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95)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95화(95/203)
095
모리아 룬티아.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의 시선에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5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이 지령서를 거친 수많은 사람의 지문이 남아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흐릿한 것도 있고요. 분명한 것은 이 지령서에 지문을 남긴 이들은 한 번이라도 이걸 만졌다는 뜻입니다.”
모리아는 스크린에 떠 있는 지령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문이라······.’
모리아는 자신의 손가락 지문을 들여다보며 스크린에서 있던 것들과 겹쳐보았다.
곧, 완벽히 일치하는 지문을 찾았다.
엄지에서 시선을 뗀 그는 5왕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문을 이용해 지령서를 보낸 이를 찾는다, 매우 신묘한 발상이군요. 그런데, 그 지령서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곳에 찍혀있는 지문도 말입니다.”
“그걸 왜 내가 해야 하지?”
에반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백사자기사단과 함께 삼색 지팡이단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지령서를 발견했고, 그 지령을 명한 범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덕분에 앞으로 왕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강력 범죄의 수사에 활용될 수 있는 지문채취제도 만들어냈지. 근데 이제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지령서가 조작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증명해야 하나? 만약 그걸 증명하면, 또 그 증명이 옳다는 걸 증명하라고 하겠어. 정 이 지령서가 조작된 것 같다면 직접 증명해보든지.”
모리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20년 넘게 왕국을 쥐락펴락했던 그였다. 오랜만에 느낀 모멸감에 당장이라도 5왕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리아의 시선이 아주 잠깐 5왕자가 데려온 호위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5왕자가 후원하는 에메랄드궁의 빈객. 8성 마법사 프란이 호위기사들 틈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법칙을 강요하는 걸 넘어서 심상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괴물이 된 그녀였다.
모리아는 조금 전 느꼈던 살인 충동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
지령서를 조작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모리아의 지문이 묻은 백지만 있으면 지금도 한 장 뚝딱 만들 수 있다. 아마 청문회장에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그걸 눈치챘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 뭐?
지령서가 조작되었다고 의심해도 그걸 증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기에 불가능하다고 봐도 된다.
나는 눈가를 파르르 떠는 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굳이 지령서에 찍힌 지문 중 상당수가 누구의 것인지는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들 그게 누군지 짐작하실 거라 믿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으려는 찰나, 밀로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밀로아 백작?”
“솔직히 저는 지령서에 적힌 이들 중에서 남부 귀족들부터 삼색 지팡이단의 표적이 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함께 발견된 부정부패나 비리에 관한 문서도 남부 인사들 것이 대부분이었죠. 5왕자님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만 결국 네가 조작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말이었다.
“글쎄······ 남부 귀족들부터 제거해야 후에 다른 지역 인사들을 제거할 때 의심을 덜 받지 않아서가 아닐까? 아니면 삼색 지팡이단의 본거지가 남부에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
간단히 말해서 모른다는 답.
길게 말을 섞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밀로아가 뭐라고 더 입을 열려고 하기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녀를 외면하고 좌중을 바라봤다.
“그럼 삼색 지팡이단의 본거지에서 발견된 지령서에 관한 건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죠. 라드완 룬티아가 벌인 만행,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궁금한 건 하나겠죠. 과연, 그가 왕국민을 실험용 쥐처럼 취급한 그 끔찍한 실험들이 과연 그의 독단이었는가.”
나는 마법사에게 신호를 주었다.
불에 그을린, 훼손된 일기장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 어······ 저거 설마?
– 라드완의 일기장인가!
– 진짜인가? 저걸 어떻게 5왕자님이!
“레이나 남작이 라드완 룬티아의 만행을 왕국민에게 퍼트렸던 삼색 지팡이단 ‘자유’와 그 부하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그의 일기장입니다.”
진품이다.
네이브로 위장하고 라드완을 잡은 후, 놈의 공방에서 챙긴 것이다.
“아쉽게도 삼색 지팡이단이 라드완을 습격했던 당시에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적습니다.”
