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고향은 그렇게 너그럽다 (1)
빠악, 빠아악!
그렇게 소란스럽기만 하던 전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쥐 죽은 듯 아주 깊은 정적만 흘렀다.
그 고요한 적막을 깨면서 들리는 건, 오로지 두들겨 맞는 소리뿐.
무당파 쪽 사람이건, 패왕성 쪽 사람이건 간에 그 소리는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들, 뼈마디가 분질러지고 근육이 뭉개지는 소리를 생생히 들으면서 ‘속 시원하다’거나 ‘꼴좋다’ 같은 생각이 들기는 어려울 테니.
더구나 언제부턴가 간간이 들리던 저항하는 소리나, 신조패왕의 절규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빠아아악!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건, 그렇게 한참이나 두들겨 맞고도, 아직도 부서지지 않은 뼈마디가 남아 있다는 것과 미약하게나마 신조패왕의 숨이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백룡들이 날뛰었어도, 화령빙의진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니. 거기에 남아 있던 기운이 진즉에 끊어졌어야 할 신조패왕의 숨통을 이어 주고 있었다.
신조패왕으로서는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제발 이대로 절명했으면 좋겠건만, 이 끔찍한 고통을 끝냈으면 좋겠건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정현은 몇 시진이나 이어 가던 구타를 끝내고,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훔치면서 백뢰를 크게 일으켰다.
파지지직!
백뢰는 이미 고깃덩이가 되어 버린 신조패왕을 갈기갈기 찢었다가 송두리째 불태웠다.
정현은 녀석이 완전히 시커먼 재가 될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이전처럼 신조패왕이 되살아날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아주 길게 구타를 했던 건, 지난 원한을 갚으려던 것도 있었지만, 남은 원영신이며 가루라염을 전부 소진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으니까.
결국 신조패왕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사라진 뒤에야, 겨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었고.
어느새 무기를 바닥에다 내려놓고 투항한 패왕성의 무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나이가 젊어 정현에 대해 전설로만 접했을 뿐, 직접 경험한 것은 지금이 처음인바. 희멀겋게 질린 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공포가 가득했다.
“뭘 봐? 눈 안 깔아?”
정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녀석들은 후다닥 머리통을 지면에다 박았다.
눈먼 칼이 언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 * *
전장 수습은 빠르게 이뤄졌다.
이미 패왕성은 신조패왕을 비롯해 후계자들까지 전부 전사한 상태.
패잔병을 수습해 저항을 시도하거나, 다음 기회를 도모할 만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기가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사들은 무기를 바닥에다 내리고, 투항 의사를 밝혔다.
다만, 소수지만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직접 무당산을 짓밟았던 자들이었고, 이대로 투항한다고 한들 추후에도 살아날 희망이 없으리라 여기고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정현이나 무당구검귀, 영검단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흑신풍사가 말머리를 돌려 광풍사와 함께 녀석들을 에워싸 난타를 가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네놈들! 때문에! 내가! 왜 이렇게! 뭐 빠져라! 고생! 해야! 하냐고!”
흑신풍사는 가슴 속에 쌓인 화를 풀어내듯 가공할 무위를 선보여서 단숨에 저항군을 찢어발겨 버렸다.
그 때문에 투항한 패왕성의 무사들은 흑신풍사의 다음 손속이 자신들에게로 향할까 더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고, 무당구검귀는 흑신풍사가 어째서 십존의 다음 위치라 불리는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님.”
남궁환은 바쁘기만 한 바깥과 다르게, 대막사 안에서 바짝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꼴깍 삼켜야 했다.
설마 안휘가 아닌 호북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의천검제의 엄숙한 기도와 예리한 눈빛에 남궁환의 고개가 저절로 더 아래로 향하고 말았다.
찔리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정현을 따를 때까지만 해도, 남궁환은 이것이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협의를 실천하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정현을 통해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관이 모두 잘게 부서지고,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었으니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의검가의 소가주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허락 없이 타 세력의 충돌에 뛰어든 셈이었으니.
뒤늦게 의검가주가 참전해서라도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크게 일을 치르게 할 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에 대해 후회 따윈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조부님을 만나고 나니 가슴이 적잖게 억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의천검제는 그런 손자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문에서처럼 엄숙하게 그를 바라보다, 툭 하고 다른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옆에 있는 아이는?”
“아! 이번에 사귀게 된 벗, 영도라는 친구입니다.”
“곤륜파의 대제자, 영도가 의검가주를 뵙습니다.”
영도는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면서 인사했다. 예의를 한껏 차리면서도, 절대 주눅 드는 구석이 없는 자세. 절대자를 눈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순간, 의천검제의 눈가에 언뜻 기광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학, 그 친구가 말년에 키운 아이가 여태 잠들어 있던 구름 속의 용을 다시 깨웠다더니. 그 아이가 바로 자네인가 보군.”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그 나이대에 자신만의 도를 정립하고, 그 조각들을 맞춰 나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인데. 앞으로도 우리 못난 손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으면 좋겠네.”
영도는 의천검제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살짝 고무되면서도, 정현에 대한 믿음이 깊었기에 더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영도를 보면서.
‘이 형님께서 어디 또 귀한 명문가의 자제를 잘도 꾀어내셨군.’
