼.”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내 질문에 프란이 이맛살을 구기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추측해봤다.
설마 아까 보여줬던 술식 때문에 그런 건가? 거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나? 결국에는 기초 마법에 불과한 [발화]의 변형이었을 뿐인데.
모르겠다.
나는 생각을 포기하고 프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진흙 속에 파묻혀있는 보석의 원석을 발견했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제가 그 원석이라는 얘기입니까?”
“일단은. 찌그러진 진주가 될지, 다이아가 될지는 가공을 해봐야 알겠지만. 뭐가 되었든 진흙 속에 묻어놓고 갈 수는 없잖아?”
“아까 보여주셨던 술식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던 겁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야. 알폰소가 훔쳐 갔던 마법서에서 네가 풀었던 문제. 그것도 평범한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프란이 무너진 집이니, 찰흙에 파묻힌 조각상이니, 각종 비유를 통해 나를 이해시키려 애썼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직관이 뛰어나단 소리인가요?”
“그게 아냐, 조금 다른데······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 단어가 가장 부합하긴 하네.”
나는 턱을 매만지며 프란이 했던 말들을 되새겼다.
직관이 뛰어나단 이야기.
‘전생에도 종종 듣긴 했었어.’
미로찾기 같은 걸 할 때 한 번에 출구를 찾아내거나, 복잡한 수열의 규칙도 곧바로 파악하곤 했었다.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처음부터 답을 찾아놓고 그게 왜 답인지 설명하기 위해 한참을 증명하는 일도 많았다.
프란은 7개의 별을 다루는 마법사.
그녀는 전생으로 치면 전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학의 교수급 인물이다. 그런 이가 나를 제자로 받고 싶어 할 정도면 최소한 영재급 재능은 보았다는 말.
그래서 의문이다.
전생에 대한 기억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긴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 나는 필즈상이나 노벨 물리학상 등을 노리는 세기의 천재가 아니었다.
‘육체가 달라져서 그런가?’
전생과 얼굴, 체형, 키, 근력 등이 모두 달라졌다. 학습 능력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전생의 나는 영어를 가장 힘들어했었는데, 현생에선 7개 국어가 가능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은 나는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고 프란을 바라봤다.
“프란 님의 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저와 함께 걷는 사람들이 조금 늘었습니다. 그들을 버려두고 훌쩍 떠날 수는 없습니다.”
말하고서 슬쩍 알폰소를 바라봤다. 녀석이 감동 먹은 표정으로 내게 엄지를 척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쯧,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 버린 줄도 모르고 뭐가 좋다고 웃어.”
프란이 속이 타는 듯 컵에 물을 따르더니 시원하게 입에 들이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제가 프란 님의 제자가 되려면 왕궁을 나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배움이라는 게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너, 설마 나보고 저 똥통 같은 왕궁에서 너를 가르치란 얘기야?”
“생각보다 좋은 냄새가 납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프란 님의 신분은 적탑에서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왕궁 출입 허가 정도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에메랄드궁에서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지내실 수 있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
프란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가끔 왕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볼 때면 똥을 뒤집어쓴 바퀴벌레를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 조금 궁금해졌다.
나는 속으로 프란이 오케이란 답을 내리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잠시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자가 되라는 의미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유지를 이으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 왕궁에 남아 있겠다는 너에게 그건 불가능하겠지? 행여 나중에 왕궁에서 쫓겨나면 유지를 잇겠다는 소리는 하지 마. 주둥아리를 영영 못 움직이게 만드는 수도 있으니까.”
“안 합니다. 저도 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원석을 가공해보고 싶은 마음이 큰 것도 사실이야. 베이른 녀석의 손자이기도 하니 ‘선생’ 정도는 할 의향이 있어.”
“감사합니다.”
에메랄드궁의 상시 거주하는 7성 마법사? 갑자기 나의 안전 지수가 수직 상승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이야기 안 끝났으니 끝까지 들어. 고로 ‘스승’이 아닌 ‘선생’은 정당한 권리를 받아 학생을 교육해야겠지. 내 수업료 조금 비쌀 텐데.”
······ 하다 메아리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프란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다 네가 나를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나를 왕궁에 거주시키면서 배우겠다? 왕실에서 고용한 마법사들은 연구지원금이 나오는 거 알지? 내가 연구 중인 것들, 지원하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가능하겠어?”
“······.”
“뭐 저번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던 거나 청문회 때 떠들던 걸 보면 이래저래 숨겨놓은 게 많은 모양이니 준비되면 말해. 당분간은 어디 안 가고 여왕삼거리 저택에 머물 테니까. ‘제자’ 녀석이 굶고 있겠네. 난 시장에서 빵을 사서 들어가야 하니 다음에 보자고.”
말을 마친 프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나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알폰소에게 물었다.
“프란 님이 북부에 있을 때 해방군에서 마법에 재능이 있는 이들은 공짜로 가르쳤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 죠?”
“왜 나한테만 수업료를 달라는 거야?”
“북부해방군은 친우였던 베이른 후작님이 남겼던 마지막 부탁 같은 거여서 무상으로 서비스해주신 게 아닐까요?”
“나는 외손자인데?”
“왕자님은 부탁 안 하셨나 보죠. 의미 없는 불평은 그만두고 어떻게 해야 수업료를 마련할지 생각해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알폰소의 말에 녀석을 찌릿 바라보았다. 실눈을 호선으로 그리며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요즘 북부해방군은 별다른 소식 없어?”
