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용이 몸을 가라앉히면 숲이 고요해진다 (5)
백의선생은 요굉 대사와 잠시 담소를 나눈 뒤, 가벼운 인사와 함께 대웅전을 벗어났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조심해서 여정에 오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떠나는 사람의 인연의 실은 돌고 돌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 지금 잠시 헤어진다고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요굉 대사의 인사를 뒤로한 채.
백의선생은 예의 바르게 맞절을 하며 대웅전과 경내까지 완전히 벗어났다.
그 순간.
화라락!
마치 거짓말처럼 그의 그림자가 뒤로 길게 쭉 늘어나더니 위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림자가 점차 물로 씻은 듯이 사라진 자리에는 복면을 쓴 흑의의 사내가 부복해 있었다. 새하얀 의복의 백의선생과는 정반대되는 인상을 주는 자였다.
백의선생은 뒷짐을 진 채 흑의인은 보지도 않고, 그저 산자락 아래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요굉 대사와 대면할 때까지만 해도 부드럽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만 남아 있어,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준비는?”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무당파로 향하는 여러 상단이며 인파들 사이로 물건들을 나누어 놓았으니 절대 포착되지 않을 것입니다.”
흑의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당산에 웅거한 정현을 잡기 위해 그들이 마련한 덫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제아무리 녀석이 날고 긴다고 할지라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만해 있지 마라.”
백의선생은 서슬 퍼런 어투로 흑의인을 나무랐다.
흑의인은 아차 싶었던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놈을 만만하게 보다가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구천을 떠돌게 되었는지 그새 잊었더냐?”
“…….”
“자(子), 신(申), 유(酉), 술(戌)의 네 개나 되는 각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축각(丑閣)은 각주를 제외한 이들이 비명에 스러지고 말았다. 그 외에 묘(卯)와 오(午)는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음이니…… 이제 형제들 중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 너와 몇뿐이지.”
흑의인, 인각(寅閣)의 각주는 주군을 뵐 면목이 없다는 듯이 침음을 삼킬 뿐이었다.
“속세에서 한 발 떨어진 이곳 소림에서 지난 십 년 동안 강호가 어찌 돌아가는지를 지켜보았음이니. 너희들도 강호가 더 이상 쉽사리 보아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백의선생의 두 눈이 점차 금강석처럼 단단해졌다.
“그런 강호를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그동안 골치만 썩이던 검재를 제거하고, 천마혼을 마저 회수하여야 하니 절대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스르륵!
인각주는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차군.”
백의선생은 낭떠러지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머지않아 뜨거워지겠지.”
* * *
소진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
충허암에 마련된 자신의 방이었다.
“……아.”
소진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갑자기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란이 자신의 맥을 짚었고, 이후 무언가가 무의식에서부터 일어난다 싶더니 기억을 완전히 잃고 말았으니까.
“……또 나 때문일까.”
소진은 천마혼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정현이 거기에 대해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건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짧게나마 성녀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름’이 타인에게 폐를 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정현이 왜 그렇게 자신이 무공을 익히는 것을 경계했던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아마 이 ‘다름’ 때문이겠지.
처음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을까 봐 경계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걸까 싶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소진이 의기소침해진 채로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데, 바깥에서 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았다시피 진아는 무공을 익히지 않는 게 그 아이에게도 좋다.”
“……그러한 것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진즉에 눈치를 채고 말렸어야 하는데……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너와 청란이 잘못한 게 뭐가 있겠냐. 너희들도 똑같이 그저 진아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 그런 것일 뿐인데. 오히려 미리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한데, 다른 일대 제자들도 본 것은…….”
“그 녀석들은 내가 적절하게 타이르면 되고. 너는 그보다 애새끼들이 쓸데없는 짓 못 하게 막아.”
“알겠습니다.”
정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은 영도였다.
모두 다 봤구나. 소진은 그런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늘산에서도 그랬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피 냄새가 잔뜩 섞인 바람이 탄내와 함께 풀풀 휘날리던 그 날. 도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어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쓰러졌다. 오랫동안 하늘산을 수호하고, 성화를 숭배했다던 그들이.
그러지 말라고, 죽지 말라고, 엉엉 울어 대는 소진 앞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울지 마십시오, 성녀님.
성녀님은 웃으실 때가 가장 어여쁘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성녀에게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늘산을 재건해 달라고, 배교도들에 의해 망가진 교단을 바로 세워 달라고, 천마와 자신들의 복수를 해 달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웃으라며, 몸만 건강하라며, 그녀를 걱정하는 말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마지막까지 소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밝게 웃고 있었다. 귀여운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랬던 게 불과 반년 전이었건만.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게 언제라고 그사이에 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모양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었는데. 그걸 어겨 버린 것이다.
