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the Weakest Mai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96)
세계관 최약체 하녀로 살아남기-96화(96/160)
*
그날 저녁.
나는 내일 아침 출발을 위해 저녁부터 퀸텀가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헤임에게 더 댈 핑계도 없고 그가 이곳에서 내가 갈 때까지 버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짐을 싸는 데 도움을 자처한 레이나와 엠마가 더 같이 있을 시간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그 헤임인가 뭔가 하는 사람 너한테 너무 딱딱하게 하는 거 아니야? 감히 퀸텀의 하나뿐인 손녀한테 얼른 준비하라고 해도 돼?”
특히 엠마가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퀸텀 공작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신다잖아. 그래도 너무하긴 해.”
레이나는 엠마를 다독이면서도 서운한 티를 냈다.
여기에 올 때처럼 갈 때도 짐은 조촐하게 하나뿐이었다. 짐을 보자 괜히 한숨이 나와 멍하니 있는데 레이나가 불렀다.
“에블린.”
“응?”
“서운해하지 말고 들어.”
레이나가 내 한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은 엠마가 맞잡았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둘을 보고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뭐, 뭔데 그래?”
“오늘 이후부터는 지금처럼 못 대해 줘. 알고 있지?”
“우리가 너를 보고 아가씨께 대하는 것보다 더 깍듯하게 대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네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아……. 어, 알고 있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당연한 말이다.
비앙카를 통해서 계속 볼 수는 있지만 이제 막 마음을 열기 시작한 두 사람과 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 조금 서운하긴 했다. 베티도 알면 정말 깜짝 놀랄 텐데. 잘 지내고 있으려나.
“뭐 그래도 너는 어디 가서도 적응 잘하겠지. 너 적응력 최고잖아. 귀족가 직속 하녀로 들어와서 이렇게 빨리 적응한 애는 너밖에 없을걸.”
레이나의 말에 엠마가 낄낄 웃었다.
“퀸텀가에 가면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 너 무시하는 사람 있으면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라고.”
나는 둘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가씨 보러 자주 놀러 와. 주인님도 주인마님도 엄청나게 기다리실걸.”
“응, 그럴 거야. 먼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와서 걔네들 코 좀 납작하게 눌러 줘.”
“누구?”
“왜 있잖아, 빨래터 애들. 꼭이다! 알았지?”
엠마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이제 우리 다 말했으니까 내가 과거에 텃세 부렸던 거 다 잊는 거다? 공녀님이 되는 순간 기억에서 지우고 우정만 남기는 거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엠마를 흘겨봤다.
“본론은 그거였지?”
그러자 엠마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알아들었으니 끝! 이제 우리 비앙카 아가씨와 함께 저녁 드실 준비 해야지요, 퀸텀의 아가씨?”
“뭐야-그런데 ‘함께’라니?”
내가 묻자 레이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아가씨가 말씀 안 하셨어? 너랑 오늘 꼭 저녁 같이 먹을 거라고 하시던데.”
“시중을 드는 게 아니고?”
엠마가 손사래를 쳤다.
“이제 시중 못 들지. 내일 출발하니까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으신가 봐. 아가씨께 다시 묻고 올 테니까 여기 있어 봐.”
엠마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비앙카, 레오니안과 겸상을 하다니. 이게 불편한 걸 보면 나는 하녀 생활이 그새 몸에 밴 게 틀림없다.
나는 내 옆에 앉아 눈을 반짝이고 있는 비앙카와 맞은편에서 우리 둘을 보고 있는 레오니안을 멀뚱하게 쳐다봤다.
“에블린, 너와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 부담 갖지 말고 많이 먹어. 준비는 공작님이 해 주셨지만.”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없던 부담도 생기겠습니다.”
레오니안의 말에 비앙카가 팩 고개를 돌렸다.
“우린 친해서 괜찮은데요?”
“매우 일방적인 감정 아닙니까?”
레오니안이 느긋하게 물을 마시며 대꾸하자 비앙카의 눈이 더욱 뾰족해졌다.
내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마치 야누스 같았다.
“그럴 리가요. 그렇지, 에블린? 아, 이제 나일리브라고 불러야 하나. 어떡하지?”
“……아하하.”
둘이 밥 먹는 것까지는 그래! 그나마 괜찮았다.
문제는 둘이 그간 사이좋았던 사실을 새카맣게 잊은 것처럼 만나자마자 티격태격하느라 나는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껴 있다는 사실이었다. 편한테 안 편한 이 기분.
