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53)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53화(53/203)
053
만약 누군가 내게 리오넬 왕국의 시대상을 ‘굳이’ 전생과 비교해보라 하면 산업혁명 후부터 1차 세계 대전 사이쯤이라 조심스레 말할 것 같다.
물론 백작령 이상의 큰 도시 기준이다. 시골의 경우는 중세와 다를 바 없다.
평민 출신의 기사, 상인들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될 조짐도 보인다. 일각에선 귀족의회 밑에 평민들이 주도하는 하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왕실기무대가 그들을 열심히 때려잡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다섯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격변의 시기.
정치체계 또한 마찬가지다.
선대 국왕의 사후 귀족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행정, 입법, 사법이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왕실재판과 청문회 때 왕실위원회가 전부 관여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직 완전한 삼권분립은 아니다.
왕실위원회 의원이 행정부처의 일을 겸직하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논란거리도 아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다.
다 필요 없고 딱 두 글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개판.
“······ 그러니까 이번 여름에 있을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댐을 건설하기 위해 기존의 두 배 가까운 예산이 필요합니다.”
아, 방금처럼 제대로 된 일도 가끔 한다.
베오르티오가 안타까운 일로 생을 마감하고, 농림부 장관을 대리하고 있는 차관이 발표를 마쳤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팔짱을 끼고 있는 클리앙을 바라봤다.
“일리 있는 말씀이시군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와이트 백작가의 가주.
재정경제부 차관.
저 인간, 내가 서부에 가 있는 동안 승진했다. 4왕녀가 제국 뚱땡이한테 시집가는 걸로 결정된 바로 직후.
그는 허수아비, 또는 식물 장관이라 불리는 이들 중 하나인 재정경제부 장관을 대리해 참석했다.
“허허허, 좋군요. 농림부의 일은 마무리된 것 같으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본디 국무회의의 진행은 국왕의 업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참한 상황. 총리가 대신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각 부처의 안건에 대한 결정권자이긴 하지만, 그는 중립파 중에서도 중립. 1왕자 진영과 2왕자 진영의 합의가 있을 때만 안건을 통과시킨다.
언제나 허허허 웃어 허총리라고도 불리는 그가 밀로아를 바라봤다.
크리스티 백작가의 가주.
왕실기무대 정보부 차관.
재정경재부 장관과 친구인 그녀의 상관을 대리해 와있었다.
밀로아 역시 클리앙의 승진에 발을 맞췄다. 사실 내 도움이 컸다. 검은 모루 부족이 공급해주는 마정석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왕실기무대 정보부······ 아니, 밀로아 백작, 발언하시게. 미안하네, 습관적으로 그만.”
“괜찮습니다. 항상 장관님 뒤에만 서 있었지, 이 자리에 앉아 회의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작위와 직책 중 우선시되는 건 작위.
그래서 호명할 때 작위가 없는 왕족과 귀족은 본인이 가진 직책 중 가장 높은 직책을, 작위를 가진 계승 귀족은 작위를 이름 뒤에 붙인다.
소소한 왕궁 예절이다. 가끔은 칼부림을 부르기도 하는. 그래서 방금 총리가 다급히 사과한 것이다.
“주변국인 하믈 제국, 아르야 왕국을 포함한 세계의 열강들이 신병기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뭐 이야기하면 슬픈 이야기이니 이건 넘어가고, 본론만 말하면 최소한 그것들이 뭔지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요원들의 활동비가 현저히 부족합니다.”
“호, 신무기라. 밀로아 백작,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실권이 거의 없는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고 있는 베르트 의원이 관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부족한 지원 탓에 요원들이 떠도는 소문을 수집한 정도입니다. 보고된 것들만 일단 알려드리면 물속을 움직이는 배, 땅속을 움직이는 마차, 고속으로 움직이는 1인 비공정······.”
