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서릿발이 내릴 땐 걸음을 멈춰야 한다 (15)
찌르르―
“……사백조님! 악!”
청율은 튕기듯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다 말고,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목숨을 걸고 적들의 포위망을 억지로 뚫고 나와 도착한 흑건적의 본거지. 진무대제의 보살핌으로 겨우 만나게 된 정현. 그는 마지막 있는 힘을 억지로 쥐어짜 정현에게 사문의 위험을 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중상을 입었던 데다가, 어떻게든 정현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억지로 기력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성공했구나.’
하지만 이렇게 눈을 뜨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포기했던 삶이 다시 선물처럼 되돌아왔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이 더할 수 없이 기뻤고, 자칫 정현에게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할아버지는 먼저 가셨어요.”
맞은편에 웬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포근하게 웃으면서 쓸려 내려온 이불을 다시 올려 주고 있었다.
“할아, 버지라면……?”
“무당파의 현 자 배분에 정 자 함자를 쓰고 계세요.”
“아!”
청율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현 사백조께서 강호로 돌아온 이후, 항상 옆에 애지중지하며 데리고 다니는 여아가 있다더니. 바로 그 아이인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전 손소진이에요. 일곱 살이구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소진은 양손을 배꼽에다 모으고 꾸벅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정말 그 나이대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의젓한 말투.
그 모습을 보면서.
청율은 어쩐지 모르게 조금이나마 가슴 속에 남아 있던 걱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진아야!”
영화는 소진이 마차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그녀를 찾다가 청율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되도록 청율을 소진에게 들키지 말라던 정현의 부탁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것을 만약 정현이 안다면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도저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영화의 걱정을 짐작한 듯, 소진이 배시시 웃으면서 걱정 말라는 투로 말했다.
“헤헤. 할아버지한테는 진아가 여기 왔다는 거 비밀로 해 주세요.”
“……너. 하아!”
영화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꾹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따금 저렇게 소진이 어른스럽게 나올 때면, 자신도 기대고 싶을 정도로 너무 의젓했으니까.
어쩌면 소진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정현이, 오히려 더 소진을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위험하니까 다음부터는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고.”
“네!”
소진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영화의 옆으로 가 손을 덥석 잡았다. 영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소진은 마주 웃으며 영화에게 더더욱 안겼다. 그녀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현이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도.
아마 무당파에 생긴 변고를, 하늘산에서 겪었던 일과 겹쳐 보며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겠지.
사실 소진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흑건적 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당채영이 수시로 한곳에 들락날락하고, 어른들의 표정엔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가득했다. 더구나 오늘 아침에는 혁요산과 광풍사가 무슨 서찰을 받고, 허겁지겁 말과 병장기를 챙기며 떠나지 않았던가.
적당히 친구들을 툭툭 찔러 보면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야 아주 쉬웠다.
그래서 소진은 내심 정현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진아는 이제 괜찮은데.’
예전이라면 모를까, 소진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니까.
이제 자신의 주변에는 정현을 비롯해, 영화와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는데. 새로운 가족과 친구들이 이렇게나 잔뜩 있는데, 외로울 리가 없었다.
“헤헤헤!”
“아기도 아니고, 우리 진아가 오늘따라 더 왜 이럴까.”
“히히. 너무 좋아서요.”
* * *
그 시각.
두두두!
“대장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뭣들 하느냐, 서두르지 않고! 이럇, 이럇!”
혁요산의 명령에 따라, 광풍사가 일제히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평원을 달리고 있었다.
그 숫자만 무려 삼천여 명.
그만한 기마 군단이 지나가는데 아무런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뿌려 대고 있었으니.
실제로 그들이 지나치는 곳마다 있던 마을의 사람들은 혹시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나 싶어 몸을 크게 떨어야만 했다.
중원에 들어온 이후, 절대 양민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짓은 하지 말라던 정현의 분부가 있었다지만.
지금 그들은 도저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단 열흘 안에 호북에 도착하고, 패왕성의 병력들을 분쇄하여 뿔뿔이 흩어진 무당파의 문도들을 모으려면 한시라도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이번 일이 더 이상 ‘도적’이라는 탈을 쓰지 않고, 광풍사라는 이름을 중원에서 당당히 새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두근!
두근!
열심히 대지를 두들기는 철갑마(鐵甲馬)의 말굽 소리만큼이나, 그들의 가슴도 거칠게 뛰고 있었다.
* * *
대붕홍염익(大鵬紅焰翼), 구만 리를 뒤덮는다는 붕새의 날개는 항시 붉은 불꽃에 휘감겨 있으니.
신조패왕이 일격을 날릴 때마다 일어나는 거친 돌풍과 불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들 정도였다.
돌풍은 닿는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불꽃은 그렇게 찢겨 나간 것들을 재도 남기지 않고 송두리째 불사른다.
광룡이 마구잡이로 뿌려 대던 백뢰는 그렇게 부서졌다.
신조패왕을 집어삼키려 몸을 이리저리 뒤틀 때마다, 대붕의 돌풍이 벽을 형성하면서 이를 가로막고, 엄청난 열기를 머금은 불꽃이 안쪽에서부터 터지면서 광룡의 몸 곳곳에다 구멍을 냈던 것이다.
