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44
44화. 봄소식은 그렇게 찾아온다 (15)
“이 길, 정말 맞는 거냐?”
정현은 여전히 심기가 언짢은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흑신풍사로서는 간담이 철렁일 수밖에 없었다. 무룡들 때문에 지펴진 불똥이 혹여 자신에게 튈 수도 있었으니.
그래서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다음번에 무룡들을 만나면 정말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겠노라고.
“그, 그렇습니다! 아까 전의 놈들 때문에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성도의 하오문 지부는 저잣거리를 지나야 있다고 합니다! 행원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니, 확실합니다!”
“하오문치고는 좀 이상한 놈들이로군.”
정현은 무룡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훨씬 더 많아진 인파 때문에 심기가 더 언짢아지고 있었다.
“저기…….”
그러다 앞장서서 걷던 흑신풍사가 눈치를 보면서 슬쩍 입을 열었다.
“왜?”
“괜찮으시겠습니까요?”
“뭐가?”
“어쩌면 이번 일로 만독문은 물론, 패왕성이 움직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창천상단의 일부터 이것까지, 만독문은 아마 자신의 앞마당에서 소란을 일으킨 정현을 가만히 두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패왕성도 마찬가지. 신조패왕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황보진광이 이번에 얻은 수치를 어떻게든 되갚으려 들 게 분명했다.
“앞으로 검선께서는 물론, 사문이신 무당파에서도 꽤나 골치를…….”
정현이 얼마나 강호와 엮이는 걸 귀찮아하는지 잘 아는 흑신풍사였기에,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자칫 자신과 흑건적이 거기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응? 그걸 내가 왜 신경 써?”
정현이 무슨 소리냐며 반문했다.
순간, 흑신풍사는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
“지금 내 소속은 흑건적이잖아? 그럼 흑건적이 신경 써야지.”
“……!”
이건 대놓고 흑건적을 방패로 내세우겠다는 말이 아닌가!
흑신풍사는 목 언저리까지 치밀어 오른 욕지거리를 꾹 눌러 담아야 했다.
어쩌면 이대로 있다가 고래 싸움에 등 터지기 전에 먼저 화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아악! 이 빌어먹을 놈이 또!’
흑신풍사가 뻐근해지는 뒷골을 잡으려 들 때.
“그리고.”
정현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오고 싶으면 오라 그래. 내가 언제 오지 말라고 하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흑신풍사는 허탈하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검재.
검을 쥐기만 하면 재앙을 일으킨다는 별호를 괜히 얻었겠는가.
기실 정현이 여태 정체를 숨기려던 것도 귀찮은 일에 얽히는 게 싫어서일 뿐. 원래 성격 같았으면 무룡들은 지금쯤 제 발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황보진광은 운이 아주 좋은 것이었지만.
‘그놈이 그걸 알 턱이 없지.’
한평생 좁은 우물의 하늘만이 진짜 하늘이라 여기고 살아온 놈이 그만큼 생각이 있을 리가.
흑신풍사는 자꾸만 근심이 쌓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사이.
두 사람은 하오문의 성도 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와! 이, 이거 뭐예요? 되게 맛있어요!”
소진은 꽃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물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시작된 저잣거리 구경은 역시나 군것질이 주였다.
영화는 소진의 토실토실한 뺨에 붙은 참깨를 소맷자락으로 훔쳐 주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먹는 것 하나하나, 보는 것 하나하나, 사소한 것들에 일일이 감동받는 아이만큼 귀여운 게 어디 있을까.
“그렇게 맛있니?”
“네! 이거 진짜 뭘로 만드는 거지? 궁에서도 본 적이 없던 건데!”
매번 성화궁의 성녀를 위해 좋은 재료만을 엄선해 최고급 요리를 만들었던 새외 최고 숙수(요리사)들이 길거리 노점상들보다 못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소진은 그만큼 즐거웠다. 그녀는 요 며칠간 계속 이어지는 저잣거리 구경에 흠뻑 빠져 있는 상태였다.
