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용은 빛 속에 저문다 (13)
정현은 송문고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아, 안……!”
대신들이며 내관들까지 모두 경악하면서 정현에게로 달려들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송문고검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정현과 황제가 앉아 있는 침상 사이 간격이 절대 검이 닿을 수 없는 거리라고 하지만, 정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깟 거리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스걱!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소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사람들은 차마 상황을 확인할 용기가 없으면서도, 두려움을 한껏 느끼면서도 억지로 침상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야만 했고.
잘린 머리카락 더미가 나풀나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다행히 떨어진 것이 황제의 머리가 아닌 상투라는 사실에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는 것이기에 절대 손상을 입을 수 없는 법이고, 그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문명사회의 최고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의 것이라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관을 포함해 상투를 전부 잘라 버린 셈이니…… 황제는 마치 망나니처럼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짐을 살려 주시는 거요?”
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문고검을 도로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뚱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몸을 반대로 돌려 궁을 빠져나갔다.
그를 따라왔던 군문의 인사들은 정현과 황제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지만.
“다들 진왕을 잘 보필해 주고 오너라. 가시는 길이 먼 것 같으니, 적적하시지 않게 보살펴 드리기도 하고. 일이 모두 끝나면 짐에게로 돌아오라.”
황제의 윤허가 떨어지자, 장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정현의 뒤를 따라 궁을 벗어났다.
그렇게 숨 막히던 시간이 끝나고.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괴팍하신 분이란 말이지. 그만큼 정도 아주 깊으시지만.”
황제는 정현이 떠난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정현에 대한 원망이나 노여움 따위는 일절 담겨 있지 않는 모습.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폐, 폐하! 오, 오, 옥체는 성하시나이까?”
“다, 당장 어림군을 움직이시옵소서! 저 방약무인한 작자를 잡아다 치도곤을 내시어야 하십니다!”
“그렇사옵니다! 감히 황실에서 칼을 휘두르고, 군을 사사로이 움직인 역도이옵니다!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기고만장함이 하늘에 닿을 터! 반드시 징치해야만 하옵니다!”
대신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서둘러 정현을 붙잡아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 그들이 봤을 때, 정현은 황실의 권위와 위엄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위공(魏公) 조조(曹操)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는 황제의 입가에는 어이없다는 웃음이 걸렸을 따름이다.
방금 전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정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양반들이, 그가 사라졌다고 해서 빽빽 소리를 질러 대는 꼴이 우습기만 했으니까.
“알겠소.”
“폐하, 하면……!”
“그럼 누가 짐을 대신하여 저 방약무인한 작자를 징죄하시겠소? 재상께서 하시겠소? 아니면 우승상께서?”
“헙!”
“소, 소신은 군을 이끌기에 적합한 나이가 아닌지라…….”
신하들은 황제의 서슬 퍼런 눈빛이 자신들에게 닿을까 싶어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럼 다들 닥치시구려.”
“…….”
“…….”
“…….”
“태감과 내직당이 기승을 부릴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분들이 그런 말을 하니, 짐이 참 우습잖소?”
대신들은 그제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들 중 몇몇은 황제의 신랄한 비난에 억울해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황제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당초 그는 타인의 마음 따윈 전혀 배려하지 않는 폭군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얻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걸리적대기만 하는 이들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내쳐 버릴 심산이었다.
애당초 신하라는 것들은 제 이익만 찾아 움직일 뿐, 진정으로 황실을 걱정하는 충신은 손에 꼽는다.
황제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들의 이해를 전혀 바라지도 않았다.
여태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짐의 이해자였던 사람이 모두 떠나니 조금 적적하긴 하구나.’
류여해는 죽었고, 정현은 떠났다. 영검은 이제 그의 수족으로만 존재할 뿐, 동등한 위치에 있는 동료라 할 수는 없었다.
이 넓은 하늘 아래, 황제는 아주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고독함을 느껴야만 했다.
어쩌면.
이것이 정현이 그에게 내린 벌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불쌍한 놈.’
정현은 건청궁을 나오면서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찾지 않을 장소였지만, 그래도 씁쓸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쓸데없이 옛 추억에 발목 잡히니. 역시 난 늙었어. 더 자질구레한 생각이 들기 전에 어서 검을 꺾어야겠군.’
애당초 강호에 남은 모든 인연을 정리하기 위해 시작한 강호행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서둘러서 진행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이대로 계속 길어졌다간 더 많은 인연들이 그를 강호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옭아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하나가 남았나.’
‘회’.
정확하게는 천회(天會)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은…….
‘하늘산.’