그야말로 패왕(霸王).
단지 기세만으로 세상을 산을 뽑고 세상을 뒤덮는다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현이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강한 것은 결국 부드러움을 이겨 낼 수 없음이니.
정현은 여태껏 선보이던 것과 다르게, 무당파가 추구하는 상선약수에 어울리는 검술을 선보이면서 신조패왕의 공세를 계속 옆으로 흘려 내고 있었다.
파직, 파지지직!
그러면서도 이따금 송문고검의 끝자락에 맺힌 백뢰가 한껏 터져 나오면서 대지를 내리꽂는 백색 기둥을 만들어 냈으니.
콰르르릉―
이때 백뢰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대붕의 불꽃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라, 신조패왕도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야말로 대화 한번 이뤄지지 않은 채, 오로지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부딪치는 전투였다.
콰콰쾅, 콰쾅!
쿠르르―
신조패왕은 교차시킨 양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뒤로 크게 밀려났다.
이번 백뢰는 대체 얼마나 많은 공력을 집약시킨 건지, 여태껏 웬만한 백뢰에도 별다른 상처가 없던 그의 팔이 새카맣게 그을리다 못해 안쪽의 뼈까지 훤히 내보일 정도로 찢겨 있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자칫 두 번 다시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중상.
하지만.
화르륵!
갑주처럼 신조패왕을 두르고 있던 붉은 불길이 양팔의 상처 쪽으로 스며든다 싶더니,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무는 게 아닌가.
심지어 양팔을 내리며 드러난 얼굴은 이전보다 더 흉흉한 기세를 띠고 있기까지 했다. 잠시 흐트러졌던 숨소리도 평온해진 상태였다.
“귀찮게도 구는군.”
정현은 그런 신조패왕을 보면서 ‘쯧!’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이지 짜증 나는 기술이었다.
신조 가루라는 그 생애가 다하게 되면 불꽃에다 몸을 던져 재가 되었다가, 다시 그 안에서 부활을 이룬다던가.
신조패왕을 상징하는 불길, 가루라염(迦樓羅炎)은 바로 여기서 착안한 독문절학이었다.
그의 불길은 적을 불사르되, 반대로 스스로에게는 재생과 치유를 이끌어 낸다. 상처를 낫게 하고,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물론, 내공이 있는 한 무한하게 이뤄지는 건 아니지만.
‘저 새끼가 천하제일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게 문제지.’
정현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오늘날 패왕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황보세가는 원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세가였기에 상당한 양의 영약을 보유 중이었고.
신조패왕은 패왕성을 세우면서 통합한 수채(水寨)들의 막대한 재산들을 처분해 다시 더 많은 영약을 끌어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신조패왕은 소림사의 방장이나 철혈나한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내공을 보유할 수 있었으니.
전부 자신의 무기인 가루라염을 더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듣기로는 그 뒤로도, 중원의 여러 물줄기를 움켜쥐면서 쌓아 올린 재산을 바탕으로 여전히 영약을 쓸어 담는 중이라고 했다.
실제로 정현은 녀석과 부딪칠 때마다 송문고검이 크게 떨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미 내공의 양에 있어서는 자신을 한참 상회한다는 뜻.
그가 지닌 내공도 송문고검을 통해 터득해 비정상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니, 그마저도 넘어서 ‘회’의 웬만한 마왕들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백 년을 살다시피 한 마왕들도 말이다.
더구나 녀석은 내공만 쌓았던 게 아니라, 그동안 무학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느새 화경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는 듯했으니.
그래서 정현은 당장이라도 신조패왕의 면상을 찢어 버리고플 만큼 화가 나면서도, 최대한 침착하게 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대붕의 날개를 자르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일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한편.
‘역시 삼십 년 전보다 더 강해졌어. 괴물 같은 놈.’
신조패왕도 침착함을 유지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끼던 막내아들을 죽인 철천지원수이지만, 그래서 그를 마주친 순간 두 눈이 뒤집힌 채로 달려들었던 것이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가루라염이라는 절기를 만들게 된 계기가 정현 때문이었으니.
콰득!
신조패왕은 다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팔뚝을 따라 핏대가 잔뜩 올라오면서 그 위로 다시 가루라염이 높게 치솟았다.
“정현.”
“뭐?”
“너는 오늘 죽는다. 내 손에.”
피식―
정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곧 송문고검의 칼자루를 다시 움켜쥐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친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찬윤.”
지이이잉!
송문고검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때 두들겨 패는 정도로 끝내는 게 아니라 목을 잘라야만 했어.”
정현의 말에 신조패왕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삼십여 년 전, 정현이 자취를 감추기 직전에 벌였던 사건이 떠올랐던 것이다. 남들은 맹내쟁란이라 부르는, 신조패왕에게는 수치와도 같았던 사건.
“감히, 내가 할 소리를……! 네놈의 목이야말로 진광의 영전에 바쳐질 것이다!”
화르륵!
신조패왕을 따라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영전?”
정현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투로 고개를 외로 꼬았다.
“모른 척하지 마라! 감히 내 아들을 그딴 꼴로 만들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았더냐!”
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녀석이 분노하는 이유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