의천검제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영도에게서 풍기는 기도에 섞인 정현만의 색채를 느낄 수 있었기에, 추후에 소요청학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불에 보듯 뻔했던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정현은 그렇게 제멋대로 사고를 치고 다니면서도,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항상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한 보따리로 끌고 다니곤 했다.
‘대부분이 땀 냄새 가득한 남자라, 정작 당사자는 아주 질색했지만 말이지.’
물론, 여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만독문의 대들보가 된 망량마후나, 북해빙궁의 최초 여주인이 된 설천빙화 같은 이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인들 중 대부분은 정현의 송옥 같은 얼굴에 반해서 쫓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금방 나가떨어진 반면, 남자들은 정현의 거침없는 성정과 호쾌한 무위에 반했던 까닭에 오랫동안 추종자로 남아 있었다.
의천검제, 본인이 과거 그런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이었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어렸던 시절에야 다 같이 어렸으니 젊은 날의 치기로 여길 수 있다지만.
지금 정현에게 물들어 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각 문파에게는 고욕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나도 그리될 것 같다는 것이지만.’
그래서 의천검제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면서 손자를 돌아보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이번 강호행에서 얻은 건 무엇이더냐?”
남궁환으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질문.
하지만 그는 이럴 때일수록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짜 벗입니다.”
“진짜라. 그래. 그보다 값진 보물은 없지. 그것뿐이더냐?”
“무인으로서의 길이 있었습니다.”
“재미난 것을 보았나 보구나.”
어찌 조손이 이리도 똑같은지.
의천검제는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를 더 물으려는데, 갑자기 막사의 문이 활짝 열렸다.
“손자 앞이라고, 젠체하기는.”
정현이 피식 웃으면서 안쪽으로 들어오자, 영도와 남궁환이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의천검제는 콧잔등이 살짝 붉어진 채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남은 이야기는 이따 저녁에 마저 천천히 나누자꾸나. 내 오늘 무당파의 대원로와 긴히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으니.”
“예. 할아버님.”
그렇게 남궁환과 영도는 천천히 막사를 빠져나왔다.
나서는 길에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아, 진짜 형! 이딴 식으로 할 거야? 손자도 있는데, 쪽팔리게!”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지만.
남궁환과 영도는 엄숙하기만 하던 의천검제가 그런 불만 가득 찬 어린 말투를 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기에,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 *
“어쭈? 몇 년 못 봤다고, 이놈도 지 동생처럼 막 개기네? 진짜 간만에 참교육이라도 해 볼까?”
의천검제는 정현에게 득달같이 따지다 말고, 그가 불쑥 내뱉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정현과 신조패왕의 싸움에 난입하기 전에 잠시 만났던 친동생, 남궁장료의 모습이 언뜻 떠올랐던 것이다.
정수리 위로 혹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 머리통 크기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어 있었지, 아마……?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렇게 부푼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질겁하고 말았었는데.
그래도 당시에는 어떻게든 피해가 더 확산되기 전에 싸움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드느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모든 전쟁이 끝난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슬금슬금.
의천검제는 근엄한 얼굴 위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엉덩이를 슬쩍 뒤로 내뺐다. 어쩐지 좋지 않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 그래도 형님이 행사하시는 자리에 허락 없이 끼어들어 놓고,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아, 생각해 보니까 또 열 뻗치네.”
엉덩이를 뒤로 내빼던 의천검제의 움직임이 흠칫하고 멈췄다.
“혀, 형……?”
“야, 안 되겠다. 좀 맞고 시작하자.”
“흡!”
의천검제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올려 막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정현의 주먹이 면전에 다다라 있었다.
퍽!
* * *
“하여간 어린놈의 새끼들은 꼭 한 대 쥐어박아야 말을 들어요. 그냥 좋게좋게 이야기 나누면서 끝내면 서로에게 얼마나 좋아? 그렇게 생각 안 하니, 응?”
“…….”
의천검제는 시퍼렇게 변한 눈두덩이를 달걀로 문지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 봤자, 괜히 멀쩡한 다른 눈두덩이까지 퍼렇게 만들 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형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떻게 이리도 달라진 구석이 없는지.
그때,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시립해 있던 흑신풍사가 다른 달걀을 그의 앞에 내밀어 주었다.
의천검제는 이놈이 자신을 약 올리는 건가 싶어 살짝 째려봤다.
정작 그에게 잠깐이나마 동질감을 느껴 나름대로 배려랍시고 해 준 흑신풍사로서는 억울할 노릇이었지만.
“여하튼.”
의천검제는 정현이 맞은편에 털썩하고 앉자,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면서 주춤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그러다 정현이 자신을 보면서 픽 웃는 걸 보고, ‘험험!’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우리 지난날 쌓인 빚 청산이나 해 볼까?”
순간, 의천검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급히 돌린 곳에는 정현이 여전히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나는 그래도 말이다, 선료야. 우리가 떨어진 지 꽤 오래되었어도 그동안 사이가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너나 너희 가솔들이 내 아이들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지.”
“형, 그건……!”
“아 참, 몰랐었다는 되도 않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 밑장 빼기 하다가 걸리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그냥 모가지가 날아간다?”
의천검제는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정현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스산하게 웃으며 재차 물었다.
“왜 그랬니, 선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