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133)
제 1133화
259화. 세상의 진실, 너의 진실, 나의 진실(2)
선택.
일반적으로 신이 인간을 선택하는 건, 그와 계약을 맺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발레리아는 다른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솔더렛이 마신대에 대항하기 위해 고른 사람은 네가 아니라 테마르 룬칸델이었어.”
진은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자신을 고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아니라, ‘마신대에 대항한다’는 대목이 이상했다.
“마신대에 대항하기 위해 테마르를 골랐다면, 솔더렛은 천 년 전부터 다중세계의 존재를 알았던 건가?”
“아니, 그때는 그도 알지 못했어.”
“마신대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들과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잖아.”
그 말에 발레리아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맞아, 말이 안 되지. 나도 너를 만나면 우리가 했던 그 모든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나 정말 오래 고민했어. 하지만 그 수많은 역설을 온전히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지. 그래서, 네게 그냥 내 기억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기억을?”
“어차피 넌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하니 그게 나을 거야. 그 긴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래, 1초라도 빨리 힘을 얻어서 돌아가야 해. 남은 사람들을 구하러. 여기와 바깥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지?”
“아마도. 더 빠를 수도, 늦을 수도 있어. 하지만 똑같이 흐를지도 몰라.”
“모른다고? 이 유산은 너와 솔더렛이 함께 준비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진은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로 답했다.
밖에선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고, 사람들이 켈리악에게 짓밟혀 죽어가고 있었다. 그 수많은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고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모른다니,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존재들이 그것조차 모른다니. 속에서 무언가 치밀고 있었다.
발레리아가 길을 알려준 덕에, 시간을 멈춰준 덕에 죽지 않고 이곳으로 도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진은 근본적인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허탈하기도 했다. 발레리아의 말대로라면, 테마르나 자신은 미래를 유추할 수 있는 존재들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운명이 그들의 선택에 결정되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솔더렛과 발레리아의 설계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마신대와 싸우다 쓰러지고, 누군가는 갑자기 전 세계에 범람한 붉은 바다에 빠져 죽는다. 그게 지금 방금까지 진이 경험한 바깥이었다.
그렇기에 따지고 싶었다. 이보다 더 나은 설계는 없었냐고, 정말 이게 최선이었느냐고, 지금도 밖에선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 이어지고 있다고.
“나를 회귀시킨 것도 너와 솔더렛이 함께 정한 일이겠군. 내가 회귀하기 전에는…… 후, 그때는 세상이 이렇지 않았어. 이것보다 더 나았다고. 적어도 1808년까지는, 사람들은 세계가 멸망하는 걸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어. 설령 1808년에 마신대가 이곳을 침공한다고 해도, 그때까진 다들 살 수 있었어.”
솔더렛이 남긴 힘을 얻고, 켈리악에게 복수한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 후에는? 켈리악과 마신대만 끝장내면, 회귀 전엔 1808년까지 분명 생존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나? 이미 파괴된 세계가 그때처럼 돌아올 수 있나? 떨쳐낼 수 없는 의문이 진의 내면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 그랬지.”
등에 업힌 발레리아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은 발레리아가 어떤 눈빛인지 알 것 같았다. 참담한 표정일 것이다.
“솔더렛은…… 그와 네가 준비한 이 유산은.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킬 수 있어? 그들이 내 회귀로 인해 겪은 고통을 보상하고, 세계를 파괴되기 이전으로 복구할 수 있어……?”
발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불가능해.”
발레리아의 대답에 진은 또 한 번 속에서 화가 끓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건 솔더렛과 발레리아를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능을 향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염치없이 굴었군. 너흰 어떻게든 최악의 결말을 피하려고 나보다 더 노력했을 테지. 지플처럼 세상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싶어서 나 같은 놈을 회귀시켰을 리는 없으니.”
빈정거리는 게 아니었다. 끓어오르는 자괴감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솔더렛과 발레리아를 탓할 게 아니라, 더 잘 해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미안한 건 우리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네가 어서 솔더렛이 남긴 힘을 받아서 켈리악을 쓰러뜨리는 것이지. 계속 가면 문이 하나 나올 거야. 나 때문에 느리게 움직이는 게 괴롭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그 문을 열려면 그때까진 내가 생존해야 하거든.”
진의 마력을 흡수해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을 뿐, 발레리아는 사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처가 깊었다.
“최대한 네게 무리가 가지 않게 갈게.”
“아마 이 정도 속도면, 10분 정도 걸릴 거야. 난 그때까지 네게 넘길 기억을 빚고 있을게.”
“그래…….”
“진.”
발레리아가 두 팔로 진의 가슴께를 더 단단히 감싸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응.”