정현은 사람이 많은 게 싫다며 투덜거렸지만, 소진에게는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은 이곳 저잣거리가 초대 천마께서 계신다는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뒤에서 따라붙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늘은 연회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첫날이라 그런지, 이전보다 볼거리나 먹을거리가 훨씬 넘쳐나 도저히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앞으로 닷새 정도는 더 연회가 이어질 거라고 하였으니. 그들은 앞으로 있을 닷새는 또 얼마나 즐거울지 벌써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반면에 녀석들에게 같이 따라붙은 어른들은 그들을 통제하느라 도저히 정신이 없었지만.
‘아니, 왜……!’
‘우리까지 이래야 하냐고!’
영천과 영산은 무공을 익힌 자신들보다도 훨씬 더 체력이 좋은 아이들 때문에 정말이지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제는 지긋지긋한 정현과 작별이라며 즐거워했었건만.
하필이면 장원을 나서던 시점에 소진에게 딱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 딴에는 몰래 빠져나온답시고 움직였지만, 소진이 성녀로 살아오면서 꼭두새벽부터 얼마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지 모른 데서 생긴 패착이었다.
결국 곤륜파 사람들이 만독문으로 간다는 소식은 장원 내에 일파만파 퍼지고 말았고, 소진을 비롯한 아이들도 같이 나가자며 금세 따라붙고 말았다.
굳이 가는 길이 같은데 따로 움직일 명분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길거리는 많은 인파들로 정신이 없는 상황. 여기에 오십 명도 넘는 아이들도 같이 몰려다니니 혹시 한 명이라도 놓칠까 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뒤쪽에서 따라오는 마두들 때문에 이목까지 집중되는 판국이니. 어쩐지 성도 내에서 조용히 다니기엔 그른 것 같았다. 영도와 신명자는 언제부턴가 말도 없었고.
하지만 그런 두 사람과 다르게, 소진과 영화의 얼굴에는 여전히 즐거움이 가득했다.
“밀가루나 옥수수 전분 같은 걸 고기 기름에 튀겨서 사탕 가루(설탕)로 맛을 내…… 아니다. 언니가 이따 오늘 밤에 해 줄게.”
“우와! 정말요?”
“그럼.”
“와! 그럼 저도 옆에서 도울래요!”
“그래 줄래?”
“네!”
소진은 이 맛있는 걸 저녁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금세 행복해지고 말았다.
“히히, 맛있겠다. 그치?”
쭈뼛!
“으, 응? 응!”
방실방실 웃는 소진의 눈웃음을 얼결에 마주한 한현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여아 앞에서 여전히 숙맥인 아이는 식은땀을 한참 동안 삐질삐질 흘려 대고 있었다.
그리고.
‘으, 으아아…… 현호야, 안 된다! 그 아이는! 그 아이만큼은!’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의 첫사랑을 쉽게 엎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기련조옹은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멀리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어야만 했다.
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정현에게 일러다 바치고 있을 게 분명한 흑신풍사 놈이 이 자리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 *
해가 중천에 뜬 점심시간.
소진 일행은 ‘화요객잔’이란 곳을 방문했다.
도심개가 따로 손을 써 둔 덕분인지, 한창 손님들로 북적일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삼 층에 있는 가장 넓은 자리로 배치받을 수 있었다.
“이거요!”
“전 이거 먹고 싶어요!”
아이들은 한데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차림표에 적힌 것들을 이리저리 찔러 댔다.
글씨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맛있겠다 싶어 보이는 이름은 죄다 불러 대는 통에, 점소이는 도저히 뭘 적어야 할지 몰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딱 보기에도 ‘나 위험하오’라고 써 붙인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의 마두들이 일제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으니.
‘히이익! 사, 살려 줘!’
영화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는 점소이의 생각을 만통심안으로 어렴풋하게 읽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 여기에 있는 것까지 골고루 주시겠어요?”
