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17)
제 111화
37화. 세상을 지우는 힘, 세상을 지탱하는 힘(2)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옥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맨살이 불타는 일은, 차마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인 것이다. 특히 라오사처럼 단련되지 않은 인간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마음의 지옥보다 몸의 지옥이 낫다. 라오사는 고통받는 동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이제야 신녀로서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해낸다는 마음이었다.
‘진 공자의 말대로, 이 몸이 재가 되더라도 동족들에게 당도할 것이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으나 저들을 구하기로 한 진.
그리고 진의 희생에 초월적인 의지로 화답한 라오사.
그들의 절박한 태도가 시리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진! 조금만 더 버텨, 라오사 신녀가 직접 가고 있다! 네 뒤로 떨어지는 파편은 내가 책임질 테니, 앞만 보고 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
희미해진 브라다만테의 오러가 다시금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뒤를 책임지겠다’는 시리스의 말을 믿고,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쥐어짜 낸 것이다.
진과 시리스, 그리고 라오사.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마력과 오러의 파편 속에서, 그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야의 마법사들은, 그런 세 사람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래 봐야 애송이들인 데다, 비궁주는 함포를 막느라 여력이 없으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함포의 위력을 더 올려라! 오늘 이 땅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져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
치이이잉……!
지난 백여 년 동안 수많은 국가를 멸망시킨 함포가 다시금 빛을 방출했다.
만빙의 한기가 아니었다면, 이미 탈라리스를 제외한 이곳의 모든 생명체는 흔적도 없이 모두 녹아 버렸을 터.
“애들이 뭔가 해내고 있을 때, 어른들이 훼방을 놓아선 안 되지. 안 그래?”
말은 여유롭게 했으나, 탈라리스도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백야를 제압하기만 하는 건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
‘딸, 그리고 진.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어서 마무리를……!’
삼십 걸음.
이십 걸음.
그리고 마지막 열 걸음이 남았을 때.
‘아…….’
라오사는 방금까지 온몸을 휘감고 있던 끔찍한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발은 새카맣게 탄 채 허연 뼈가 드러난 모습이었고.
열풍을 휘저은 두 손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떠도 앞이 캄캄했고, 이미 그녀의 처참한 모습은 더 이상 ‘산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당연하게도.
더 이상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을 흐르던 감각이 빠르게 죽음을 향해 꺼져 가고 있었다.
‘더 빨리 동족들에게 돌아왔다면, 아니. 애초에 도망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미안하다는 마음이 일었다.
콜론에 남아 고통 받아 온 동족들에게, 그리고 이제라도 용기를 낼 수 있게 이끌어 준 진에게.
“신녀!”
움직임을 멈춘 라오사를 향해 시리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라오사의 뒷모습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시리스는 정신없이 날아드는 파편을 쳐내느라 그녀의 생사를 제대로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진! 라오사 신녀가……!”
차마 ‘죽었다’는 뒷말은 붙이지 못했다.
진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앞쪽을 책임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단 1초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폭음 속에서, 진은 아직 라오사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다섯 걸음인가.’
진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진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파편이 칼날에 닿을 때에도, 잘게 깨진 조각에 허벅지나 가슴팍 같은 곳을 베일 때에도.
그래서 뼈가 부서지고, 살갗에서 선혈이 터져 나와도. 진은 그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만을 느낄 뿐, 도무지 아프지가 않았다.
아까부터 제 피에 물들어 있던 눈동자는 붉고, 흐렸으며.
내뱉는 호흡에선 쌕쌕대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진……, 진……, 지이인……!
가까스로 진에게 달려온 시리스가 바로 옆에서 그의 이름을 소리쳤으나. 한없이 작고 멀게만 느껴져, 진은 고개를 돌려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가 다가온 몇 초 남짓한 사이에 흐릿했던 시야는 완전히 꺼져 버렸고, 푹. 길쭉한 파편 하나가 가슴팍을 꿰뚫어도 신음조차 새어 나오질 않았다.
‘끝인가.’
죽은 자도 살려 낸다는 누메루스의 눈물이라도 지니지 않은 한. 진은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뮤론 지플을 죽이고 도망쳤어야 했나? 아니면, 미도르 엘너가 추적을 왔을 때? 그때라도 원주민들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던 건가. 백야의 코젝이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라도?’
혹은, 애초에 이곳에 오질 않았어야 했나.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걸까, 생각하는 사이 진이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콜론에 오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번의 기회가 주어져도, 그 모든 기회의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콜론인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실패하지 않도록 더 많은 조력자를 만들고,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겠지만.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멍청한 놈이었다니. 그냥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일이었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처음 만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이번 생의 여러 목표와 상관조차 없는 일인데.
가령, 아버지를 뛰어넘고 최강의 기사가 된다거나.
룬칸델의 정점에 올라 세상을 쥐락펴락한다거나. 그로 인해 전생의 비참한 삶을 보상받는다는 그런 목적들과 이번 일은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까.
