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Weakest Mai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159)
세계관 최약체 하녀로 살아남기-159화(159/160)
“마지막일 게 뭐가 있담.”
또 오면 되지.
할아버지도 비앙카를 무척이나 좋아하시고 비앙카도 손녀인 나보다 더 할아버지를 살뜰히 챙겼다.
원래 비셔스 후작님과도 사이가 좋았으니 덕분에 이제는 거의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황태자 전하라.”
무도회 때 춤 신청을 허락했던 것도 그렇고. 남자의 ‘ㄴ’자도 관심 없던 비앙카였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뭐 마음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니까.
“혼자 무얼 그리 생각하십니까?”
“백작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니 그레이슨 백작이 내게 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뛰어가 그녀 앞에 섰다.
“할머니.”
그레이슨 백작이 서운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녀는 원로원 회의가 끝나고 잠시 자가에 들렀다 돌아오는 것 빼고는 다시 이곳에 와 지내고 있었다.
데릭 후작이 할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고 있지만 큰 결정은 아무래도 혼자 할 수 없기에 그레이슨 백작이 남아 할아버지의 건강도 살피면서 돕기로 한 것이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정정했다.
“할머니, 산책하러 나오셨어요?”
그레이슨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같이 해 주겠어요?”
나는 대답 대신 옆으로 붙어 그레이슨 백작의 팔짱을 꼈다.
“오늘 아침에 주치의가 그러는데 할아버지가 다시 많이 좋아지셨대요. 다음 주부터는 산책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놈의 엄살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말은 저렇게 해도 할아버지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후계자 수업은 잘 되어 가는지요?”
“아직요. 후작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시는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데릭 후작에게 틈나는 대로 배우고 그의 일을 돕고 있지만 실상 지금껏 내가 한 건 데릭 후작이 한번 검토한 내용에 인장을 찍는 일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책임감이 엄청나서 가문의 일을 배우는 것보다 내가 가진 이세계의 지식으로 데릭 후작을 놀라게 하는 게 훨씬 더 쉬웠다.
“시작이 어려운 법이지요. 금방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조만간 제도가 바뀔 것 같으니 너무 외워 두지는 말고.”
“제도가 바뀌어요?”
“곧 알게 될 테지요. 아주 극성인 양반이 있어서.”
“극성……?”
대체 무슨 말이지?
그러나 그레이슨 백작은 의문만 남긴 채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까 비앙카 때문인지 기시감마저 들었다.
우리는 정원 한 바퀴를 다 돌도록 말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레오니안에 대한 질문이 날아와 진땀을 조금 빼긴 했지만.
*
일주일 후.
너무 바빠서 만날 틈도 없던 레오니안이 데이트 신청을 해 왔다.
그간 바쁘면서도 만남은 꼬박꼬박 챙기더니 이번에는 정말로 바빴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의 만남이 점점 만족스럽지 못하게 변해 갔다.
왜냐면 왠지 그는 평소보다 내게 집중을 하지 못하고 딴생각에 빠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사레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고개만 돌리면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부끄럽게 만들 때는 언제고 오늘따라 왜 저런담?
확실한 건 그의 머릿속이 지금 무지 번잡하다는 것이다.
데이트하자던 건 레오니안이었는데 자꾸만 내가 아닌 딴 곳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자니 슬슬 기분이 뾰족해지기 시작했다.
“레오니안, 그런데 우리 어디 가요?”
“…….”
“레오니안.”
“아.”
“……내 말 듣고 있어요?”
“응. 다행히 정말 날씨가 좋군.”
“…….”
나는 동문서답하고 있는 레오니안을 식은 눈으로 쳐다봤다.
듣긴 뭘 들어? 하나도 듣지 않고 있으면서.
하여튼 오늘 정말 이상하다니까.
차라리 뒤에 마차를 타고 오는 호위들이랑 얘기하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그럼 하다못해 맞장구라도 쳐 줬을 거 아닌가!
나는 완전히 뾰족해지다 못해 세모꼴이 난 기분에 팩 그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1분도 되지 않아 레오니안이 팔로 내 허리를 감아 당기는 바람에 그마저도 실패했다.