영화가 가리킨 것들은 죄다 이 객잔에서 가장 비싼 음식들. 점소이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일행들의 허름한 복색을 살핀 것이다.
“하지만 그러시기엔 너무…….”
철그럭!
영화는 꽤나 묵직한 소리를 내는 주머니를 식탁에 던졌다.
“이 정도면 되나요?”
“추, 충분하고 말굽쇼! 잠시만 기다리십셔! 금방 내어 오겠습니다!”
점소이는 화색을 띠고 부리나케 일 층에 있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영도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그 돈은 다 무엇이냐?”
“장원을 나설 때, 도 대행수께서 주셨어요.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게 있으면 아끼지 말고 쓰라고요.”
“도 대행수에게는 매번 빚만 지는 것 같군.”
영도가 쓴웃음을 짓던 그때.
신명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이것만 먹고, 우리는 여기서 이들과 헤어지도록 한다.”
“…….”
순간, 영도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영화는 그런 영도를 슬쩍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천과 영산은 근 며칠째 사숙과 대사형 간에 흐르는 불편한 침묵 때문에 속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장원에서 신명자가 영도에게 한소리를 한 이후, 곤륜파의 문도들은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하산한 이후로 그렇게 웃음이 많았던 영도가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그들이 어떻게든 나서서 냉각된 분위기를 풀어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앓느니 죽지. 으휴.’
영화는 여기에 계속 얽매였다간 정말 복장이 뒤집힐 것 같아, 사형제들에게서 소진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갑갑하기만 한 저쪽과는 다르게, 이쪽은 보는 것만으로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처럼 속이 개운해졌으니.
‘아. 정말이지 치유되는 기분이야.’
최근 들어 영화에게 새로 생긴 취미가 있다면, 그건 바로 소진과 한현호 관찰이었다.
“오늘 꽃빵 엄청 맛있었어. 또 빨리 먹고 싶다. 헤헤.”
“마, 맞아!”
“현호도 맛있었어?”
“마, 맛있었어!”
“정말?”
“저, 정말!”
한현호는 처음에 소진이 말을 붙이면 별달리 대답도 못 하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그래도 맞장구를 치는 정도까지 발전한 상태였다. 잔뜩 얼어붙어 있는 건 여전했지만.
소진은 그동안 너무 섣부르게 접근하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란 정현의 충고대로, 굳이 억지로 한현호와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고, 밥을 먹을 때면 옆에 나란히 앉아서 먹는 게 전부였다. 억지로 같은 무리에 섞여서 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겉도는 느낌이 들더라도, 조금씩 다가간다는 생각으로 얼굴을 자주 마주치려고 했던 게 전부였는데.
그러다 보니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이제는 짧은 인사가 몇 마디 대화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한현호도 이제 낯을 덜 가리게 되었는지 소진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히히! 역시 할아버지 말이 맞았어.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해!’
소진은 역시 정현에게 고민 상담을 해 보기를 잘했다면서 방긋 웃었다. 정현이 알았더라면 그게 아니라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테지만.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 친해지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영화로서는.
‘아…… 마음이, 마음이 정화된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꽃이 헤실헤실 피어나고 말았다.
친구를 잔뜩 사귀고 싶어 하는 소진과, 그런 소진에게 좋아하는 마음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부끄러워서 쭈뼛대는 한현호.
두 아이들의 귀여운 태도가 모성애를 자꾸만 자극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귀여워 죽겠는데, 내 아이면 얼마나 귀여울까? 아아, 진짜 괜찮은 사람 나타나면 일찍 결혼해야 하나. 근데 그랬다간 사부님이 우실 것 같고. 아, 그 전에 임자부터 만나는 게 우선이려나…….’
영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뭐야, 이거? 거지새끼들만 잔뜩 모아 놨나, 여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선가 들린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아이들의 대화가 거짓말처럼 뚝 하고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