‘콜론인들이 오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면, 그건 내 회귀로 인한 결과니까. 내가 저 불쌍한 인간들의 죽음을 앞당긴 셈이니까.’
단지 더 강한 쪽은, 자신이 아니라 지플이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세상은 더 강한 자들의 잣대와 뜻대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마음도.
이번엔 자신이 약자였을 뿐.
‘고맙다, 미안하다 말하지 못한 게 아쉽군. 여러 사람에게.’
울컥!
한 덩이 피를 토해 내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지는 진.
“안 돼!”
브라다만테가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일까,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파편은 진이 쓰러지기 전보다 한층 더 많아진 모습이었다.
“이토록 많은 걸, 혼자 쳐 내고 있었던 거냐.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릴 정도로 미련하게!”
쓰러진 진에게 달려드는 시리스의 눈시울이 붉었다.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말한 것처럼, 진짜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보내기엔 아쉬운 사람이었다.
“뭐라고 대답 좀 해 봐, 살아남아서 나랑 다시 결판을 내야지!”
그게 진이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다.
진은 이미 숨이 끊어졌다.
시리스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충동적으로 주검이 된 진을 지키고 있었다.
챙!
콰득! 콱!
“딸! 그만두고 이쪽으로, 젠장!”
또 한 번, 코젝의 거대한 포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함포를 쏘는 간격이 계속 짧아지는 와중, 위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지우는 힘.
호사가들이 코젝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 과연 코젝은 그 이명에 걸맞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했잖소, 비궁주! 그대는 결코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으리라고!”
“내 딸아이가 다치면 네놈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분명 우리보다 강하나, 비궁은 지플보다 강하지 않지. 그대가 이만한 무위를 갖고도 숨죽여 지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었소?”
탈라리스가 대답하려는 순간, 상공에 또 다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야의 마법사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카둔……!?”
“우리 측의 마지막 지원군이 도착했구려. 비궁주, 이제는 그대의 딸뿐만이 아니라 그대까지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군.”
화룡 카둔.
켈리악 지플의 수호룡이자, 화룡들의 왕. 카둔이 포효를 내지르자 포격과 뒤섞인 만빙의 한기가 꺼져 가는 모습이 이어졌다.
[오랜만이군, 탈라리스 엔도르마. 만빙의 선택을 받은 인간아.]탈라리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이를 악물 뿐.
그리고 그 절망스러운 순간들을.
왜인지, 죽은 진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지? 난 분명 죽었을 텐데. 허, 빌어먹을. 저기 내 시체까지 보이잖아?’
몸이 한없이 가벼웠다. 하늘에 떠 있는 진의 몸은 반투명한 형상을 하고 있어, 꼭 신기루처럼 보였다.
진은 한눈에 전장을 다 보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은 진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슬픔에 악을 쓰며 본모습으로 변신한 무라칸도, 진의 주검을 지키다 막 쓰러진 시리스도.
아직까지 의식을 행하고 있는 원주민들도, 막 만빙을 완전히 개방해 카둔을 상대하기 시작한 탈라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죽은 자신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건, 어쩌면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한 주제에 무모했던 자신에게 신이 형벌을 내렸다고 말이다.
가혹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함께 싸우던 이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은 와중.
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한 사람이 하늘 위에 서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꽤 오래전부터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날 기다렸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나의 이름은 클람. 솔더렛의 도움을 받아 거울 속에 스스로를 봉한 자.]그 이름을 듣자마자 분노가 치밀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따지려는 찰나, 클람이 먼저 입을 뗐다.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는지 따지고 싶겠지.] [당연한 말을 하는군.]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해 주게. 이 광경을 지켜본 소감은 어떤가? 그대를 위해 싸운 사람들, 그대가 지키려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소감이 말이야.]당장 검을 뽑아 베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진은 대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만큼 강하지 못하고, 어리석었다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나.]그러자 클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을 잊지 말게.]딱.
클람이 손가락을 튕기고 다시 눈을 뜨니.
마치 종이가 넘어가듯, 갑작스레 풍경이 확 바뀌었다.
한없이 가벼워진 채 하늘에 떠 있던 몸은, 다시 뼈와 살의 무게를 갖춘 채 두 다리로 땅을 밟고 있었으며.
바로 앞엔 방금까지 마주하고 있던 클람이 라오사의 모습을 한 채 서 있었다.
[나는 라오사의 부름에 아까 전에 이미 응답했다네. 라오사가 그대를 보고 깨우침을 얻은 순간에 말이야. 방금 그대가 겪은 죽음과, 그 이후 본 끔찍한 풍경은.]클람이 진의 이마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작은 교훈이야. 그대가 나를 이끌어 내지 못했을 때의 가정을 보여 준 것이지. 천 년의 계약자여, 그대는 더 강해져야 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히 신들도 그대를 어쩌지 못할 만큼.]얼떨떨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만빙의 한기와 포격은 잠잠해져 있었고. 막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한 하늘엔.
거대함선 코젝이 반파된 채 검은 연기를 뿜어 댔다. 그리고 그 아래, 백야의 마법사들이 쓰러진 채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