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88)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88화(88/203)
088
날을 잡아 에메랄드궁을 찾아왔던 클리앙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었다.
– 이것 하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왕자님은 어떤 형태로든 공화정을 왕국에 도입하고 싶으신 겁니까?
잠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 답이 바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갔었다.
– 아니.
오히려 내가 원하는 건 전제군주제.
향후 왕위에 오르면 왕실위원회나 귀족 의회가 가진, 국왕을 견제하는 힘을 모조리 박탈하고 싶다. 나의 손가락질 한 번에 일치단결해 으쌰으쌰 하는 모습을 바란다.
그러다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 폭군이 되어버리면?
초창기 성군이었다 집권 말기에 천인공노할 폭군이 되어버린 왕들의 사례가 무수히 많다.
세계수의 열매를 얻기 위해 엘프의 숲을 불태웠던, 불노불사를 꿈꾸던 하믈 제국의 폭군 또한 집권 초기에는 세계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여럿 남긴 인물이었다.
나 또한 인간인지라 언제 그렇게 변할지 모를 일이다.
역사가 증명했듯 끌어 내려지겠지.
지금 당장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왕국이 도약하는 과정의 하나이길 소망한다.
“······.”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도 마르스 룬티아의 입은 자물쇠라도 잠긴 것처럼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 마스터가 당신의 출신 가지고 장난칠 생각은 없단 말도 전해달라셨지.」
잠시 까먹었었다는 듯 말하며 [침묵의 소리]를 유지하던 마력을 끊었다. 삼중발현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 그걸 어떻게 믿지?”
마르스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원래 대부분의 귀족가에 망나니 한둘쯤은 있기 마련. 그의 출신을 폭로한다 해서 룬티아 공작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0년 전에 가문을 뛰쳐나간 셋째 아들? 거기다 그는 서자였다. 그 정도면 남보다 못한 사이다.
다만 이런 내 생각을 구구절절 털어놓으며 설득할 마음은 없었다.
“믿을지 말지는 당신 마음이지.”
“6성 마법사를 그림자로 둔 것으로 보나,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정보력으로 보나 당신의 마스터란 인간이 우리와 접촉한 이유를 모르겠군. 꼭두각시 인형처럼 춤을 추다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미래뿐이 안 그려져.”
“그렇게 된다면 그게 당신들이 가진 역량의 한계겠지. 당신들이 바라는 자유, 평등, 정의.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줄 알았어? 내 마스터가 아니라 하믈 제국의 황제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이 아닌가?”
“······”
“뭐, 그건 알아서 하고. ‘거래’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볼까.”
“거래?”
“그래. ‘자유’, 당신에게 부정부패한 영주들의 목록과 그 범죄 증거를 제공해주지. 그걸 이용해 그들을 함께 처리했으면 좋겠어.”
“······ 우리에게 한낱 사냥개가 되라는 건가?”
마르스가 이를 으득 갈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광장 같은 곳에 그들의 목을 걸고 만행을 폭로하는 혈서와 그 증거를 남겨봐. 자유, 평등, 정의라는 당신들의 이념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큼직하게 써놓으면 효과가 아주 좋을 거야. 한 세 번만 하면 전 왕국민이 삼색 지팡이단에 알게 될 거야. 대체 뭐 하는 놈들인가 궁금하겠지. 그러다 당신들의 이념도 전파되지 않겠어?”
“그런 터무니 없는!”
“뭐가 터무니없지? 여태껏 당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들이 뭔지 생각해 봐? 책을 만들어 퍼트리는 것? 리오넬 왕국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나?”
전문적으로 신문, 잡지를 읽어주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당연히 마르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왕실기무대가 삼색 지팡이단을 20년 넘게 쫓고 있다고 했나? 그 이유가 뭔지 가르쳐줄까? 그만큼 ‘아무것도’ 안 했기 때문이야.”
만약 삼색 지팡이단이 내가 제안한 걸 진작부터 하고 있었으면 이미 옛날 옛적에 소탕된 상태일 것이다.
“뭐 이해해. 뭘 하려고 해도 능력이 부족했겠지. 최고위 간부인 당신조차 겨우 5성 마법사일 뿐이니까.”
아픈 곳을 푹푹 찌르는 내 폭행에 그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많이 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인 걸 어쩌겠나.
