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49)
제 1049화
250화. 지플과 킨젤로(3)
-[……실패한 나, 실패한 세계의 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헬루람.]
-너는 이미 느끼고 있어. 네가 느낀 그대로다.
검은 덩어리를 보고 있으니 헬루람을 찾아간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감당하기가 벅차 구토감이 치솟을 정도였다.
그때 오르갈은 헬루람에게 더 따질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미 절감한 까닭이었다. 헬루람이 보여준 심연 군단의 일원들은, 대부분 오르갈 자신이었다.
-[내가…… 내가 어찌 이렇게 많이 존재할 수 있지? 저 수많은 오르갈 레밀리아스는, 대체 어디서 살던 것이냐. 여기에 있는 나로부터 분화된 건가? 아니면 빌어먹을, 애초에 다른 세상이 있어? 그 속에 다른 오르갈들이 있고?]
-수많은 세상이 존재하지. 그 모든 세상에서 넌 매번 비슷한 삶을 살았어. 나의 연인이었고, 마수왕이자 킨젤로의 단장이었으며, 세계의 한 축이자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헬루람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머릿속이 오염되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연인으로서 세상의 가장 오래된 비밀을 엿들을 때에도 이런 충격은 없었다.
오르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헬루람을 올려보고 있었다. 입에선 줄줄 침이 흘렀고, 온몸은 곧 마비될 듯이 둔해졌다.
헬루람에 의하면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유사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수많은 세계가 존재했다.
-[나는…… 나는, 지금껏 세상에 변질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너나 솔더렛 같은 존재가 세상에 직접 개입하거나, 천 년 전의 지플이 거대한 역사를 조작하면 그런 변질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건 네가 알려준 내용이다, 헬루람.]
-그랬지. 네게 그 사실을 알려줄 때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만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사실은 변질이 아니라, 똑같은 세상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냐……?]
차라리 혼절하고 싶던 와중, 오르갈의 눈에 다른 이들이 보였다. 헬루람이 보여준 심연 군단은, 다행히 모두 다 또 다른 자신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것들은…… 저것들은 누구냐. 적어도 저것들은 내가 아니야……!]
-저들은 너처럼 실패한 자들이야. 작게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 자, 크게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 자. 다만 너는 모든 세상에서 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그 수가 압도적인 것이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 자.
오르갈은 그 표현에 집중했다. 그가 추구한 개인적인 구원, 태양신의 부활은 곧 세계의 구원으로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그 수많은 너를 병사로 만들었어, 오르갈. 심연 군단을 만든 거다.
그 대목에서 오르갈은 참지 못하고 검으로 헬루람을 찌르려 했으나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헬루람이 권능으로 그를 저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진이 빠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칼날을 내질렀다고 한들, 그녀는 다치지 않았을 터였다.
오르갈은 한동안 눈을 까뒤집고 욕지거릴 쏟아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추잡한 말로도 자신의 기분을 대변할 수 없었다.
-[이 썩고 저주받은…… 마녀, 미친년아! 이게 다른 세계의 오르갈들이 네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대가란 말이냐, 킨젤로의 대업을 이루지도 못하고, 죽어서도 네 노리개가 되는 것이?]
-이 수많은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나의 욕구가 아니라 너의 욕망이다. 너는 매번,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나는 그 간절한 염원을 이루어줬을 뿐.
-[그 나들이 이런 인형이 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나는 심연 군단을 만들 수 없었겠지.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너는 무엇이 되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그 말대로였다.
심연 군단 대부분이 ‘자신’이라는 걸 보자마자 느꼈듯이, 오르갈은 그들이 최후에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한 선택이니까.
인형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악을 쓴 건 그저 현실을 부정하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너 외에 다른 이들도, 모두 실패한 후 나를 직접 찾아온 이들이다.
-[하, 하하하! 크하하하하! 푸흐하하!]
웃음이 나왔다. 오르갈은 너무나 선명하게, 그리고 빠르게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걸 알았으나,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좋아! 좋아, 좋아. 그럼 정리를 해보자고, 헬루람. 말하자면 나는 너의 연인, 즉 계약자였다. 대체 몇 개인지도 모를 똑같은 세상에서, 언제나 오르갈 레밀리아스는 너의 계약자였어. 그런데 항상 실패했다, 무엇을? 내 입장에선 킨젤로의 부활이고, 네 입장에선, 뭐지? 넌 뭘 원하는 거냐, 대체? 내가 알기론 세상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인데. 그래서 우린 헤어졌고.]
-그래, 그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지.
-[그런데 저 수많은 오르갈과, 누군지 모를 소수의 머저리들이 네 노리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빛을 없애기 전에 세계가 먼저 사라진다면.