소진은 이불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혹여 밖에 들릴까 싶어 소리를 높일 수도 없었다. 이불보가 금세 축축해졌다.
그런데.
“깼으면 일어나서 어른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뭘 아직도 뭉그적대고 있어?”
소진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정현이 팔짱을 낀 채 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난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진은 여태껏 심통을 부리던 것들이 떠올라 차마 정현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난밤에 그녀를 호되게 야단치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
“눈은 퉁퉁 부어서는. 어디 벌에라도 쏘인 거냐?”
하지만 정현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팔짱을 풀며 소진에게 다가갔다. 언제 꺼낸 건지 손수건으로 소진의 눈가를 박박 훔쳐 주었다.
“아, 아파요! 할아버지!”
“얼굴에 먼지도 잔뜩 묻히고서는. 대체 그동안 뭘 하면서 놀러 다닌 거야?”
정현은 발버둥 치는 소진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놓다가, 한참 뒤에야 손수건을 내렸다.
“이제야 좀 볼 만하구나.”
정현은 눈이 퉁퉁 부어 있다 못해 눈동자까지 빨갛게 충혈된 소진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소진은 여전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무공. 익히고프냐?”
그러다 소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말았다. 꾸짖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정현은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평상시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
“남들에게 폐를 끼칠까 싶어, 혹여 내가 싫어하니 눈치가 보일까 싶어, 없는 말을 지어낼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네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특히 이 강호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네가 하고픈 걸 명확하게 하고, 그것을 위해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강호인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덕목이다.”
소진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시야 속에 잡힌 정현은 어느 때보다 자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타일렀다.
“너는 강호인의 손녀로 태어났고, 역시나 지금도 강호인의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강호의 유명 문파에 몸을 담고 있지. 나는 네가 강호와 멀리 떨어진 삶을 살기를 바란다만, 그걸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그저 내 의견일 뿐.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 아니냐.”
“……!”
“또한, 이번 일에 있어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전부 이 할아비의 실수지. 너는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을 시도하려 했을 뿐이고, 거기서 전혀 생각지 못한 사고가 터졌을 뿐이야. 어른은 그런 사고를 수습해 주고, 아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보호해 줘야만 하는 의무가 있지.”
“…….”
소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현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재차 물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이냐?”
“진아는…….”
정현은 말꼬리를 흐리는 소진에게 어서 대답해 보라는 듯 가볍게 턱짓을 했다.
사실 그는 소진을 데리고 와 암자에 눕힐 때까지만 해도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아무리 토라졌다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하지 말라던 행동을 했다가 이런 사달을 일으키고 만 것이니까.
하지만 깊게 잠든 그녀를 보면서 생각은 금세 바뀌고 말았다.
그녀에게 한 말마따나, 사실 소진의 인생은 소진의 것이었으니까.
더구나 그동안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소진은 이따금 무공 수련을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곤 했었다.
‘피는 못 속이는 게지.’
소진의 친조부는 강호에서도 내로라하던 고수였다. 그 전대(前代)에도, 전전대(前前代)에도…… 까마득한 세월 동안 강호에 명망을 떨치던 무가(武家)의 핏줄인 것이다.
그런 아이가 재능도 타고나고, 자질도 갖추고 있다. 머리도 명석하며 안목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그동안 정현에게 배우고 싶노라고 떼를 쓰지 않았던 것만 해도 아이답지 않은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당긴다면, 배우게 할 수밖에. 다만, 거기서 빚어질 모든 일들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일 테고.’
어른은 아이가 번듯하게 자랄 수 있게 끝까지 지켜 줄 의무가 있다. 언젠가 스승님에게서 들었던 말, 정현은 이제야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과거에도 진즉에 이 뜻을 알았더라면……. 아니. 지금부터 이 녀석을 잘 키우면 될 일이지. 그 아이도 그걸 바랄 테고.’
정현은 언젠가 사제의 연을 맺었지만, 끝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던 아이를 떠올리면서 소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옛 제자의 얼굴을 쏙 빼닮은 소진은 앙증맞게 주먹을 꽉 쥐면서, 무언가를 다짐한 듯이 크게 소리쳤다.
“진아는…… 배우고 싶어요!”
“알았다. 그러자.”
정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와락 안겨 들었다.
“으아앙! 할아버지! 죄송했어요!”
“야, 야! 콧물 묻어!”
“으아아앙!”
정현은 오늘 갈아입은 옷이 더러워질까 싶어 어떻게든 소진을 떼어 놓으려 했지만, 이미 한번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소진의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쓰게 웃으면서 한참 동안 소진을 달래야만 했다.
영도만이 그 옆에서 두 조손(祖孫)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