당연히 내가 훼손했다.
그대로 두면 모리아가 라드완이 벌인 짓을 몰랐다는 훌륭한 증거다.
“그래도 얼추 중요한 부분을 추려봤습니다.”
스크린이 일기장에서 발췌한 부분들을 보여줬다.
「아버지로부터 ■■■를 폐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랜만에 성공한 ■■■라 많이 아쉬움이 남는다.」
「본가에서 경고를 ■■다. ■■■ 실험을 잠시 중지하라는 내용■■다. 당분간은 자중■■ 있어야 할 듯하다.」
「······ ■■라는 명을 받았다. 이번에 납치한 그 남자를 ■■······」
.
.
.
언어란 게 참 재미있다.
‘마법서를 폐기하라’라는 문장에서 단어 하나만 훼손해 ‘■■■를 폐기하라’라고만 바꿔도 사람들을 그 훼손된 부분에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채운다.
키메라라든가.
– 저, 저거······.
– 모리아 공작이 라드완의 키메라 실험을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 그런데 너무 교묘하게 훼손된 것 같은데······.
“모략이다! 그 어디에도 내가 그놈의 만행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문장은 없지 않은가!”
모리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 훼손된 부분이 없었더라면 청문회가 아니라 바로 귀족 재판이 열렸을 테니까.”
모리아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새빨개졌다.
“자, 이제 증명해봐. 라드완이 벌였던 만행이 놈의 독단이었다는 것과 삼색 지팡이단의 본거지에서 발견된 지령서에 모리아 공작, 당신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할 말을 모두 마친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앉았다.
***
청문회가 끝났다.
– 모략! 모략이오! 전부 우리 남부 귀족들의 단합을 깨트리려는 자들의 모략이란 말이오!
모리아 공작은 시종일관 그렇게 ‘모략’을 외쳐댔다.
소소한 증거들을 선보이긴 했지만, 내가 제시한 것들에 비하면 태양 앞 반딧불 수준이었다.
이번 모리아의 청문회는 어떤 강제성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나와 다미안이 발휘했던 불체포특권의 유효성을 판단했던 왕실위원회의 청문회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를 재판장에 세울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청문회였다.
“모리아 공작, 재판장에 서게 될까요?”
집무실에 돌아와 소파에 털썩 몸을 던진 내게 알폰소가 물었다.
“설 거야.”
조만간 모리아 공작을 재판에 세울지 말지 귀족의회에서 투표가 열릴 거다.
그는 귀족의회 의석을 소지한 룬티아 공작가의 가주다. 재판장에 세우는 데 필요한 표는 귀족의회 의원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
충분하다.
청문회장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남부 귀족들. 그중 모리아를 바라보는 눈이 복잡했던 이들이 꽤 많았다.
“남부 귀족들이 왕자님의 주장을 그렇게나 믿는 눈치였나요?”
“아니, 전혀.”
모리아의 지문이 묻은 지령서.
훼손시킨 라드완의 일기장.
그들이 그걸 액면 그대로 믿는 머저리들이었으면 옛날 옛적에 권력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거다.
“알폰소,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야. 청문회에서 나에게 그 어떤 반격도 가하지 못하고 ‘모략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모리아의 무능한 모습이지.”
“음······ 어렴풋이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저라도 그런 인간이 무리의 지도자면 영 미덥지 않을 것 같네요.”
“그렇지.”
1왕자의 가장 큰 약점.
남부 귀족들은 1왕자가 아닌 모리아 공작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룬 것이다. 물론, 밀로아처럼 1왕자만을 보고 투신한 인간도 있겠지만, 그리 많지 않다.
1왕자와 밀로아도 고민이 많았을 거다.
향후 왕위를 계승해도 외척의 힘이 워낙 강해 뜻대로 왕국을 이끌어 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을 터.
그렇기에 밀로아가 1왕자에게 기사의 능력 향상에 집중하라 한 거겠지. 1왕자가 7성 기사가 되는 순간, 모리아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었을 테니.
