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봄소식은 그렇게 찾아온다 (4)
“아……니구나. 으, 젠장.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네.”
정현은 두 눈을 끔뻑끔뻑하면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당채영을 보고, 뒤늦게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과 너무 똑 닮은 얼굴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크게 놀랐던 것인데.
자세히 보니 눈매며 코에 박힌 점 등이 실제 얼굴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은 무려 육십 년 전의 얼굴. 지금은 흐르는 세월을 막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매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정현으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을 좀처럼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가 여태 당문에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절반 이상은 ‘그녀’ 때문이기도 했다.
나머지 절반은 당문이 가진 특유의 귀찮기 짝이 없는 성격들 때문이었고.
그런데 한현호라는 아이에 대해 알아보려 이동하던 중에 ‘그녀’를 닮은 아이와 당문으로 보이는 복색의 무인들을 마주쳤으니.
그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젠…… 장?”
하지만 정현의 그런 사정을 모르는 당채영은 난생처음 듣는 욕지거리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고.
“감히, 이 무례한 작자가!”
채채챙!
서이교를 비롯한 사절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일제히 병장기를 꺼냈다. 독을 주로 사용하는 자들은 손에 저마다 수투(手套)를 쓰고, 독낭(毒囊)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자신들이 모시는 작은 주인이 웬 이름 모를 남자, 그것도 한낱 도적 따위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장이라도 출수를 할 것 같은 자세들.
그들이 내뿜은 투기가 살벌하게 사방으로 퍼졌다.
“이것들은 또 뭐야?”
정현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가뜩이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봐서 짜증이 나던 차였는데, 웬 이상한 놈들이 다짜고짜 칼부터 뽑아 드니 화가 날 수밖에.
“좋은 말로 할 때 칼 내려라.”
“……!”
“……!”
“……!”
화아악!
순간, 정현을 따라 살기가 맹렬하게 뻗쳐 나갔다.
그러자 만독문의 사절단이 풍기던 투기가 단번에 확 밀려나고, 그 자리를 살기가 가득 채우면서 그들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연스레 사절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저히 쉽게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압박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그의 말마따나 그들의 목이 금세 달아날 것 같았다.
단지 기세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할 줄이야!
독천단(毒天團)은 만독문 내에서도 최정예들만을 따로 모아 두어 오로지 문주 직속으로만 움직이는 곳.
비록 그들이 자랑하는 애병이며 맹독들을 따로 구비하지 않아 전력이 많이 경감된 상태라 하더라도, 이만한 고수는 강호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들로서는 정현이 누군지 좀처럼 유추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태극도포를 입고 있는 걸 봐서는 무당파 제자인가 싶다가도, 흑건적 내에 그런 인상착의를 가진 고수가 있단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은 주인이 모욕을 당한 이 상황에서 쉽게 물러난다는 건 당문과 만독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행위.
그들은 도리어 죽음을 각오하고 더 강하게 맞섰다.
정현의 인상도 더 크게 일그러지려던 그때.
“어르신.”
도심개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잃고 재빠르게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정현은 그를 돌아봤다. 그제야 대강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당문이 벌써 왔었어?”
“예. 이 행수를 시켜서 말씀드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전달이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이따 따끔하게 질책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됐어. 길이 엇갈렸나 보지, 뭐. 얘네들 올 줄 알았으면 안 나오는 건데. 쯧!”
정현은 가볍게 혀를 차고, 여전히 자신을 경계 중인 사절단에게 딱 한 마디를 던졌다.
“넣어, 새끼들아.”
차차창!
사절단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저마다 뽑았던 병장기를 도로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들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한 말 한마디로 자신들의 행동을 맘대로 통제한다고?
어기상인(御氣傷人)!
이제는 이 백발 청년이 괴물로 보일 지경이었다.
특히 당채영의 표정 변화가 가장 컸다.
처음에는 정현의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끌려왔다가, 그다음에는 욕을 듣고 잠깐 빈정이 상하고, 또 그다음에는 정현의 뛰어난 실력에 크게 놀라는 등, 짧은 순간에 여러 감정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정현은 이제 대놓고 자신의 얼굴이 뚫어져라 주시하는 당채영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절단에게 짧게 경고했다.
“너네들 윗대가리 때문에 대가리 겨우 붙이고 있는 줄 알아. 하여간 요즘 애새끼들은 겁대가리가 없어요.”
정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재차 가던 길로 지나치려 했다.
“잠시만요!”
당채영은 멍하니 정현을 보고 있다가, 이대로 정현을 놓치게 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또 뭐?”
정현은 이것들이 또 무슨 시비를 걸려는 건가 싶어서 당채영을 돌아봤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에 다시 속으로 한 번 더 흠칫거려야만 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닮은 얼굴이었다.
그런 정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채영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당신이 반검무적인가요?”
“반검무적?”
이게 뭔 뚱딴지같은 말인가 싶어 도심개를 돌아보니.
“영도 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심개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정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새 그런 별호가 붙었어? 그것참, 거창하게도 붙었네. 하여간 들었지? 난 아니란다, 꼬맹아.”
정현은 당채영이 더 무슨 말을 붙이기 전에 훌쩍 자리를 떠났다.
사절단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정현이 사라진 곳을 봐야만 했다. 그만큼 아주 잠깐 사이에 정현이 준 충격이 컸던 것이다.