“미래는 알 수 없어. 무엇으로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없어. 결말은, 아무도 먼저 알 수 없어.”
발레리아도 바깥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진이 퍼뜨린 재생의 빛조차 모조리 꺼져버렸다는 사실을.
‘죽은 이들이 돌아오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진과 남은 사람들이 딛고 일어설 땅은 남기를…… 부디 그러기를.’
그녀는 진이 켈리악을 꺾으면, 부디 그보다는 더 나은 결말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솔더렛의 힘을 얻어도 긴장을 놓지 말고, 그를 이겨도 세상은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마. 만에 하나 지더라도 마찬가지야. 내가 조언하지 않아도 너는 분명 그럴 테지만 그래도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고맙다.”
우우웅……!
발레리아의 머리 위로 한 덩이 푸른 빛이 맺혔다. 진은 그 빛을 보며 묵묵히 어두운 길을 나아갔다.
문득 회귀 전에 발레리아와 지내던 시기가 떠올랐다.
스승과 제자로 인연이 시작되었으나, 언젠가부터는 밤이면 함께 누워서 잠에 들고는 했었다. 우리는 연인이다, 라고 누구도 말한 적은 없으나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연인으로 보았었다.
회귀 전을 기억하면,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아킨에서 급사하기 전까지, 진은 이제 삶에 고통보다 행복이 더 많이 남아있으리라 믿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죽기 전 너와 솔더렛이 사라진 것도 이 유산과 관련이 있겠군. 솔더렛은…… 나를 회귀시키느라 사라진 건가? 아니면 여기 내게 줄 힘을 보전하려다가 사라진 건가. 아니면 그 문 너머에 살아있나?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걸 알았다. 발레리아는 외부 자극을 아예 차단할 정도로 집중에 돌입하고 있었다.
“어차피 네 기억이 전달되면 다 알게 되겠지. 바깥은 어떨까, 제발 여기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으면 좋겠다. 내가 나갔을 때, 아무도 더 죽은 사람이 없으면 좋겠어. 그렇겠지?”
추르르륵-!
별안간 발레리아의 복부에서 흐른 핏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진은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며 그녀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숨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결국 죽을 것이다. 진은 그녀가 봉인 마법을 이용해 단지 죽음을 유예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네 말대로 미래는 알 수 없는 거지. 너도 살 수 있어, 발레리아. 오늘 또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 어차피 내가 힘을 얻으면 함께 나가게 될 테지. 그때 라니에게 가자.”
라니는, 살아있겠지?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바다처럼, 끔찍한 생각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그럴수록 진은 눈에 힘을 주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곧이다. 켈리악을 찢어발길 힘이 이 황량한 길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10분이 10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길이 거의 끝난 모양이었다. 마냥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환해지고 있었다.
“빛……?”
동굴 속에 난데없이 빛이 만개한 것처럼, 몇 걸음을 더 나아가니 갑자기 사방이 온통 환해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방금까지 가득 펼쳐져 있던 끝없는 어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 아공간 전체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나아가던 방향을 쳐다보니, 백여 걸음쯤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백색 문이 보였다. 빛을 뭉쳐 만든 광석이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만든 문인 것 같았다.
“발레리아, 다 온 것 같다.”
“나도 방금 끝났어, 진. 이제 문을 개방할게.”
발레리아가 손으로 허공을 휘젓자 두 사람의 앞에 푸른 창이 열렸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창 위에 익숙한 히스터의 암호체계가 적히고 있었다.
진은 그 암호를 읽을 수 있었다. 발레리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좀 진부하지. 내가 너라면 부담스러울 것 같네.”
덜컹-! 드그그그극……!
백색 문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 안은 또 어둠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자. 그리고 자, 여기.”
발레리아는 자신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푸른 구슬을 진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방금까지 마력으로 연성한 그간의 기억이었다.
“이걸 쥐고 있으면 내 기억이 네게 전해질…….”
발레리아가 거기까지 말한 찰나, 진은 황급히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쩌엉-!
“큭!”
갑자기 뒤에서 검기가 날아든 것이다. 방금까지 두 사람이 걸어온 방향이었다. 진은 충격에 중심이 무너졌고, 발레리아는 진의 등에서 떨어지며 핏물을 내뱉었다.
“진!”
발레리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진의 이름을 소리쳤다. 그녀는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확실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실린 지플이었다.
“실린 지플, 네가 어떻게……!”
“반군 수장 발레리아 히스터. 여유가 없기는 했나 보군. 차원 통로에서, 내가 널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야.”
실린 지플.
발레리아가 아는 한, 그녀는 진이 지금 상태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진, 어서 가!”
실린은 이미 진의 이마로 검을 뻗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내버려둘 리 없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