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5th Prince of Hellman Kingdom RAW novel - Chapter (97)
헬망국 5왕자로 살아남기-97화(97/203)
097
리오넬 왕국 남부의 어느 소도시.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다 무너져가는 빈민가의 허름한 집에서 한 남자가 발간된 지 6개월이 넘은 신문을 읽고 또 읽고 있었다.
『성문법 도입을 제안하신 5왕자님』
『브리센 연합의 맹주 다이치 왕국으로 본 성문법, 법이 신분에 우선한다?』
그의 이름은 줄리앙.
‘성’은 없다.
리오넬 왕국에서 ‘성’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한다.
이종족이거나 미등록자이거나.
누가 봐도 인간인 줄리앙은 후자.
흔한 일이다.
왕도 바로나의 빈민가만 뒤져도 미등록자는 수두룩하게 나온다.
미등록자가 되는 배경은 크게 세 가지.
하나, 신분을 은폐한 범죄자.
둘, 미등록자 부모를 둔 아이.
셋, 뒷골목에 버려진 고아.
줄리앙의 배경은 세 번째였다.
빈민가의 미등록자, 고아 출신의 남자아이가 무사히 성인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고 봐도 된다.
안 풀리면 뒷골목 양아치.
잘 풀리면 폭력 조직의 일원.
줄리앙은 그걸 벗어난 특이 케이스였다.
교육받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에게 신문을 읽어주는 이야기꾼, ‘텔러’를 통해 스스로 문자를 깨우쳤고, 자연스럽게 빈민가의 텔러가 되었다.
부스럭, 그는 신문을 접어 다 부서질 것 같은 탁상에 올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신문지로 도배를 해놓은 것처럼 벽에 스크랩해놓은 기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대부분이 5왕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삐쭉빼쭉 지저분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5왕자가 성문법을 도입하려는 이유······.’
줄리앙은 5왕자가 국무회의에서 성문법을 언급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되새겼다.
공화정이란 프레임을 뒤집어쓴 채 뒷골목 폭력 조직과 다를 바 없는 일을 하던 삼색 지팡이단. 그 실체를 모르고 있던 머저리 몽상가들로 이루어진 자유 단원들이 라드완 룬티아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했다.
룬티아 공작가는 침묵을 택했고, 곧이어 자작 이하의 쓰레기 영주들이 쓸려나가기 시작.
이어진 5왕자의 삼색 지팡이단 일망타진. 그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증거품으로 인하여 결국 모리아 룬티아가 청문회장에 섰다.
많은 이들이 그 배후에 5왕자가 있으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줄리앙은 의심을 넘어 확신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단순히 머저리 몽상가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성문법을 언급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깎아낸 발언을 했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부족해.’
줄리앙이 신문 기사와 소문 등을 통해 유추한 5왕자는 결코 그런 일차원적인 인간 아니었다. 한가지 행동을 함에 있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이였다.
줄리앙의 머릿속에 5왕자의 의도했으리라 짐작되는 목록이 주르륵 펼쳐지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별안간 폐를 쑤시는 통증과 함께 시작된 기침에 그는 입을 틀어막았다. 붉은별열병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X발, X같은 거.”
똑똑, 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줄리앙의 눈이 빛났다. 마치 오매불망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한 듯한 표정.
입가를 쓱 닦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
***
덜컹.
다 쓰러져가는 집의 문이 열렸다.
창백한 인상의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나와 레이나를 쓱 훑어봤다.
“들어오시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릴 집안으로 들인 그가 다리가 휜 의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의자에 앉으시죠, 5왕자님. 저래 보여도 생각보다 튼튼합니다. 레이나 남작님은 앉으시라고 해도 서 계시겠죠?”
딱히 변장을 안 하고 오긴 했지만, 한눈에 우리가 누군지 알아봤다. 그런데도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촛불이 어두컴컴한 내부를 밝히고 있고, 집안 벽 전체가 신문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나에 관한 기사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무슨 복수를 준비하는 이의 비밀 공간에 들어선 것 같았다.
나는 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의 이마를 유령손으로 톡 건드렸다.
━━━━━━━━×
줄리앙
성별 : 남
나이 : 27
종족 : 인간
[스탯] [스킬] [관계 : 우호]━━━━━━━━
‘우호?’
민란을 주도한 인간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흥미가 갔다.
“왕실기무대가 알면 기절하겠어. 민란의 주동자가 이런 허름한 빈민가에 홀로 지내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민란의 주동자라니요? 스스로 목매려는 자들에게 조금 더 통쾌한 방식을 알려준 일개 이야기꾼일 뿐입니다.”
왕실기무대에서 이번 민란의 지도부를 파악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없으니까.
남부 전역에서 동시에 들고 일어난 민란을 통제하는 지도부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지역에서 민란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에 마치 그걸 통제하는 지도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남부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민란을 일으킨 핵심 인사들을 선동한 인간을 주동자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음······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할 말이 없군요. 그런데 그렇게 치면 5왕자님 또한 주동자 아니십니까?”
능글스러운 줄리앙의 말투.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내가 ‘미래’의 지식과 [도서관]을 통해 얻은 지적 우위를 가지고 타인과 대화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이렇게나 얄미운 거였구나.
“너······.”
“괜찮아.”
레이나가 서늘한 음성으로 그에게 경고하려는 걸 얼른 제지했다. 창백한 인상에 비리비리한 것이 6성 기사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았다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았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내 짐작 이상이었다.