밀로아가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래’의 내가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한 게 대부분. 그래도 개중에는 진짜 등장하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그걸 모르는 국무회의의 참가자들. 특히 2왕자 진영의 인물들은 밀로아가 몇몇 신무기를 언급할 때 입술을 씰룩거렸다.
허무맹랑하다고 여기는 탓이리라.
“······ 그리고 기사가 탑승하는 대형 골렘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풉- 아 죄송합니다, 밀로아 백작님. 제가 아침부터 목이 좀 아파서.”
밀로아가 방금 소리 내서 웃은 이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요원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야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오겠죠!”
“밀로아 백작, 예산은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클리앙 옆에 앉은 2왕자가 그녀에게 딴지를 걸었다.
“그게 무슨!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작년 4분기, 아르야 왕국에 대규모 요원이 투입되고 막대한 예산를 낭비한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대체 무엇을 조사해 무엇을 얻었는지 공개를 좀 해주시죠.”
“그, 그건······.”
밀로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4왕자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캐고 있었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겠지.
“······ 극비입니다.”
그녀의 궁색한 변명에 피식 웃고 있는데, 베르트 의원이 내 귓가에 입을 갖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5왕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지금 그의 옆에 앉아있다.
특별한 직책이 없는 왕국의 왕자, 왕녀는 고관 중 하나와 함께 동석하는 방식으로 국무회의에 참여한다.
조금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함께할 고관이 없으면 국무회의에 발도 들이지 못한다.
클리앙 백작 옆의 2왕자.
베르트 의원 옆의 나.
오늘은 이렇게 두 명이 국무회의에 자리하고 있다.
1왕자는 요즘 6성 기사로 가는 벽을 넘기 위해 1기사단의 연무장에서 밤낮을 잊고 검을 휘두르는 걸로 유명하다.
아마 못 넘을 거다.
내가 하늘꽃을 호로록 사용해버렸으니까. 맛있더라. 왜 사람들이 그렇게 영약, 영약 하는지 이해했다.
“5왕자님?”
“아, 잠시 밀로아 백작이 말했던 신무기들에 대해 생각 해봤습니다. 확실히 등장하기만 하면 지금까지의 전략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 만한 것들이 많군요.”
“그럼 밀로아 백작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베르트 의원님은 열강들이 그런 신무기의 보안을 허투루 할 것 같습니까? 아까 밀로아 백작이 말했던 신무기 중 9할은 덫일 겁니다. 어설픈 지원을 받고 투입된 요원들이 떼죽임당하는 일이 될 겁니다.”
“호오, 확신하시는군요.”
나는 그저 쓰게 웃어 보였다.
“밀로아 백작,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라도 들고 와서 다시 예산을 요청하도록.”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지원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정보를! 하······ 알겠습니다.”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는 밀로아가 한발 물러나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 들고 왔을 때, 그때 나설 생각이다.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다.
2왕자도 더는 밀로아를 자극하지 않았다. 수틀리면 ‘감사’라는 막강한 무기를 동원할지도 모를 그녀였다.
“허허······ 밀로아 백작의 안건은 그럼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총리가 재빨리 회의를 진행했다.
나는 가급적이면 나서지 않고 경청하는 데 집중했다.
농림부 차관이나 밀로아처럼 제대로 된 안건을 내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 파벌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안건들.
칼만 안 들었지 서로 상대를 물어뜯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러던 중.
“4왕녀님은 훌륭한 혼처를 찾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3왕녀님도 슬슬 국익에 도움이 될만한 혼처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믈 제국인들은 취향이 워낙 독특하니 아르야 왕국 쪽이 어떻습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누님 이야기.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외무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그건 왕실위원회가 정할 일이오. 국무회의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소.”
베르트 의원이 잽싸게 잘라버렸다.
왕실위원회를 겸직하는 왕족들이 합심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2왕자 진영의 인물도.
“이런,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왕족과 귀족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 그걸 밟았던 외무부 장관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걸 몰랐을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아닌데······.
그가 2왕자와 시선을 맞추는 게 보였다.
