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95
95화. 서릿발이 내릴 땐 걸음을 멈춰야 한다 (26)
덜그럭!
대련이 끝나고 난 뒤, 점심시간.
청독은 배식을 받다 말고 실수로 들고 있던 식판을 그만 바닥에다 엎지르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도사님?”
뜨거운 국에 혹시 화상이라도 입은 게 아닌가 싶어, 재빨리 백유진이 달려와 그를 살폈다.
다행히 엎질러진 국에 데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청독은 어딘지 모르게 눈동자에 초점이 잡혀 있질 않았다.
“도사님?”
“예…… 예? 아, 괘, 괜찮습니다. 하, 하하.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백유진이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레 그를 다시 부르자, 청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실수를 해서 미안하다며 다시 식판을 가지러 되돌아가는데…… 어쩐지 그 뒷모습이 힘없이 축 처져 보였다.
처음 백가장에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복수심에 활활 불태우던 의욕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
백유진은 그런 청독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 * *
“자네가 끓여 주는 홍차는 언제나 향긋하단 말이지.”
정현은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면서 엷게 미소를 띠었다. 영검단과 한창 함께하던 시절에 즐겨 마시던 이 차가 그동안 얼마나 그립던지. 간만에 즐기게 되니 산뜻하고 아주 좋았다.
백유진은 그런 정현의 옆에서 집사처럼 서서 덩달아 살짝 미소를 띠었다. 다른 이들의 백 마디보다, 정현의 이런 칭찬이 그녀에게는 훨씬 값졌으니까.
“그보다.”
그러다 정현이 자신을 보면서 피식 웃자, 다시 원 자세로 되돌아왔다.
“할 말이 있는 눈친데? 뭐야?”
백유진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정현의 눈치를 피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산의 제자들을 계속 저리 두실 생각이십니까?”
“오. 그새 무당파에 애정이라도 생긴 거냐?”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정하라고 하신다면, 정정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음, 저놈들 언제까지 저렇게 폐인으로 만들 거냐, 이 말이지?”
정현이 가볍게 손사래를 치고는 이 층 노대(露臺, 테라스) 아래에서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다니는 제자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백유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아니, 저희로서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뭔데?”
“영검령이 발동되고, 상당수의 형제들이 지난 며칠간 소집되었습니다. 해서 곧장 가장 근거리에 있는 패왕성의 다른 부대들부터 치실 거라 생각하였는데……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아직 소집령에 응한 단원이 전부 모이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 장원 내에 있는 전력은 절대 약한 것이 아니었다.
흑신풍사와 광풍사가 있고, 상당수의 영검단원이 모여 있었다. 이들만 해도 웬만한 부대들은 손쉽게 격파할 수 있는 수준이니, 정현이 곧장 움직여도 절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 며칠 동안 정현은 백가장에 웅크리고 있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잠적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오문에서 비밀리에 전달하는 소식을 통해 외부의 변화는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속전속결(速戰速決)과 일진광풍(一陣狂風).
백유진이 여태 알고 있던 정현은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전력이 다 갖춰지지 않아도, 우선 빠르게 움직여 적들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는 맹장(猛將)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모습만 보이며 오히려 무당파 제자들의 의욕만 꺾고 있으니.
정현의 결정에 어떤 반문도 하지 않는 백유진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정확한 속내를 알고 싶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나부터 놈들을 족치러 가고 싶지. 하지만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때라고 하시면…… 일어나기 좋은 기회를 노리시는 겁니까?”
“아니. 저 멍청한 놈들이 정신을 차릴 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잘 못 했습니다.”
“유진아.”
백유진은 정현의 입가에 맺힌 씁쓸한 미소를 보고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는 늙었다. 구시대의 산물, 그 자체란 말이지.”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마라. 내가 겉보기에는 아무리 어려진 것 같아도, 안에 든 내용물까지 바뀐 건 아니니까. 하지만 저 아이들은 다르잖아? 앞으로도 계속 강호에서 살아갈 놈들이고, 무당파를 이끌어 가야만 해.”
정현은 다시 차에 입을 가져가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복수를 내가 전부 주도해 버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백유진은 정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이야 편하겠지. 빠르고. 하지만 저 녀석들은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자신들의 손으로 이룬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보호만 받다가,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고 말겠지. 다른 더 큰 난관이 닥쳐 왔을 때, 그걸 헤쳐 나갈 힘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탁!
정현은 찻잔을 탁상에다 내려놓았다.
“나는 그걸 깨워 줄 거다. 그러니 패왕성을 무너뜨리는 건 내가 아니야. 저놈들 몫이지.”
백유진은 어쩐지 정현의 그 말에 새삼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이 빠져 갖고는. 빠릿빠릿하게 안 일어나? 여기 있다가 북적(北狄) 놈들이랑 같이 손잡고 마유주라도 처마실 일 있어?