레이나의 기운을 손톱만큼 받았을 뿐인데도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대체 얼마나 허약한 거야?
“콜록콜록. ······ 죄송합니다. 이게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군요. 역시 미래의 검후이십니다.”
“붉은별열병의 후유증인가?”
“알아보시는군요.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세상을 떴을 겁니다. 때마침 빈민가에 무료로 뿌려진 제네롤 덕에 겨우 살아남았죠.”
기분이 묘했다.
‘미래’에서는 붉은별열병으로 죽었을 인물이 나 때문에 살아남아 민란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럼 내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군. 그러니 왜 내가 민란의 주동자인지 자세히 말해주겠나?”
“국무회의에서 성문법을 언급하셨을 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죠? 생명을 위협하는 괴인에게 반격한 자는 그 괴인의 신분 여하를 떠나 정당방위로 인정해야 한다! 콜록콜록.”
내가 국무회의 당시 했던 말을 격정적으로 외친 줄리앙이 다시 격하게 기침했다.
입가를 쓱 닦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왕자님은 그 발언으로 귀족들의 학정에 고통받는 왕국민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놓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미등록자인 저조차 자연스럽게 생명을 위협하는 괴인은 귀족, 반격한 자는 고통받는 왕국민을 연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의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미등록자 줄리앙.
내가 성문법의 도입을 언급한 의도 중 여태껏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그가 처음으로 알아챘다.
내 주변 인간들이 무능해서 못 알아차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 삶을 살아보지 않은 그들이었다. 귀족의 학정에 가족, 연인, 친구의 죽음을 일상으로 접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터.
바라보는 눈높이 차이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서 내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민란을 유도했단 말인가?”
“최소한 남부 귀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시려 할 때, 강한 지지를 받고자 하셨겠죠. 시간이 지나도 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왕자님이 직접 손을 쓰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이야기꾼이라 그런가, 상상력이 풍부하군. 내가 민란을 유도했다가 왕실기무대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정계에서 퇴출당할 텐데 설마 그러겠나?”
“안 들키면 되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그러셨던 것처럼요.”
사고방식이 나랑 비슷했다.
이 정도면 보통 동족 혐오가 일어날 법도 한데,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맘대로 생각해. 그런데 내가 찾아올 건 어떻게 알았지?”
“20년 넘게 왕실기무대에게 쫓기던 삼색 지팡이단의 본거지도 급습하시지 않았습니까? 저같이 주둥이가 방정인 이야기꾼이 머무는 곳 정도는 언제든지 찾아오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생각보다 이르긴 하군요.”
줄리앙을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서관]을 통해 각 지역의 민란을 일으킨 자들의 공통분모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침을 자주 하는 이야기꾼을 만났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생각보다 이르다?”
“리루스 남작령처럼 영지민을 싹 죽여버리는 곳이 서너 군데 더 나와야 만나 뵐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렇게 일찍 찾아오신 덕분에 그동안 긴가민가했던 의문이 풀려 굉장히 기쁘군요.”
“의문?”
“궁금했습니다. 왕자님이 성문법을 도입을 주장하신 이면에 가축 같은 삶을 사는 왕국민을 갸륵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있으신 건지.”
“당연한 걸 의문으로 가졌군.”
“그 당연한 게 안 되고 있던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지 않습니까. 콜록콜록.”
묘한 미소를 답변하던 줄리앙이 재차 기침하는 통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나는 그의 기침이 멈추길 기다렸다 물었다.
“왜 민란을 일으켰나?”
“X같은 세상을 만든 X같은 자식들에게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사람은 가축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잠시 줄리앙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이 터 밝아진 탓에 벽을 가득 메운 신문 기사들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그중 8할이 나와 관련된 기사였다.
다시 그를 시선을 맞췄다.
“나에 관해 아주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조금 기다려볼 생각은 없었나? 그래도 제법 왕국민들에게 미래를 보여줘 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이제 곧 남부 차례였는데.”
“··· 제가······ 콜록콜록. 콜록콜록!”
대답하려던 줄리앙이 유독 심한 기침을 했다. 그리고 후각을 자극하는 비릿한 피 냄새.
그가 손바닥에 묻은 피를 바지춤에 쓱쓱 닦은 후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만약 왕자님이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라면 어떡합니까? 또다시 속아 넘어간 저희의 미래는 지옥이지 않겠습니까? 하층민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척하는 왕족이라······ 오히려 더 무섭더군요.”
“그래서 실제로 만나보니 어떤가?”
“일단 첫인상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지만······ 또 모르지요. 한때는 선군이었다가 폭군으로 변해버린 왕은 역사에 수두룩하니까요.”
“첫인상은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여기서 멈춰도 내가 조만간 남부인들에게 미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남부인들이 무의미한 피를 흘릴 것 같단 말이야. 민란을 선동한 입장에서 왕실이 어떻게 나와줘야 이 사태가 가라앉을 것 같나?”
“남부의 폭군인 룬티아 공작과 민란이 일어난 지역 영주들의 목. 그리고 왕국민을 가축처럼 대하는 귀족은 엄하게 벌할 것을 법으로 명시한다면 다들 금방 생업으로 돌아갈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당장은 불가능해.”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말해봐.”
“1왕자를 죽이십시오. 왕위 계승자가 5왕자님이라는 것이 결정되는 순간, 민란을 일으킨 남부인들에게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그들을 상대로라면······ 남부 귀족들의 목 없이도 협상이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