“왜 그래?”
“레오니안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어서요. 일 다 끝나고 만나도 되는데.”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나는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레오니안을 보고 기가 차서 눈을 흘겼다.
“그럼 다시 말해 봐요. 내가 뭐 물어봤어요?”
레오니안의 얼굴에 잠시 당혹스러움이 번지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야 오늘 날씨가 좋으냐고…….”
“우리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거든요.”
“아……. 미안.”
나는 레오니안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항상 멀끔하다 못해 빛이 나던 얼굴이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레오니안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잠을 못 잤어요? 그 정도로 바빴던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마음이 조급해서.”
“응? 마음이 왜 조급해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나 레오니안은 대답 대신 마차 창문 밖을 확인했다.
“도착했군.”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왜 조급했는지 말 안 해 줬잖아요. 어? 셰인!”
마차 문이 열리고 나는 레오니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따라 내리면서 물어보려다 깜짝 놀랐다.
마차 문을 열고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셰인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오니안을 쳐다봤다.
“어제 돌아왔지.”
“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녀님.”
셰인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해 왔다.
나는 완전히 마차에서 내려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쉬고 왔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제 앞으로 다시 자주 볼 수 있겠네요?”
“예.”
“정말 다행이다.”
금방 기분이 좋아진 나는 뒤늦게서야 주변을 살폈다.
펜들러가보다 훨씬 아담해 보이는 정원과 2층짜리 저택이 있었다.
그리고 저택 전체를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커다랗고 새하얀 금속 펜스가 보호하고 있었다.
저택 앞쪽 양옆에는 작은 분수 두 개가 있고 왼쪽 저 멀리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와 호수가 보였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보다 큰 호수에는 배도 띄워져 있었다.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아름다웠다.
“와, 호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레오니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며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나를 저택 쪽으로 이끌었다.
우리를 맞이했던 셰인은 마차 근처에 우뚝 선 채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여기가요? 와.”
여기서 조그마한 레오니안이 뛰어놀았다고?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어쩐지 어린 그는 뚱한 표정을 자주 지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무표정은 근사하지만 싸늘해 보일 때가 있는데 어릴 땐 그 싸늘함이 덜했을 테니까.
마치 보물 상자를 연 듯한 기분이었다.
“되게 좋은 곳에서 보냈네요. 호수에 배도 타고 그랬어요?”
나는 호수에 떠 있는 작은 배를 가리켰다.
“빠져도 봤지.”
“깊어 보이는데. 사고뭉치였어요……?”
그러자 레오니안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나.”
“앗, 그런데 왜 영지나 지금 저택 말고 여기서 지냈어요? 물론 여기가 훨씬 동화 속 같고 좋긴 한데.”
“어머니가 아프셨거든.”
나는 걸음을 멈칫했다.
“아……. 미안해요.”
그러자 레오니안의 눈썹이 보기 드물게 팔자로 변했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네가 왜 미안해.”
“……그래도 행복하셨죠?”
“응.”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원과 이어진 호수를 따라 저택을 보면서 빙 둘러서 걸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갔을 땐 후원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정원보다 후원이 훨씬 더 컸다.
레오니안은 나와 함께 걸으며 커다란 나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호수에서는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원과 저택 안에서의 추억을 얘기해 주었다.
내가 모르는 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좋았지만 다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드는 찰나 레오니안이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후원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저택 앞모습이 보였다.
아까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사라져 훨씬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시끌벅적한 게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한 것도 제법 좋았다.
아니면 아까보다 훨씬 진중해진 그의 표정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리브.”
“네에.”
나는 부러 대답을 길게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나는 네가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해.”
“…….”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알면 알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그 의문이 끝이 날 수도 나지 않을 수도 있지.”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풀어 놓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로라의 성에서 했던 말 때문일까?
하긴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레오니안이라면, 레오니안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가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졌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자 혹시 그에게도 내 진실이 부담으로 다가왔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감정이 번지려고 했다.
“레오…….”
“그래서 네가 날 허락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네 곁에서 널 알아 가고 싶어, 온전히.”
“…….”
뭔가 대답하고 싶은데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먼저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전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네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
세계관 최약체
하녀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