“그럼 잘 생각해봐.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나는 마르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발자국 옮겼을 때, 마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글쎄······ 마스터가 내게 ‘정의’를 찾아가라 하지 않을까?”
복수를 위해선 마족과 계약할 의사가 충분한 이들이니 내 제안을 두 손 들고 반길 게 분명하다. 손잡이 없는 칼날과 마찬가지인 이들이라 통제가 힘들겠지만, 차선은 될 수 있으리.
“······.”
나는 침묵에 잠긴 마르스를 내버려 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허튼짓하는 인간이 없어 다행이었다.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빈민가를 빠져나가던 도중 지붕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레이나였다.
“볼 일은 다 보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타부타 말없이 옆에 섰다.
“무슨 일로 혼자 다녀온 건지 안 물어봐?”
“이유가 있으니 그러셨겠죠. 다만······ 가급적이면 오늘 같은 원거리 호위는 지양해주셨으면 합니다. 사전에 왕자님의 말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마력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을 때 바로 신전으로 뛰어들 뻔했습니다.”
“가끔 나 혼자 사라져야 할 때도 있을 거야.”
삼색 지팡이단의 부족한 능력을 채워주는 것. 양지에서 움직이는 호위기사들에게 맡길 순 없었다.
네이브 몫이었다.
다미안이 부리던 그림자들 같은 존재들이 내겐 없는 게 무척 아쉬웠다. 그나마 알폰소인데······ 이번처럼 사이즈가 큰일을 맡기엔 역량 부족이다.
“······ 말린다고 들으시진 않겠죠?”
“뭐, 그렇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군요.”
저벅저벅.
그렇게 말없이 걷다 빈민가를 거의 빠져나왔을 때였다.
“최근에 취미로 쌍단검을 배우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더군요.”
뜬금없이 웬 쌍단검?
“저도 머리를 염색한 뒤 왕자님 같은 가면을 쓰고 쌍단검을 사용한다면 누구도 레이나라는 이름을 상상하지 못하겠죠?”
아! 지금 데리고 다니라고 어필하는 거구나.
나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겠네.”
이름은··· 레이나를 뒤집어서 애니어(Anier)? 아니다. 그냥 애니 정도가 괜찮을 듯싶다.
***
네이브가 신전을 빠져나가고,신전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삼색 지팡이단 자유 단원들이 마르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놈이 뭐라고 한 겁니까?”
“대체 정체가 뭐랍니까?”
마르스는 그들 중 귀가 제일 밝은 이를 쳐다봤다. 귀가 엘프에 가까울 정도로 큰, 왜소한 대머리 사내였다.
“우들,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그놈이 불도마뱀을 불러낸 후로는 화르륵거리는 잡음 때문에 이상하게 잘 안 들리더군요. 놈을 6성 마법사라고 놀라워하는 것 정도 들었습니다. 대체 누가 보낸 놈입니까?”
마르스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우들이 그 정도면 다른 이들은 못 들었다고 보는 게 맞다.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모두에게 알려주겠습니다. 다들 쉬고 있으세요.”
마르스와 네이브가 나눈 대화 내용이 궁금한 단원들이었지만, 마르스의 어조가 매우 단호했다.
우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신전 밖을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둘 흩어졌다.
혼자 남은 마르스는 신전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철컥, 문을 잠근 그는 새부리가면을 벗었다.
선이 굵은 외모의 중년 남자였다. 눈가에 손가락 마디 크기의 깊은 흉터조차 그의 중년미를 돋보이게 했다.
그는 땀에 젖은 금발 머리를 쓸어올리며, 조금 전 있었던 네이브와의 대화를 되새겼다.
‘마스터란 인간, 누굴까?’
6성급 마법사면 일반인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다. 근위기사단에 준하는 리오넬 왕국 마법병단의 단장이 6성 마법사다.
그런 이를 음지에서 부리는 이라니······.
‘혹시 하믈 제국이나 아르야 왕국의?’
리오넬 왕국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게 목적인 타국의 계략일 가능성이 먼저 떠올랐다.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갔다.
‘완벽한 리오넬 왕국어였어. 그것도 왕도에서만 사용하는.’
일단은 왕국 내에서 마스터란 사람의 정체를 추측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금방 열 손가락 안으로 좁혀졌다.
