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16
16화. 용은 소리 없이 세상에 내려왔다 (16)
‘그래도 제법이군.’
정현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영도를 보면서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녀석이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난데없이 자신에게 찾아와 감사하다고 하니 황당했던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고 할까.
자신은 그냥 정신 좀 차리라면서 내버려 둔 것밖에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 뒤에는 귀찮은 나머지 거의 잊어 방치하기까지 했다.
그걸 두고 혼자서 큰 가르침이니 뭐니 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해 버리니.
아마 녀석은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저만한 경지를 밟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으리라. 재능이나 자질은 뛰어날지 몰라도, 자라는 방향이 너무 틀려먹었었으니. 도중에 제 스스로 꺾여 무너졌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 녀석은 크게 뭔가를 깨달으면서 방향을 다시 잡았다. 그것도 아주 올바른 길로. 지금 이대로 마음가짐만 변하지 않는다면 훗날 큰 거목이 될 것도 같았다.
‘곤륜이 그래도 전망은 있나? 청학 놈이 있는 것치고는 제법이로군.’
그나저나.
‘이놈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운데.’
마치 제 스승이나 은인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 아닌가. 아주 꿀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라고 하면 정말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은 충직한 모습이었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근데 정작 무슨 말을 하려니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부려 먹는 건 편하기라도 하지, 뭔가 좋은 말을 해 주려니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그래도 여기서는 강호의 존장으로서 그럴듯하게 떠벌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화아아―
정현은 내공을 잔뜩 응축시킨 우윳빛 서기를 운무처럼 잔잔하게 뿌렸다. 마치 그 모습이 구름을 노니는 신선처럼 영험하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영도의 눈가에 짙은 환희가 번졌다. 마치 신도가 구세주라도 영접한 듯한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곤륜파 제자들하며, 주변의 행원들까지 반쯤 황홀에 젖은 얼굴로 정현을 바라보았다. 소진만이 다들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현을 바라보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이니 아무 말도 않았다.
정현은 겉으로는 최대한 근엄함을 유지한 채, 속으로 만족에 찬 웃음을 흘렸다.
연출 좋고.
그리고 목소리에도 공력을 적절히 섞어 낮게 울리게 만들었다. 왠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낮은 목소리에 환장하는 것 같았다.
“너의 길은 너의 길일뿐이니, 그 길을 걷는 자로서 나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목소리도 좋고.
“하지만 저로서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은혜는 무슨. 구도자(求道者)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인 것을. 그렇다 하여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면, 네가 지금 깨달은 바를 앞으로도 잘 가꾸어 세상을 밝게 만들고, 앞으로 너와 같이 방황하는 이들이 있으면 길을 같이 나눠 주면 되는 것이다.”
“하면…… 앞으로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도는 도라고 일컬을 때 그 빛을 잃는 법. 또한, 그 빛을 억지로 키우려 할수록 빛을 잃고, 억지로 잡으려 할수록 물처럼 네 손을 빠져나갈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할 것이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소리긴 무슨 소리야.
‘헛소리지.’
영도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혹감이 스쳤다. 뭔가 속 깊은 조언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문답 같은 말을 해 대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정현은 이럴 때는 더더욱 그럴듯한 선문답을 지껄여야 존경심이 배가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도는 빛이요, 물이니. 어느 곳에도 갇힌 바가 없이 빛나고, 또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잊지 말란 뜻이다.”
영도는 깊은 고심에 잠겼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듯 다시 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제 도를 세상 모든 이들에게 고루 나눠 주되, 그것을 강요치 마라. 타인의 도도 도이니 그 도가 빛을 볼 수 있게끔 그것이 자랄 수 있도록 도우라, 그런 말씀이시로군요! 도는 무엇이라 정할 수 없으니……!”
순간, 영도의 눈가 위로 안광이 다시 샘솟더니 정수리 위로 짙은 서기가 떠올랐다. 서기는 각각 적, 청, 황의 삼색(三色) 꽃을 화려하게 만개시키다가 잘게 부서져 다시 머리에 내려앉았다.
삼화취정(三花聚頂)!
절정 급에서도 내공이 전혀 막히는 바 없이 수발이 자유로워지며 강기(罡氣)를 조금씩 그려 내기 시작한다는 경지가 아닌가!
당대 강호 내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조차 닿을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것이다. 각 명문 정파의 수뇌부들, 곤륜파로 치면 장로급이나 여기에 해당할 수 있을까.
‘뭐야, 이 새끼?’
정현은 이제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몇 마디를 아무렇게나 지껄였다고 해서 이렇게 알아서 척척 발전하는 경우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으니.