외출하고 돌아온 데다 자신의 드레스를 입히겠다는 걸 막고 오느라 가뜩이나 배가 고파서 말릴 기운도 없었다.
“음식이 식겠습니다. 배부터 천천히 채우고 대화합시다.”
“아, 그게 좋겠네요. 에블린, 많이 먹어.”
비앙카는 내게 식사 예절까지 가르쳐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 좀 손이 익숙해져 음식을 입에 열심히 넣으려는데.
“에블린, 그래도 공작님께서 내일 함께 가시기로 하셨다니 가는 길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
나는 다시 포크를 들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외출한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레오니안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비앙카가 말을 이어 갔다.
“아까 헤임이라는 사람이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널 보기 위해 원로들이 급하게 공작저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나 봐. 네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마주칠지도 모르겠어.”
비앙카는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퀸텀 공작가의 원로라면 노바 퀸텀이 그동안 차기 가주가 되겠다고 밑밥 깔았다던 그 사람들 아닌가? 그럼 잘하면 노바 퀸텀의 편이 된 원로들도 있을 것이다.
가자마자 꼬장꼬장하게 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펜들러가가 개입되어 있으니 네게 막 대하진 못할 거야. 정 불편하게 하거든 우리 집으로 다시 오고, 알았지?”
비앙카는 이제 내게 완전히 스스럼없이 굴었다.
나는 그런 여주를 신기하게 보다가 레오니안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포크로 연신 입에 음식을 넣었다.
역시 어색해.
Chapter15. 되찾은 퀸텀의 상속자
이튿날.
나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퀸텀 공작가에 갈 채비를 했다.
어쩐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자 정신이 퀭하게 느껴졌다.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비앙카와 레오니안, 엠마와 레이나, 케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미리 나와 있었다.
“더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껏 아쉬워하는 비앙카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자주 놀러 갈게요.”
“응, 꼭 와야 해. 나도 돌아가는 대로 편지할게. 그리고 이제 말도 편하게 하고, 알았지?”
비앙카는 마차를 앞에 두고 내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지 연달아 얘기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응?”
“불편하시겠지만 신전에서 좋은 방법을 구해 줄 때까지 외출할 땐 꼭 조심하셔야 해요.”
“편하게 하래도. 그래, 알았어.”
“그리고 요즘 심야 사고가 많아졌대요. 밤에는 더더욱 조심하시고요.”
“그래, 알았어. 너도 조심해야 하는 거 잊지 말고. 너희도 인사해야지.”
“아가씨, 이제 정말 가셔야 합니다.”
인사가 계속 길어지자 헤임이 우리를 막았다. 초상화 보상을 줄 때 만해도 정말 인상이 좋아 보였는데 은근히 까다로웠다.
레이나와 엠마와는 이미 한 차례 대화를 나눈 덕분에 짧게 인사를 하고 드디어 마차에 올라탔다.
헤임이 가방을 먼저 넣어 둔 덕분에 나는 가방을 보물처럼 움켜쥐고 앉았다.
다시 후작저에 들르긴 할 테니까 그동안 괜찮겠지?
헤임이 올라타기 전까지 마차 안에서 혼자 꼼지락거리고 기다리는데 레오니안이 훌쩍 올라탔다.
어젯밤에도 저녁을 먹은 후에 별채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았더니 어제저녁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줄은 몰랐는데. 만 하루지만 여태껏 피한 게 소용없어졌다.
“짐은 빠짐없이 다 챙겼나?”
레오니안은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반쯤 경계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같이 가세요? 엄청 바쁘시잖아요.”
“바빴으면 좋겠다는 눈치인데.”
윽, 정곡을 찔렸다. 여하튼 이럴 땐 눈치가 기가 막히게 좋다니까.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는 그냥 번거로우실까 봐서요.”
거짓말이 안 통했는지 레오니안이 피식 웃었다.
“안전한 것만 확인하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
“그,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나는 가방을 여전히 움켜쥐고서 중얼거렸다. 이 안에 아직 그에게 전해 주지 못한 선물도 들어 있었다.
원래 어제 바로 주려고 했지만 계속 타이밍만 보다가 실패한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는 줘야 할 텐데.
헤임이 올라탔다. 동시에 마차 안 분위기는 어색함이 곱절이 되어 버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이윽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나도 마주 손을 흔들며 점점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휴, 이제 진짜 가네. 뒤늦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세계관 최약체
하녀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