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31
31화. 봄소식은 그렇게 찾아온다 (2)
“그래. 물건은? 잘 배달했고?”
달이 내려앉은 밤.
정현은 야영지에서 소진에게 줄 군고구마를 만들기 위해 모닥불을 뒤적이면서 도심개를 돌아보았다.
그야말로 천하태평인 모습.
도심개는 군고구마의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하신 대로 방금 전에 섬서 도지휘사사에 무사히 물건을 배달했다는 전서를 받았습니다.”
“수고했다.”
“저 그런데…….”
“왜 그래?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인데?”
“그 물건이……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도심개는 정현이 벌이는 웬만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어르신이 하는 일이니 으레 어떤 심계가 있으시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이었다.
정현이 섬서 도지휘사사로 배달하라던 붉은 두루마리와 즉석에서 아무렇게나 휘갈겨 썼던 서찰 한 장.
지급으로 처리하는 게 좋을 거란 말에 재빨리 행원 중 한 명을 시키긴 했다지만.
그 두 물건이 대체 어떻게 흑건적을 앞으로 쏟아질 여러 견제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도심개의 위치를 공고히 해 줄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서찰과 두루마리의 내용은 예의가 아니다 싶어 절대 확인하지 않았으니.
특히 배달을 마쳤던 행원이 보낸 전서에 적힌 내용도 그의 궁금증을 계속 부채질했다.
그래서 좀처럼 참지 못하고 물은 것인데.
정현은 그런 도심개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재미있어 죽겠다며 히죽 웃고 있었다.
“왜? 가르쳐 줘?”
“……배달을 하던 행원의 전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도지휘사사가 발칵 뒤집히고, 도지휘사는 아예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덜덜 떨었다고요.”
“오. 그래? 그래도 생각보다 잘 먹혔나 보네.”
도심개는 차마 처음에는 적진에 걸어 들어가는 사절처럼 적개심에 찬 시선을 가득 받던 행원이, 지금은 지극정성으로 대우를 받고 있어 얼떨떨해한다는 사실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정현이 피식 웃으면서 재차 막대기로 고구마를 뒤집더니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거 진왕부의 단서철권(丹書鐵券)이야.”
내용은 절대 별 게 아닌 게 아니었지만.
비교적 평정심을 잘 유지하던 도심개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지, 진왕부라면 홍련무후대장군(紅蓮武侯大將軍)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품계와 공적에 따라 수많은 제후들이 존재하고, 가장 꼭대기에 왕이 있다. 그리고 그 왕 안에서도 일자왕이니 이자왕이니 하며 서열이 매겨지는데, 일자왕은 사실상 황제와 황태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는 성역이었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일자왕은 대부분 이름이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유독 감숙과 섬서 일대에 걸쳐 봉지를 하사받은 진왕(秦王)에 대해서만큼은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분명히 섬서 서안에 왕부는 설치가 되어 있지만, 사실상 왕부의 주인이 탄생 이래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불분명한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황궁이 정치적인 의도로 아무도 없는 왕부를 개창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았지만.
그래도 조정의 오랜 원로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진왕은 있다’느니, ‘진왕은 대단했지’하는 말을 떠들어 대는 통에 없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진왕은 당금의 황제가 여러 난리 속에 무사히 옥좌에 앉을 수 있도록 도운 일등 공신으로서, 홍련무후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따로 하사받기도 했으니.
그 무위에 대해서 전해지는 말들도 아주 많았다.
동창과 금의위의 실질적인 설계자이며 큰 스승이라는 둥, 좀처럼 확인되지 않은 뜬구름 잡는 소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하튼 그런 까닭에 진왕은 신비에 가려진 존재로서 세간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편이었는데.
갑자기 그런 진왕이 언급되니, 도심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 맞아. 그게 나야.”
“……!”
“옛날에 한창 어수선할 때, 웬 꼬맹이 놈이 싹수가 괜찮아 보이기에 도와줬더니 언젠가 떡 하니 황제가 되더라고.”