“아시잖아요, 저 탈퇴 처리된 거. 왕자님 편지가 아니었으면 오스틴 선배가 제 목을 가져갔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개인적인 연락 하는 사람 없어? 네 동기라든가, 그 있잖아, 주방 보조하다 튄.”
“안 친합니다.”
“친했던 사람 없어?”
“하핫, 하핫. 제가 사람을 사귈 여유가 없어서······. 그래도 오스틴 선배가 연락책은 남겨놓긴 했으니 특별한 일 있으면 연락하겠죠. 아니면, 뭐 북부해방군에 할 말 있으세요?”
청문회 이후, 북부해방군과 나는 뭐랄까, 친구보다 먼 타인보다는 가까운 그런 관계였다.
이런 애매모호한 사이일 때 같이 때놈도 몇 놈 같이 때려주고 그래야 우정이 돈독해질 텐데······. 내가 왕궁 밖을 나갈 수가 있어야지.
몸이라도 함께 못하면 선물이라도 한 바구니 보내서 격려하면 좋으련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가 않다.
“우리도 가자, 계산해.”
“네?”
“네가 오자며? 네가 사는 거 아니었어?”
“저 지갑 두고 왔는데요. 어찌 왕자님 앞에서 제가 계산을 하겠습니까. 상관 무시한다고 욕먹습니다.”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런 개똥 같은 문화가 있긴 하다.
한숨을 쉬며 어제 누님이 티타임 뒤 챙겨준 돈주머니를 꺼내 던져줬다.
“삥땅 치지 마. 얼마 들어있었는지 다 아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죠. 하핫.”
옛말에 남자의 여유는 지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돈주머니를 휙휙 돌리며 계산하러 가는 알폰소를 바라보며 나의 고심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
신년 연회가 시작되었다.
리오넬 왕성에서 연회를 목적으로 건축된 라사유궁. 어둠을 밝히는 조명과 음악가들의 연주, 그리고 침샘을 자극하는 요리의 냄새가 그곳을 가득 채웠다.
선남선녀가 가득한 연회장에서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커플이 있었다.
아네트와 에반이었다.
“잘 추는구나, 에반. 가르친 보람이 있어.”
“······.”
아네트는 그녀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대답도 못 할 정도로 집중하는 에반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불과 두세 달 사이에 키가 불쑥 커서 그녀보다 커졌다.
4왕자와의 대련.
왕실 재판
청문회.
불과 두세 달 사이 에반이 보여준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습들. 아네트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질문할 수 없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네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죄책감이 있었다. 에반이 유령왕자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조롱받고 있는 동안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
‘올해를 끝으로 조용히 사라져야겠구나.’
5년이란 시간 동안 유령왕자라는 허물을 뒤집어쓴 채 갖은 굴욕을 견딘 에반이 이제야 날갯짓을 시작했다.
아네트는 자신이 왕궁에 오래 남아 있으면 오래 남아 있을수록 에반에게 짐이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조용히 왕궁에서 사라져주는 것도.
“후, 누님 발을 밟을까 봐 진땀을 흘렸네요.”
“잘하던데? 바로 마음에 드는 영애한테 춤을 청해보렴. 아! 저기 저 파란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동부에서 꽤 큰 상선단을 소유한 집안의 무남독녀란다. 자작가이긴 하지만······ 재산은 어지간한 백작 가문 못지않게 많단다.”
“하하······ 긴장을 해서 그런지, 잠시 화장실 좀······.”
핑계를 대고 자리를 잠시 피하는 에반을 보며 아네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에게 빠르게 접근하는 여인이 있었다. 며칠 전, 에반이 도와준 아이라 메어튼이었다.
아네트와 에반이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매의 눈으로 둘을 관찰하고 있던 그녀가 잽싸게 아네트에게 다가갔다.
“3왕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메어튼가의 여식 아이라 메어튼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아, 당연한 얘기를. 2년 전에 영애가 선물해준 허브차의 향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스레아라는 이름이었죠?”
“정말 기억하시는군요! 맞아요, 산스레아! 저희 영지와 엘프의 숲 경계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품입니다.”
빙긋 웃는 얼굴로 아이라와 대화를 나누는 아네트의 머릿속에선 바쁜 계산이 진행 중이었다.
메어튼가의 재산은?
나쁘진 않음.
메어튼가의 중앙정치 영향력은?
거의 없음.
메어튼가의 군사 전력은?
정확히는 알지 모르지만 에반을 지원할 수는 없을 거라 판단 됨.
아이라 메어튼은 무남독녀인가?
아니오.
삑-
마지막이 결정적이었다.
아이라는 몰랐지만, 방금 그녀는 에반과의 티타임을 가질 만한 영애 리스트에서 탈락했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그녀들.
촤악-
별안간 새빨간 와인이 쏟아져 아네트의 고운 흑발과 그녀의 드레스를 붉게 물들였다.
연회장 전체가 싸늘해졌다.
“어머, 미안. 발이 엉키는 바람에 균형을 잃었어.”
쫙 찢어진 눈.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주근깨.
깡마른 몸매를 보정하기 위해 없는 가슴을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2왕비 소생의 4왕녀.
그라시아 리오넬, 올해 아네트와 함께 성인식을 치를 예정인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냈다.
“어머, 어머, 이걸 어째.”
그라시아는 아네트의 얼굴을 닦아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내가 저번에 내 눈앞에서 보이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