‘일부러 그랬구나.’
2왕자가 내게 불편한 감정을 표출한 거였다.
왕실재판, 청문회에서 큰 이득을 보고, 4왕녀의 약혼까지 확정 지은 그는 왕위 계승 싸움에서 한발 앞서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꽃밭이었을 거다.
내가 그 꽃밭에 검은 모루 부족과 협상해 얻어온 마정석을 들이부어 버렸다.
대놓고 뭐라 하진 못했다. 이제 내가 그 정도 급은 된다. 그러니 저렇게 누님 문제로 살살 신경을 건드린 거다.
그래도 기분이 꽤 나쁜데?
잊지 않게 기억 속에 잘 보관해두었다. 나중에 100배로 갚아줄 생각이다.
“허허허, 다음은 베르트 의원님이 발언하실 차례군요.”
드디어 북부해방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차례였다. 나는 국무회의의 참가자들의 면면을 다시 한번 살폈다.
‘미래’에는 이 자리에 없어야 할 인물들이 많이 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나비효과.
전생을 자각하고 불과 5개월. 벌써 내가 알던 ‘미래’와 많은 것이 뒤틀렸다.
왕실위원회 의원이자 농림부 장관이었던 베오르티오가 사라졌다.
장관의 수행 인원으로 참석해 서 있어야 할 클리앙과 밀로아가 장관을 대리하는 차관의 자격으로 앉아있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곳에 있다.
나를 힐끔 바라보고 고개를 돌린 베르트 의원이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마녀, 베오르티오의 만행을 저지하는 데 북부해방군이 큰 공을 세웠소. 그리고 그간 눈감아왔지만, 새로 생긴 국경 부근에서 벌이는 그들의 활동 덕에 제국이 아직 지난 침공으로 앗아간 왕국의 서북부 지역을 온전히 통치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오. 이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있소?”
그의 강렬한 눈빛은 인정하지 않으면 당장 달려가 때려눕혀 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뭐 어느 정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연 듯한 한 장관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황급히 입을 닫았다.
조용해진 회의장.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베르트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단순한 괴뢰 집단이 아니라 왕국을 위해 일어난 민병집단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생각하오.”
1왕자, 2왕자 진영의 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하다 이내 그들의 수행 인원과 속닥거렸다.
나는 두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밀로아, 그리고 2왕자와 클리앙.
밀로아는 담배를 피는 듯한 손모양으로 입술을 계속 두들기고 있었고, 2왕자와 클리앙은 서로의 의견이 다른 듯한 분위기였다.
“허허허, 베르트 의원님의 발언에 아무 의견들 없으신가?”
총리의 물음에 드디어 한 사람이 거수했다.
“오, 밀로아 백작 발언해보시오.”
“베르트 의원님, 북부해방군이 벌인 일 중에 왕국에 도움이 된 일들이 일부 있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인정해선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죠.”
서부에서 광산을 개발하며 좋은 파트너였던 시절은 이제 끝난 듯했다.
“북부해방군이 산적, 열차 강도들이 벌이는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닙니까?”
베르트 의원을 부르며 입을 열었던 밀로아의 시선을 나를 향하고 있었다.
“밀로아 백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을 왕국이 정식으로 인정하면 정전 협상을 벌였던 제국이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게 뻔하지 않습니까.”
2왕자가 밀로아 백작을 지원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다른 이들도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저도 2왕자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곧바로 제국의 대사가 강력한 항의를 해올 겁니다. 4왕녀님과 제국 황족의 약혼으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때입니다. 절대 불가입니다!”
아까 누님의 혼처를 언급하며 내 심기를 건드렸던 외무부 장관이 제일 먼저 신나게 떠들었다.
청문회 이후 좀 얌전히 지냈더니 내가 만만해 보이나?
아카드의 심장에 화살이 박히고, 베오르티오가 마녀가 된 게 누구 때문이었는지 다시 한번 인지시켜줄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