정현은 옛 추억을 이야기하듯 가볍게 웃었지만, 도심개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현 황제는 한무제와 당태종이 환생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방 군벌이며 호적들, 그리고 막북의 유목민들에게 공포로 군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황제를 이놈 저놈 취급하는 정현의 모습이 너무 거리감이 멀게 느껴진 것이다.
“그, 그럼 진왕부는……?”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 붙잡아 대는 거, 걷어차고 나왔더니 이거라도 가져가 달라면서 자리 하나 던져 주더라고. 그건 거절할 필요가 없으니까 날름 받았지. 귀찮아서 들러 본 적 없지만.”
“…….”
“그래도 황궁에서 알아서 청소 잘 해 줘,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달마다 월봉도 따박따박 들어와, 그거면 됐지. 안 그래?”
도심개는 여전히 혼자서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정현이 너무 멀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생각을 정리해 보니 황제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검선 어르신의 성정으로 봤을 때, 조정 내 어떤 자리로 회유해도 잡을 수 없는 분이란 걸 아셨을 테니…… 그런 식으로나마 끈을 계속 잇고자 하신 건가?’
진왕이라는 황궁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다면, 차후 황궁 내 어떤 변고가 발생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좋을 터. 정현으로서도 지난날의 정이 있으니 그것을 무시하지 않을 테고.
정현도 그런 노림수를 모르지 않았을 테니, 당시에 어렸을 황제가 귀엽다며 속아 넘어가 주는 척했겠지.
‘그럼 동창과 금의위 같은 중앙군들이 실은 진왕의 후예들이란 소문은…… 단순히 뜬소문만은 아니었던 건가.’
검재가 직접 키운 군대라니. 상상만 해도 부르르 떨렸다.
도심개는 어째서 황제가 열 살이란 어린 나이로 보위에 앉아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그 숨겨진 단면을 엿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단서철권은 황상께서 주신 것입니까?”
“어. 교지도 같이 내렸으니까, 그놈, 아마 지금쯤 좋다면서 짱돌 열심히 굴려 대고 있을걸? 대가리에 생각이 제대로 박혔으면 나중에 너한테도 고맙다고 따로 인사도 하겠지. 그때 잘 받아 둬.”
“명심하겠습니다.”
“아, 참.”
“예.”
“만독문, 특히, 당문에는 백화련 때처럼 내가 여기 있는 거 철저하게! 함구하고.”
도심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흑건적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반대로 이제 골치를 썩게 된 건, 후군 도독부와 사천의 만독문이었지만.
독왕의 고희연만으로도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저들이, 십만에 달하는 흑건적들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이 들까?
그리고 지금쯤 이쪽의 소식을 접했을 상단의 대공자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이래저래 큰 사고를 저지르는 것 같아도, 그 아래 이런저런 수를 준비해 두는 정현의 포석이 대단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벌써 몇 번씩이나 봐 왔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당문을 이야기할 때에는 뭔가를 강하게 꺼림칙해한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설마.’
도심개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정현이 세상에 꺼려 할 게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생각은 금세 잊어버렸다.
하여간 참 보면 볼수록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심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 이놈은 잘 익었네. 앗! 뜨뜨! 후우! 후우!”
저렇게 손녀에게 맛있는 군고구마를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서 좋았다.
* * *
만독문(萬毒門).
사천의 오래된 세력가, 당문을 중심으로 여러 호족과 문파가 뭉치면서 탄생한 곳.
이곳은 원래 당문의 가주가 문주도 같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얼마 전 고희연에서 강호 은퇴를 선언할 것이란 독왕의 발표에 따라 소가주 당완이 차기 문주로 내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여태 소가주였으니…… 참 아버님도 너무 하셨지. 어딜 가더라도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으니.’
당완은 아버지 독왕 당산표를 떠올릴 때면 항상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칠순이 다 되어 가시면서도 항상 정정하고 권력욕이 남다른 나머지, 문주 직을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아 여태 이 나이가 되도록 ‘소가주’로서 지내야만 했던 시절이 쭉 떠올랐던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때까지 문주와 가주 직에는 발도 못 붙이고 자식 놈에게 바로 물려주게 되겠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차였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고희연에서 금분세수를 할 것이니 준비하란 말씀을 던지시면서 고희연은 이전 계획보다 훨씬 거창하게 준비되는 중이었다.