특히 당채영이 받은 충격이 가장 큰 듯,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신색을 회복할 때까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도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사람이 그만한 기세를 보였으니 놀랄 수밖에.
하물며 그는 스스로 영도가 아니라고 했다.
아니, 도리어 영도를 아랫사람처럼 취급했다.
더 높은 신분과 실력을 가진 고수란 뜻.
당완이 어째서 흑건적에 대해 상세히 알아 오라고 지시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서이교는 당채영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잘 알기 때문에, 그녀의 상심 또한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당채영은 정현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말을 붙이려 했는데.
“괜…… 찮으십니까, 아가씨? 아무래도 저자가 소가주께서 말씀하셨던 뒷배인 듯하니, 곧바로 조사를 할…….”
“이교야.”
“네, 아가씨.”
당채영은 서이교의 말허리를 툭 잘랐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서이교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런데.
“나 아무래도 운명의 짝을 찾은 거 같아.”
“……?!”
생각지도 못한 말. 서이교는 고개를 다시 번쩍 들어야만 했다.
시선을 올려 보니 당채영의 눈동자는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실웃음과 함께.
“그래. 남자 얼굴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사실 그녀는 ‘얼빠’였다.
* * *
흑신풍사는 초원을 떠난 이후로 지금처럼 느긋한 적이 없었다.
비록 자유와 재산이 죄다 마귀 같은 놈(?)에게 붙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라지만.
그리고 이따금 그 마귀 같은 놈에게 불려 가서 갈굼을 받는 서러운 처지라지만, 그래도 밑에 들어온 십만이나 되는 인원들의 면면을 볼 때면 속에 쌓인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한 지역에서 떵떵거리는 왕들도 이만한 인력을 쉽게 부리지는 못할 테니.
게다가 요즘은 웬일인지 백발 마귀가 부르는 빈도도 많이 줄어들어 속이 편해지던 차였는데.
백발 마귀는 여태 밀렸던 체불금을 한꺼번에 받으려는 사채업자처럼, 말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다시 그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일어나.”
“헉헉!”
“앉어.”
“으윽! 제, 제발……!”
“다시 일어나.”
“어어억!”
“앉아.”
“흐윽! 왜, 왜 이러시는지 말씀을 해 주시면……!”
흑신풍사는 다시 내공이 폐쇄된 늙은 몸으로 이리저리 구르려니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걱정하던 광풍사 녀석들도 지금은 괜히 휘말릴까 싶어 못 본 척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렇게 구르는 이유라도 알아야 어떻게 납득을 하든지, 아니면 정현을 설득이라도 하든지 할 텐데.
아무리 이유를 물어봐도 무심한 얼굴을 하며 ‘앉아’, ‘일어나’만 반복해 대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자신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무심해 보이는 저 얼굴 표정 아래 잠잠한 눈빛은 분명히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으니.
짜증.
뭔가 심기가 단단히 틀어질 만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헉, 허헉…….”
흑신풍사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렸다. 그야말로 거지꼴이 따로 없는 모습.
어느 누가 그런 그를 보고 흑건적의 두령이자, 십존 다음으로 손꼽힌다는 흑신풍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대로 정말 졸도라도 해야 끝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차.
“기련조옹에게 손자 녀석이 하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정현이 그제야 뒤틀린 속이 조금 풀렸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흑신풍사의 머릿속으로 지금쯤 설산채 놈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을 기련조옹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기련조오옹! 네놈이었구나아아!’
툭하면 자신의 지휘권에 대거리를 하던 녀석. 흑건적 내의 서열이 먼저 들어온 순서이지 않냐며, 이참에 서열 정리를 해 보자며 길길이 날뛰던 놈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서 저 백발 마귀의 속을 언짢게 한 것일까.
그런데 손자?
“그놈이 꽤 잘 생겼다지?”
“제, 제가 어찌 하, 하면 되겠습니까……?”
순간, 정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뭘 어쩌긴 어째? 너는 내가 설마 열 살도 되지 못한 한낱 꼬마 놈에게 손을 쓰려는, 그런 간악한 놈으로밖에 안 보이냐?”
‘그게 아니면 뭔데!’
“실망이야, 풍사. 그래도 우리가 그동안 함께한 세월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딴 세월 필요 없다고!’
“나를, 손녀딸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아이에게 질투하고 있는 그런 쪼잔한 노인네로 생각하고 말이야.”
‘그런 거였냐아아!’
흑신풍사는 그제야 정현이 왜 자신을 갈구는지 알 것 같았다.
기련조옹의 손자 녀석이 소진과 친해질 것 같으니 배알이 꼴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련조옹이나 손자 녀석에게 직접 손을 쓰기도 뭣하니, 대신에 만만한 자신에게 꼬장을 피워 댔던 것이다.
“응? 아무래도 더 굴러야겠어.”
‘젠자아앙!’
흑신풍사는 이 이상 더 구르면 자신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정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강호의 정의를 위해 뛰어다니시고, 백성들의 귀감이 되시는 검선께서 한낱 아이에게 해코지라니요! 저 같은 사악한 마두라면 모를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그렇지?”
흑신풍사는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정현을 보면서 속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서러우면 강자가 되는 수밖에. 주먹이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여간 뭐, 그렇다고. 알아 두기만 해.”
정현의 그런 무심한 말투에 흑신풍사는 관자놀이를 쥐어뜯어야만 했다.
‘젠장! 기련조옹, 이 새끼! 두고 보자!’
흑신풍사의 두 눈 위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