-[뭐?]
-혹은 무언가에 의해 나조차 사라지게 된다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상태가 된다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누가 널 없앨 수 있다는 말이냐. 솔더렛? 부활한 태양신?]
-솔더렛은 거의 모든 힘을 잃었고, 태양신은 그 어느 세계에서도 부활하지 못했다. 그리고 솔더렛의 힘이 없으면 그는 돌아올 수 없어. 너에게 여러 번 이야기해주었는데, 믿질 않았지.
-[그럼 누가…… 누가 널, 설마.]
지플.
순간 오르갈의 뇌리에 그 가문이 떠올랐다. 솔더렛이나 태양신 킨젤로조차 하지 못할 일을, 한낱 마법사들 따위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아니야. 그들이 마신석을 완성하고, 아무리 큰 힘을 얻어도…… 널 지울 수는 없잖아. 그렇지? 사람들이 영원히 널 잊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너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잖아!]
-병사들의 눈을 보아라, 오르갈.
오르갈은 주저하다가 한 병사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마지막 순간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말루기아! 끝까지 지플에 속박될 셈이냐, 깨어나라! 차라리 이 세상을 파괴해! 모든 세계가 지플에게 귀속되고 있단 말이다!
-시론! 정신 차려, 성수관을 베어야 한다! 네가 베지 못하면, 시론!
-안 돼, 베라딘, 멈춰!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이 겪은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을 헤집어댔다.
마신석이 완성된 세계 속, 지플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는 순간이었다. 시론은 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채 인세로 복귀했고, 베라딘은 창성 마법사로서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패배하고 있었다. 역사 조작의 펜대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전우들을 지웠고, 헬루람조차 그 힘에는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기억이 갱신되었다. 방금 사라진 시론이 기억 속에 나타났다가 다시 지워지기도 했고, 베라딘이 사실은 아군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플을 떠난 적이 없다는 기억이 생성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그 세계의 오르갈은 그 기억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가 겪은 것이고, 무엇이 조작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역사가 조작된 순간부터, 그 모든 건 바로 진실이 되었으니까.
-[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X!]
오르갈은 쓰러지며 미친 듯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다 겨우 고개를 들어 다른 병사들의 눈을 쳐다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비슷한 양상이었다.
지플은 세계를 장악하고, 자신은 그들에게 패배한다.
때로는 천 년 전 검마전쟁에서 테마르와 함께 최후의 결전을 치렀고, 때로는 유지를 원하는 태양신의 자아들이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 수많은 오르갈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 수많은 세계에서, 한 번도 못 이겼다고? 단 한 번도? 제발 아니라고 해줘, 제발! 그렇지! 다른 적이 있긴 있었, 크아악! 멸망? 세계 멸망? 이게 내 최선이라고? 심지어 나는,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 모든 걸 알고도 계속 졌어!?]
-너와 나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과연 이 세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걸, 누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을까?
지플.
그건 지플이었다. 애초에 세상이 여럿으로 나뉜 건, 그들이 역사 조작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였으니까.
-이것으로 이 세계의 싸움은 종료다, 오르갈 레밀리아스. 너와 네 동료들은 또 잊힐 것이다. 마녀도…… 그만큼 작아질 테지.
켈리악의 목소리였다.
몸에 힘이 남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주먹을 쥘 힘만 있었어도 오르갈은 지금 귀를 뜯어버렸을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나? 심연 군단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헬루람에게 ‘심연 군단’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것도 사실 오르갈 본인이었다.
자신은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그런 자신이 계속 모여서 언젠가 군단이 되면, 한 번은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오르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세계들에 분명히 존재했던 현실, 그 겹겹이 쌓인 절망과 상실감이 그를 짓밟아댔다.
-이 세계의 마신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그러나 지플은 이미 수많은 세계를 먹어 치웠다.
‘온전한 태양신 킨젤로’부터 시작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까지.
결국은 모두 세계 없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 태양신 킨젤로조차 창조를 행한 순간, 세상에 귀속된 셈이었다.
모든 게 지플의 뜻대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 태양신은 한 번도 부활하지 못한 것이다. 오르갈이 본 최후들에서, 지플은 태양신의 부활을 지독하게 견제했고, 매번 성공했다.
-오르갈. 과연, 세계가 얼마나 남아 있을 것 같나?
-[……얼마나 남았는데?]
-몰라서 네게 물어본 것이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직 여럿 남아 있든, 사실 이곳이 마지막 세계이든. 지플을 멈추지 못하면, 어차피 이 세계의 일원은 모두 종말을 맞이하겠지. 그러니 여긴 분명히 마지막 세계야. 희미하더라도 가능성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마지막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