뭐, 이제 그런 먼 미래의 문제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도 된다. 당장 왕위 계승 싸움이 뒤집히게 생겼으니까.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모리아 공작이 귀족 재판을 받게 되면 어느 정도의 처벌이 내려질 것 같으신가요?”
“대단한 처벌은 없을 거야. 어쩌면 무죄 판결받고 당분간 자숙하라는 선에서 끝날 수도 있어.”
“그걸 왕국민이 수긍할까요? 그들은 왕자님의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텐데.”
“언제 귀족들이 그런 걸 생각한 적 있어?”
“······ 그렇네요.”
한없이 견고해 보이던 남부 귀족들의 유대에 균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지금 당장은 그 정도면 되었다.
그 균열이 구멍이 되고 와르르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
왕국력 500년 1월 1일.
새해가 되었다.
한 살 더 먹어서 이제 16살. 나도 일 년만 더 있으면 성인식을 치른다.
똑똑, 똑똑.
“왕자님, 알폰소입니다.”
“들어와.”
알폰소가 서류를 한가득 안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많아?”
“건국 500주년 아니겠습니까. 이래저래 왕자님의 결제가 필요한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500주년이 뭐 대수라고.”
‘미래’에서는 500주년이고 나발이고 붉은별열병 탓에 아주 소박하게 진행했었다. 이번엔 상황이 달라져 성대하게 치를 듯싶다.
현재 리오넬 왕국은 일부 지방을 제외하곤 일상을 회복한 상태. 그로 인한 나의 지지도는 말해 무엇할까 싶다.
‘생각난 김에 한 번 확인해볼까?’
유령손으로 [지지도]를 톡 눌렀다.
북부 95%
서부 90%
동부 85%
남부 49%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왕국민의 지지도만 보면 다음 대 왕위는 나의 것이다.
‘남부가 49%······.’
내가 삼색 지팡이단을 이용해 그토록 흔들어댔음에도 남부의 지지도가 겨우 49%인 것은 1왕자 진영의 필사적인 언론 통제 때문이었다.
– 왕자님, 그거 아세요? 남부에서 라드완이 사실은 왕자님과 의형제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네요.
언젠가 알폰소가 들고 왔던 웃기지도 않은 소문에 헛웃음만 흘렸던 기억이 났다.
‘이대로만 가면 돼.’
모리아 룬티아가 귀족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조금씩 지지도가 상승하고 있다.
느긋한 마음으로 저 위태위태한 남부가 과연 언제 터질지 관람하면 된다.
“아, 그리고 오스틴 선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마르스 일행이 엘렌베이라에 무사히 정착했다 합니다.”
“그래?”
마르스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아직 그를 따르는 인원들을 이끌고 국경을 건넜다.
하믈 제국에 풀어놓은 공화정이라는 독이 제대로 퍼질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생각이다.
“새로 창설된 조직의 이름은 공민회랍니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였다. ‘미래’에서는 그가 삼색 지팡이단을 나와 독립한 단체의 이름은 ‘자유의 날개’.
미래가 ‘미래’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다시금 체감되었다.
“오스틴 선배가 추천했답니다.”
“오스틴이?”
“선배가 공화정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보기엔 전문가 수준이에요. 처음엔 선배도 공화주의자인 줄 알았다니까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잘 감시하겠습니다.”
오스틴이 공화주의자?
그럴 리가 없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알아서 해. 할 말 다 했으면 나가서 일 봐.”
“넵!”
알폰소를 내보내고 한참 업무에 집중했다.
어깨가 뻐근해져 잠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는 중이었다.
다다닥.
소리만 들어도 안다.
알폰소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또 어떤 일이 터졌길래 저러는지 의문이었다.
녀석이 노크하기 전에 먼저 문을 열었다.
“왕자님! 남부에서 민란이 일어났답니다!”
균열을 만들어 놓은 남부라는 벽에 거센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