그래서 당완도 덩달아 매우 바빠졌지만,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당당히 십주의 주인으로서 어깨를 펼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입가에 그런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불과 며칠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당완은 오늘 아침 자에 후군도독부에서 자신 앞으로 날아온 협의 요청서를 보고 다시 미간에 골이 패는 중이었다.
사천으로 진입하고 있을 흑건적에 대한 어떤 계획이 있다면 즉각 재검토를 요청하는 바이며…….
장황한 문장으로 이리저리 쓰여 있었지만, 결국 요청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흑건적을 그냥 내버려 둬라. 뒈지고 싶지 않으면.
만독문으로서는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백화련과 섬서 도지휘사사가 그들에게 이렇다 할 제재를 가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적극 항의하기 위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사천 도지휘사사와 함께 밤새 논의를 하고 있던 차였는데.
이 요청서가 전달되는 것과 동시에 사천 도지휘사사에서 갑자기 ‘이건 어디까지나 강호의 일이니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라며 발을 내뺐다.
당완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라, 즉각 상급 기관인 우군도독부로 연통을 넣었지만 그쪽에서도 후군도독부의 요청을 받아 주라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도저히 이쪽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하며 몸을 사리는 형편에 가깝다고 해야 했다.
대체 흑건적 무리 뒤에 어떤 뒷배가 있어서 저러는 건지.
당완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젠장…….”
반란이라도 저지를 게 아닌 이상에야 도독부의 요청에는 적극 협조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건적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백화련에서는 저들이 감숙에서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십만에 달하는 도적놈들이 도중에 어떻게 변할지 어찌 안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평상시에 왔다면 감시만 하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지금 사천이 독왕의 고희연으로 각지에서 몰린 사람들로 인해 한창 소란스럽단 점이었다.
어떤 분란이 벌어져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 저쪽과 이야기를 나누는 수밖엔 없나? 마침 저쪽에 창천상단의 대행수도 있다고 하니 그래도 대화는 되겠지.’
흑건적을 이끄는 수장 중에 창천상단의 대행수가 끼어 있다는 건 이쪽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
창천상단은 만독문이 자리 잡은 성도에 같이 기틀을 마련한 곳. 그들과도 깊은 인연이 있으니 그쪽을 통하면 이야기가 잘 될 듯싶었다.
딸랑, 딸랑―
당완은 붓을 들어 서찰을 끼적이고는 탁상에 있던 종을 가볍게 흔들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영아에게 일러 즉시 사절단을 꾸리고, 이 서찰을 흑건적에게 전달하라 일러라. 차기 소가주가 직접 간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저쪽에도 면이 서겠지.”
“흑건적, 말씀이십니까……?”
“그래. 감히 아무런 허락도 없이 본 문의 영역에 침범한 것이 괘씸하기는 하나, 현재는 고희연이 더욱 중요하니 저들의 일은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겠다.”
수하는 사안의 중요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히며 서찰을 받았다. 그도 그동안 당완이 흑건적 때문에 얼마나 화가 많이 쌓였는지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하면 이 사안은 가주께도 별도로 보고를 올려야 할까요?”
당완은 더 이상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벌써 문 내의 일에 손을 떼신 아버님이니 신경이나 쓰실까 싶지만, 그래도 아직은 가주이시니 따로 보고서를 작성해 올려야겠지.”
“그리 지시하겠습니다. 그럼 암천굴(暗天窟)에는……?”
순간, 당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두 가지 감정이 스쳤다.
두려움. 그리고 공포.
“미쳤느냐? 지금 그분이 얼마나 바쁘신 시기인데! 조카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고 계신 분이다. 쓸데없는 일로 근심을 안겨 드리지 마라. 가솔들에게도 행여 실수로라도 그 근처로 가지 말라 이르고. 손님들의 방문도 일절 삼가토록 경비를 단단히 세워라.”
“존명!”
당완은 수하가 자리를 떠나고서도 ‘암천굴’이란 단어가 주는 두려움을 떨쳐 내려 한참 몸을 떨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