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134)
제 1134화
259화. 세상의 진실, 너의 진실, 나의 진실(3)
빠르다.
몸이 온전해도 가볍게 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실린은 지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며 정교한 검을 구사하고 있었다.
시이이잇!
진은 이마로 날아든 칼날을 가까스로 쳐내며 실린을 노려보았다. 후드와 하얀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오싹할 만큼 차가운 눈동자였다.
‘창성이다. 빌어먹을, 하필, 하필 지금……!’
창성 기사.
아니, 마검사였다. 진은 실린의 손아귀에 맺힌 청화를 의식하며 보법을 밟았다. 순혈 지플만이 익히는 비전기를 응용한 마법이 틀림없었다.
“최근에 마법을 하나 만들었거든. 차원 통로에서도 혈흔을 추적할 수 있는…… 그래서 널 그리 찢어놓고도 죽이지 않은 것이야.”
차원 통로에 흩어진 혈흔을 추적하는 것.
그건 마신대에서도 오로지 실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발레리아는 실린이 최근 개발한 그 능력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녀의 검에 당한 채 통로에 존재하는 또 다른 유산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발레리아는 하필 도중에 677차원의 시간을 잠시 멈추느라 남은 힘을 모두 사용했다. 그녀는 사실상 주검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유산을 찾았고, 때문에 입구를 연 순간 실린이 함께 들어선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발레리아는 그 전말을 단번에 유추하고 있었다.
대응할 수단이 없으니 무의미할 뿐, 이미 더 치명적일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괴로울 뿐.
“하지만 적이 이곳에 함께 들어선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다니, 발레리아 히스터. 너도 결국 한낱 인간이었어. 그간 그토록 대단한 능력을 보여줬지만 말이지…….”
진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발레리아 히스터라는 인간이 이토록 공포에 질린 기색을 드러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녀 또한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진이 계단을 만들어 라프라로사를 오를 때 느낀 감정처럼, 그 많은 희생과 고통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의미를 잃을까 두려운 것이다.
실린에겐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다. 두 사람과 달리 실린은 다치지도, 심지어 지치지도 않았다.
“발레리아!”
“가! 진, 너만 들어가면 돼!”
발레리아를 버리고 혼자 돌파해서 백색 문으로 간다.
괴로워도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었다. 진은 이미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를 버리고 문으로 가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린의 검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진이 움직일 때마다 쉴 새 없이 검기를 쏘았다.
한없이 몸이 무겁다.
지금 진이 검기를 쳐내며 버틸 수 있는 건, 오로지 그가 이룩한 창성이라는 경지 덕분이었다.
그러나 버티는 게 한계였다. 그마저도 길 수는 없고, 싸움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애초에 몸이 완벽할 때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커헉!”
“포기해라, 진 룬칸델.”
“닥쳐……!”
실린의 손아귀에서 뻗어진 날카로운 청화가 진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청화는 칼날처럼 뼈와 살을 파고들어 속에서부터 그의 육신을 지져댔다.
순식간에 온몸으로 화기가 퍼졌다. 평소라면 순식간에 털어낼 수 있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그를 도울 테스는 아까 켈리악에게 소멸을 맞이했다.
“카아악!”
진은 괴성을 내질렀다.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불에 타는 고통이 괴로워서가 아니다.
도저히 저자를 넘어 솔더렛의 힘을 취하러 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미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귀신이라도 들린 듯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극악한 말들이 악다문 이빨 사이로 쏟아졌다.
무릎이 꺾였다. 안 그래도 부족한 기력이 화염에 집어삼켜져 급격히 쇠했고, 쓰러진 발레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겁에 질려 떨리는 눈망울이, 피에 젖은 입술이, 억지로 움켜쥔 작은 주먹이, 그 절망이.
실린은 거칠게 발레리아의 머리채를 잡아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군. 그래, 발레리아 히스터. 걱정하지 마라, 넌 살려줄 것이다.”
“우릴 그냥, 보내줘. 아니. 우리가 아니라 진을 보내줘. 실린, 제발…….”
구걸, 발레리아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제발 진을 보내주라고 구걸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살면서 이보다 더 잔인하고 끔찍한 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진은 발레리아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더 크게 악을 썼다.
“실린…… 너도 사람이잖아, 너도 의지를 가진, 인간이잖아! 정말 켈리악 지플이 전 차원을 정복한 미래를 원해? 온 세상이 그의 욕망대로만 흘러가는 결말을 원해? 그 속에선 너조차도 너 자신을 잃을 수밖에 없어. 너조차도 결국 켈리악의 욕망을 너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게 될 수밖에 없어. 그런 세계가, 너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시끄럽구나. 손에 그건 무엇이냐?”
실린의 시선이 발레리아의 주먹에 닿았다.
진을 위해 빚은 기억.