그중 유력한 건 두 사람.
‘1왕자와 5왕자.’
타국의 계략보다는 왕위 계승 싸움에 이용당하게 되었다는 게 더 현실성 높았다.
국민이 국가의 통치자를 뽑는 공화정을 추구하는 자신들이 왕위 계승 싸움에 말려들었다? 개가 웃을 일이었다.
마르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
보름 후.
마르스는 눈과 입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기분 나쁜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네이브가 보낸 이였다.
역시나 완벽한 리오넬 왕국어를 사용하는 그는 자신을 오스노라고 소개했다.
‘4성급 암살자야.’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삼색 지팡이단 자유의 단원들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지켜본 마르스가 내린 평가였다.
“네이브 님이 이걸 전해주라 하더군요.”
마르스는 오스노가 건넨 서류 봉투를 받았다.
“편히 읽어보시죠. 저는 잠시 앉아서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린다고요?”
“대답을 꼭 듣고 오라고 하셔서요.”
오스노는 널브러져 있는 바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팠죠? 그러게 왜 초면에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대해요. 다음부터는 주의들 하세요. 저니까 이 정도였지, 네이브 님한테 그랬으면 목이 잘렸을 수도 있어요.”
넉살 좋게 자신이 두들겨 팬 이들에게 조언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새부리가면 속 마르스의 얼굴은 기가 찬 표정이었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류 봉투를 열고 손을 넣었다.
스르륵-
두툼한 서류를 꺼내다 첫 장에 그려진 얼굴을 보는 순간.
마르스의 손이 멈췄다.
아는 얼굴이었다.
‘라드완 룬티아.’
그는 서류를 마저 꺼냈다.
라드완 룬티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열되어있었다.
현 룬티아 가주의 차남.
본부인의 자식.
미혼.
녹탑에서 마법을 수학.
자작령 규모의 영지, 론스웰을 관리 중.
6성 마법사.
거기까지 읽은 마르스는 고개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 오스노에게 당한 상처를 살피는 단원들을 바라봤다.
“잠시 저 남자랑 단둘이 있고 싶으니 다들 나가서 치료하세요.”
심각한 그의 말투에 널브러져 있던 단원들이 주춤주춤 일어났다. 모두가 자리를 피한 후에야 그는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전국에서 일어난 실종사건이 줄줄이 나열되어있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한 자신조차 혐오스러운 그림들.
지네 인간.
머리가 여섯 개인 인간.
8개의 발을 가진 거미 인간.
.
.
.
그것들은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인간을 재료로 만든 키메라들이었으니까.
다음 장으로 넘기자 각종 몬스터와 인간을 합친 혐오스러운 생명체들의 그림이 잔뜩이었다.
마르스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다 일부 키메라들의 몇몇 부위에 작은 글씨가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주로 인간의 ‘머리’ 부분이었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간 그는 8개의 발을 가진 거미 인간을 살폈다.
머리 옆의 작은 글씨를 읽었다.
‘렉스 테일러, 497년 3월 28일 실종.’
한참 그렇게 서류를 뒤적이던 마르스가 고개를 들어 오스노를 바라봤다.
“서류의 내용, 알고 있습니까?”
“참 간도 커요. 만신전에서 금한 인체 실험이라니. 룬티아 공작 가문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 몰랐으니 지금까지 방치했겠죠. 룬티아의 가주는 지독히 차가운 인간입니다. 이 정도로 정치적 타격을 받을 만한 일을 여태껏 방관했을 리가 없죠.”
마르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그동안 추측하던 네이브의 마스터가 5왕자일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자유! 평등! 정의! 중에서 자유를 맡고 계신 분의 대답은 뭐라고 전하면 될까요?”
“라드완 룬티아는 6성 마법사입니다. 마법사의 공방은 요새와 같죠. 그 남자, 네이브가 함께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아! 만약 긍정적인 대답을 하시면 한 명 더 붙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한 명 더 붙어봤자······.”
“쌍단검의 애니라고. 7성에 근접한 실력자가 있습니다.”
오스노의 말에 마르스의 입이 닫혔다.
조금 전 마스터란 인물이 5왕자라 확신했던 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5왕자를 위해 음지에서 일하는 이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혼자 오셨습니까?”
시종일관 느긋했던 오스노의 몸이 흠칫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