처음 영검단이 만들어질 당시.
북풍이 한창 휘몰아치던 곳에서, 아직 민간인의 때를 씻지 못하고 고생하던 그들에게 정현이 보였던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그때에도 정현은 평상시 성격이나 말투와 다르게 그들에게 어떻게든 기회를 주려 했다.
그런 걸 일대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하시려는 모양이었다. 다만, 저렇게 기를 꺾어 놔서야 어떻게 패왕성을 무너뜨리게 만든다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리고.”
그러다 정현이 툭 던진 말에 백유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를 바라보았다.
정현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너희들의 몫이기도 하고.”
“……무슨 말씀을?”
“이제 너희도 슬슬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가 됐잖아?”
“……!”
백유진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히 자극은 되었겠지. 전부 한자리에 모이라고 해.”
* * *
정현의 소집령에 일대 제자들은 연무장에 빠르게 집결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 바빴다.
‘사백조께서 갑자기 왜 부르신 걸까?’
‘뭐 아는 거라도 있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혼이라도 내시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오죽 못난 모습만 보였나.’
일대 제자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좋질 않았다.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들은 단 며칠 동안 지난 세월 동안 절치부심해서 단련한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제아무리 영도가 그 나이대에 찾아볼 수 없는 초절정 고수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검종본산의 고수들이라는 작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못 심각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정현의 성격에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을 테니…… 언제 혼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런데.
저벅.
저벅.
‘흡!’
‘저 사람들은……?’
‘무슨 기운이……? 역시 단순한 시비나 하인들은 아니었던 건가?’
일대 제자들은 그들 옆으로 다가온 사람들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백가장에서 머물면서 그들도 어느 정도 친해진 백가장의 사람들. 백유진과 하인들이었다.
그들이 대련에서 져서 축 처져 있을 때면, 언제나 밝게 웃으면서 격려를 하거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었는데.
오늘은 평상시와 다르게 생소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온통 칠흑색으로 칠해진 무복을 갖춰 입고 등에는 적당한 길이의 검을 매단 채였다.
모두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여기에 복면만 두른다면 누가 누군지 쉽게 알아보기가 힘들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일대 제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저들을 따라 감도는 특유의 기도였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도도 느껴지지 않는 범인(凡人)으로만 보였었는데, 지금은 전혀 달랐다.
아주 흐릿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북풍한설을 꾹꾹 눌러 담아 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강렬한 예기가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순간, 일대 제자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도를 닦기 위해서 검을 드는 무당파와는 완전히 상반된 느낌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나든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예기다. 오로지 온갖 전투 경험으로만 단련된 듯한…….’
‘살벌해도, 마공은 아니야.’
‘낭인? 용병? 아니야. 그들처럼 자유분방하지 않아. 오히려 절도나 기개가 강하게 잡혀 있어. 그렇다면 군문……?’
일대 제자들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아무리 주눅이 든 상태라 할지라도, 무인으로서의 감까지 전부 상실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해.’
백유진 등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 모두가 공통된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
‘저들에게서 도가의…… 그것도 본 문의 기질(氣質)이 느껴지는 거지?’
기질은 절대 바꿀 수 없는 뿌리와도 같은 것.
그 사람이 처음 익힌 내공심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뒤로 아무리 다양한 무공을 익히고 다양한 경험을 한다고 한들, 완전히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백유진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하는 무인들 전부가 무당파와 가까운 기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록 상선약수를 추구하는 무당파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건 마치.
‘마치 해일이나 격랑과도 같은……!’
같은 물이어도, 환경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이니.
‘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지?’
청승, 청란, 청독 등. 일대 제자들의 시선은 백유진 등에게로 단단히 고정되었다.
너희들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는 듯한 눈빛.
평상시 저들의 걸음걸이나 행동 등으로 보아,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을 거라 생각지는 못했으니까.
혹 정현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하지만 백유진 등은 일대 제자들의 시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보이던 살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얼음을 조각한 것처럼 무뚝뚝함만 남아 있었다.
“저희들에 대한 건 곧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때, 백유진이 마치 너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는 듯, 이쪽을 보며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청승이 무언가를 묻고 싶어 입을 열려는데.
“다 모였냐?”
정현이 대문을 가로지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흑신풍사와 광풍사의 살벌한 기세를 맞닥뜨린 순간, 일대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살기와 짙은 피 냄새가 그들을 이대로 질식시키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내를 지독하게 채웠으니까.
어디서 살벌한 전투라도 벌이고 온 걸까.
그러고 보니 무당파의 일대 제자들은 흑신풍사와 광풍사가 자신들을 구해 준 이후, 그동안 장원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돌아왔다는 뜻은…… 아마도 단 하나겠지.
그래서.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