영도는 여전히 머릿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깨달음을 정리하는 듯, 가만히 그것을 음미하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어르신…… 아니, 진인(眞人)께서는 다르셔도 한참 다르십니다. 앞으로도 사천으로 가는 길 동안, 이 모자란 영도가 틀린 길을 갈 때면 서슴없이 꾸짖어 주시고, 올바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정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운무를 높게 피웠다. 마차가 천계로 올라가듯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아예 바닥에 넙죽 엎드리고서 ‘무량수불’을 외치면서 치성을 드리고 있었고, 곤륜파 문도들은 눈을 꼭 감으면서 뭔가를 곱씹고 있었다.
그 들을 보면서. 정현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다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뭐, 부려 먹을 놈이 세지면 세질수록 그만큼 나야 좋은 거니까.’
* * *
“할아버지, 할아버지.”
“왜?”
“할아버지는 신선이에요?”
정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또 이것이 이상한 말을 듣고 왔구만.’
소진은 최근 들어 영화와 어울리더니, 다른 행원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현의 손녀라 여겨 가깝게 다가가지 못했었지만, 워낙에 아이가 착하고 천진난만하니 친딸처럼 아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꽈악!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소진의 눈이 너무 애절했다.
그래도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소진이 자신에게 가져 주는 관심인지. 정현은 최대한 기쁜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쟁자수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원래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지선(地仙)이 되어서 선계로 갈 예정이었는데, 속세의 중생들을 구제? 구도? 하여간 그런 걸 해야겠다고 억지로 남아 있는 거라구요.”
얼씨구.
행원들 사이에 자신을 두고 이 말 저 말을 덧붙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소문이 그런 식으로까지 불어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지선? 그렇게 귀찮기만 한 걸 내가 왜 해?’
그리고 신선을 관리하는 건 옥황상제가 아니라, 태상노군일 텐데.
물론, 진짜로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다면 만나고 싶기는 했다.
낯짝을 후려치려고. 그 작자 때문에 자신이 이 나이가 먹도록 이렇게 귀찮은 일들에 휘말린 게 아닌가.
그런데 소진의 표정이 영 좋질 않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울 할아버지처럼 갑자기 안 갈 거죠?”
‘이거였구만.’
정현은 소진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럴 일 없다. 쓸데없는 걱정 마라.”
“정말…… 이죠?”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냐?”
“많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 그런 생각 마.”
“히히. 네! 알겠어요.”
유일한 가족이었던 제 할아비도 떠난 이때. 소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현밖에 없었다.
―그러니 부탁함세. 부디 내 손녀딸을…… 그 아이만큼은 억압만 받고 살았던 제 부모와 달리,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친구도 사귀고 연애도 하다가, 결혼해서 아이도 낳을 수 있도록…… 그렇게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게.
‘평범이라.’
정현은 한평생 서로의 목숨만을 집요하게 노리던 호적수로 지내다가, 늘그막에 가서야 겨우 마음을 탁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 되었던 이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천마라는 걸출한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피투성이가 되어,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어떻게든 자신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으면서 겨우겨우 내뱉던 그 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부탁해도 참 빌어먹을 것을 부탁하는군. 그 말이 우리에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지만 정현은 친구의 소원을 어떻게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이 귀여운 아이만큼은 굳이 자신들이 겪었던 지옥을 걸을 필요가 없잖은가.
어떻게든 자신의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시작한 계획의 첫 단추는 아직 끼워지지 않은 것 같았다.
‘재수 없으면 눈먼 놈이 걸려들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명천교의 옛 졸개 놈일 줄이야.’
정현은 축 처진 어깨로 광풍사의 마인들을 이끌고 다니는 흑신풍사를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그가 잡고자 했던 건 이들이 아니라, 비호표국을 휩쓸었던 놈들이었다. 광풍사가 범인이 아닌 건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타심통(他心通)도 있거니와, 범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신기(神氣)가 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목제 분타주를 푹 찌르면 알아서 그놈들을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긴 벌써부터 미끼를 물면 재미없겠지.’
정현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건 여우 사냥과 같았다. 숨어 있는 여우를 찾아서 사냥하는 놀이.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한들, 그의 손바닥 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흑신풍사를 거둬들인 게 군입만 는 것처럼 보여도,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저만한 물건이면 쓸 만한 곳도 많겠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재미난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물어볼 것도 있고.’
때마침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라도 느낀 걸까. 흑신풍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현이 차갑게 웃으면서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흑신풍사는 자신이 뭐라도 잘못했나 싶어 표정이 썩어 가다가.
“…….”
터벅.
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걸어갔다.
* * *
“……현 중원의 판도를, 말씀이십니까?”
“어. 내가 사실 이유가 있어서, ‘그 날’ 이후로 강호를 떠난 지 제법 오래되었거든? 여기 있는 행원들도 중원을 나선 지 사 년이 넘었고. 곤륜 놈들은 아예 딴 세상 놈들이잖아? 그래서 요즘 중원은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서.”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흑신풍사는 잠시 고민에 잠기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현에게 물었다.
“‘그 날’ 이후의 일들을, 말씀드리면 되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