발레리아는 본능적으로 푸른 구슬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감출 곳이 없었다.
“이, 이건.”
“내가 괜한 걸 물었다.”
실린은 움켜쥔 발레리아의 주먹을 간단히 풀어버렸다.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기억을 움켜쥐었지만, 실린의 완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 진이 만져보지도 못한 발레리아의 기억은, 결국 실린의 손 위에 먼저 놓이게 되었다.
“아, 이건…… 기억이로군?”
가면 속 실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푸른 구슬을 손에 넣자마자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기억의 파도를 마주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 정신이 몽롱해지는 감각이 일었으나, 심취하지는 않았다.
냉정하고 철저하게 분석해야 했다.
솔더렛과 발레리아 히스터, 그들이 진 룬칸델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지금 이 혹독한 순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만둬, 그만두라고!”
“진 룬칸델. 할 수 있는 걸 해라. 그렇게 악을 써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게 네 한계인가?”
“개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 것이다. 죽일 것이다. 찢어 죽여주마, 지금이 아니면 죽어서라도, 죽어서도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나는 너를 죽이고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말처럼 진은 기어가고 있었다.
몸은 그야말로 한계에 치달았고, 청화에 불타고 있다. 지금이라면 실린이 가볍게 쏘는 검기조차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참…… 감동이군.”
그러나 진은 구걸할 수 없었다. 발레리아에게 그만한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기어서라도 가야 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어도, 검만 놓지 않는다면. 검을 손에서 놓치지만 않는다면.
‘미래는 알 수 없어. 미래는…… 알 수 없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끝나지 않았어.’
검을 쥔 손아귀가 자꾸만 풀리려 했다. 초 단위로 의식이 끊겼다.
하지만 전부 생도 시절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죽음? 투쟁을 통해 죽음을 초월한 위대한 기사도 이미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파엘리토와 싸울 때 자신도 그래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된다.
론처럼, 죽더라도 일어나서 싸울 것이다.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청화에 온몸이 재가 되어도, 다시 일어나서 실린의 목에 검을 쑤실 것이다. 그리고 켈리악을 베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지켜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을, 비록 멀쩡한 곳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지켜낼 것이다. 그것만큼은 지킬 것이다.
진은 그런 일념 하나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매 순간 영겁을 압축한 듯 끝없는 번뇌가 밀려들어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래, 그런 거였나. 시간을, 되돌렸을 줄이야.”
실린은 머리로는 흘러들어오는 기억을 분석했고, 눈으로는 악착같이 자신에게 기어 오는 진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진을 죽이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의 몸에 심은 청화를 더 키울 수도 있고,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그 사지를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린은 가만히 기다렸다. 발레리아의 기억이 더 흘러들어오기를, 진이, 그의 투쟁이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무얼 하고 있나, 실린 지플. 승리를…… 음미하고 있나? 이긴 것 같나? 나를 베어라, 베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 거짓말 같나,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나. 내가 보여주마, 그게 무엇인지 내가 알려주마. 그러니까 발레리아, 그만 울어. 울지마. 빌지도 마. 우린 아직 안 졌어. 미래는 모른다고, 네가 말했어. 아직 결말은 나지 않았어.”
실린은 여전히 구슬을 쥔 채 진을 응시했다. 이제 그녀와 진 사이의 거리는 겨우 두 걸음이었다. 검을 내밀 수만 있다면, 찌를 수도 있는 거리다.
“허억, 허억, 헉, 커헉……!”
핏덩이가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이 막혔다.
결국 눈꺼풀이 닫혔다. 부릅뜨려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은 눈을 감은 채로도 앞으로 나아갔다.
실린을 찌르기 위해, 사람들에게 닿기 위해.
일어섰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지, 기고 있는지, 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발레리아와 실린은 그가 두 다리로 우뚝 일어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억, 컥, 크흐흡, 카아아악!”
푹……!
칼날이 실린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심장이었다. 진은 실린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고는 안기듯이 그녀에게 쓰러졌다.
실린은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은 채로 진의 그 느리고 투박한 동작을 모두 지켜보았고, 진이 자신의 품에 쓰러진 후에도 그가 기어 온 열 걸음 남짓한 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흐하하하하……!
그리곤 기뻐서 미치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심장이 바리사다에 관통된 채로 계속 폭소를 터뜨리다가, 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이것이 룬칸델이로구나.”
진은 남은 힘을 쥐어짜내 칼날을 돌렸다.
실린을 찔렀기 때문일까, 눈이 떠졌다. 목을 막은 핏덩이도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엇이, 그리, 재밌나. 실린 지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너를 죽인다고.”
“그야…… 마침내 지플이 끝장날 순간이 왔으니, 웃지 않을 수 없구나. 드디어, 말이다.”
“뭐라고……?”
이내 실린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녀는, 진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사 룬칸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