일 년 전. 유일했던 벗을 잃고, 손녀를 등에 업은 채로 내려와야만 했던 곳으로 드디어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가자.”
정현의 명령과 함께.
두두두두!
십만에 달하는 군세가 일제히 황도를 벗어나 북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인회(人會)에 이어서 지회(地會)도 사라진 이때. 검재는 황실까지 움직여서 하늘산으로 병력을 대거 몰아오고 있소. 이제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늘산.
천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중원을 포함해 새외까지 모든 강호의 공포로 군림해 왔던 마역(魔域).
그곳은 초대 천마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천교가 단 한 번도 떠나질 않았던 위대한 성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뭘 모르는 이들만이 떠들어 대는 소리였을 뿐.
오늘날 하늘산의 주인은 더 이상 천마와 명천교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질적인 존재들. 정현과 천마가 ‘문’ 너머의 존재라 불렀던 인외(人外)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근 들어 중원에 뿌려 두었던 첩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소식을 바쁘게 받고 있는 중이었다.
‘회’를 이루던 세 개의 기둥 중 두 개가 허물어졌으며,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마저도 중원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외에도 곳곳에 심어 둔 첩자들이며 세력들이 빠른 속도로 소거되고 있었다. 이제는 그 물결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 새외에서도 똑같이 이뤄지고 있었으니.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이 세상에 뿌리내리려 했던 ‘회’의 그림자가 모두 걷힐 게 분명했다.
“역시 그때 하늘산을 순순히 내려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어…….”
누군가가 던진 말은 깊은 울림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는 거기에 대해 공감은 하고 있을지언정 찬동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현이 하늘산을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배려를 해 주거나 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냥 그를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천마를 죽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었으니까. 만약 거기서 정현까지 제거하려 들었다면, ‘회’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을지도 몰랐었다.
하지만 결국 정현은 중원에서 다시 힘을 길러 하늘산으로 향하면서 그들의 팔다리를 빠른 속도로 잘라 나가고 있었다. ‘회’로서는 울화통이 터질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당장 그들이 하늘산을 벗어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을.
명천교가 하늘산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아 왔듯, ‘회’도 하늘산을 크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애당초 하늘산만큼 강한 영기(靈氣)를 품은 곳이 이 세계에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초대 천마가 신(神)이 되어 승천했다고 알려진 곳. 그런 만큼 하늘산은 너무나 많은 영맥이 모여들어 커다란 터를 이루고 있었고, 원래 살던 세계에서 쫓겨나 이곳에 새롭게 자리를 잡으려던 ‘회’로서는 가장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그러니 ‘회’는 하늘산을 근거지로 삼아, 힘을 최대한 비축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차피 그들이야 남는 게 시간이니, 차근차근 이 세상의 기운과 동화되어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육체를 얻을 심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낱 인간 집단으로만 치부하여 무시해 왔던 명천교의 저항은 끈질겼고, 이렇게 뼈아픈 타격을 입고 말았으니.
지난 일 년 동안 세력을 복구한답시고 복구했으나, 뜻대로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미칠 노릇이로군.”
누군가가 그렇게 작게 읊조렸을 때.
화라라라!
인외의 존재들이 한가득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있던 마신궁(魔神宮)의 지붕 위로, 한 명의 여인이 표홀히 떨어졌다. 비단옷을 날리는 자태가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선녀를 보는 것만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묻어 있질 않아, 마치 얼음을 조각한 것처럼 생기를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천회주.
‘회’의 첫 번째 주인이자, 모든 인외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의 등장에 신하들은 모두 그녀가 내려앉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 주면서 고개를 깊숙하게 조아렸다.
“여기서 무슨 소리를 떠든다고 한들, 달라질 것이 뭐가 있으려고? 다들 준비해. 검재는 물론, 천마혼도 같이 넘어오고 있으니까. 너희들 모두 먹히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버텨야 하잖아?”
인외의 존재들은 저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천마혼은 인외의 존재들보다도 더 인간의 법칙을 벗어난 규격 외의 존재였고, 그런 이가 검재와 하나로 합쳐진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를 천마와 똑같이 이곳 하늘산에 묻어 주는 것. 어차피 그들은 이곳 외에는 돌아갈 구석도 전혀 없었다.
파아아―
결국 인외의 존재들이 저마다 허공으로 녹아들면서 사라지고.
천회주는 홀로 남은 마신궁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을, 저만치 머나먼 동쪽에서부터 십만 대군을 이끌고서 이곳으로 오고 있을 다른 누군가였다.
“아버지.”
자그마한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드디어 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