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03)
제 222화
66화. 바네사 올슨(4)
‘상이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지만, 직접 두 귀로 듣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일단, 풀어준 말들 좀 붙잡아 오거라. 이 나이에 두 발로 황야를 며칠이나 걷고 싶지는 않구나.”
“알겠습니다.”
진이 말들을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황야에 발자국이 가득 남아 있어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말들은 길들여진 덕에 아주 멀리까지 도망가지 않았고, 진은 곧 말라붙어가는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는 말들을 찾을 수 있었다.
말들을 끌고 돌아오니 완전히 밤이 되었다.
“고생했다. 여기 앉아라.”
타닥, 타닥…….
바네사의 앞에 잘 피워진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무꼬치에 끼워진 육포에서 지글지글 기름이 흘렀고, 어디서 잡았는지 손질된 생선도 몇 마리 보였다.
그리고 통으로 세 개가 넘어가는 술이 있었다. 바네사가 그중 한 통을 따서 철잔 두 개에 가득 따랐다.
‘출발 전에 마차에 뭘 잔뜩 싣더니, 술이었나. 내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이럴 때도 대비해두셨군.’
진이 씨익 웃으며 목례했다.
“바네사 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근사한 술자리를 준비해주실 줄은 몰랐군요.”
“티칸에서 내내 대접받았으니까.”
깡, 찰랑. 철잔이 부딪치며 술이 찰랑거렸다.
무인들이 마시는 술은 독하다. 일반인과 달리 단련된 몸은 어지간한 술로는 쉽사리 취기가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네사가 가져온 술은 끔찍할 정도로 독했다. 삼키자마자 몸속에서 만독주가 반응할 정도니, 어지간한 무인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광심장을 얻기 전에 마셨던 보석주보다 더하군.’
새삼 이런 술을 만독주도 없이 벌컥벌컥 마셔대는 바네사가 대단해 보였다.
그녀는 한 통을 다 비우도록 말없이 잔만 들이켰다. 진은 그 페이스에 맞추려다, 그녀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는 걸 깨닫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모닥불에 비춰진 주름진 눈가에 슬픔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티칸에서 괜히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생각나는 시절이 있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느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생각나서 그랬다.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는데, 기억 속 그 녀석은 여전히 너처럼 소년 같아서 가끔 내 나이를 잊게 된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바네사가 슬퍼 보이는 것은 진의 시선일 뿐, 그녀에게 동생의 죽음은 이제 너무나 오래된 일이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쓸쓸함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길 하는지 궁금할 테지.”
“제가 동생 분과 닮았기 때문입니까?”
“전혀 닮지 않았어. 그 녀석은 너만큼 잘생기지 않았고, 강하지도 않았다. 내게는 특별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우린 고아에 귀족도 아니었고.”
크.
바네사가 연거푸 잔을 비우고 담배를 꺼냈다. 그리곤 모닥불에 불을 붙여 한 호흡에 다 태워버렸다. 자욱한 연기가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반면 나는 날 때부터 너희 룬칸델들처럼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 슈체론 왕국의 기사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열일곱에 선술집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었어. 잡배인줄 알고 두들겨 팼더니 수도의 기사였다더군.”
“그 기사는 깜짝 놀랐겠군요.”
“휴가 중에 고향 선술집에 찾아왔다가 봉변을 당한 셈이지. 난 놈이 코피를 질질 흘리면서 술집을 나설 때까지도 신분을 알지 못했어. 유일한 목격자인 주인장이 말해주더군, 놈이 슈체론 수도의 기사라고 말이야.”
“그 사실을 들은 경도 놀랐겠습니다.”
“엄청나게 놀랐지. 기사나 되는 놈이 설마 혼자 술 마시는 평민 소녀에게 괜한 시비를 걸 줄은 몰랐으니까. 시중 들 것 아니면 나가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기사라 생각하겠나.”
바네사가 또 담배를 꺼내 한 번에 태웠다.
“다음 날, 기사는 내가 아니라 주인장을 죽였다. 그 다음엔 내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이웃들을 죽이거나 잡아가기 시작했지. 영주가 직접 죄목을 만들어 병력까지 보내주더군. 수도의 기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말이야.”
그때의 바네사는 지금처럼 초월적으로 강하지 않았다. 잠재력이 엄청날 뿐, 열일곱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젠장. 결심이 너무 늦었던 거야. 동생은 영주의 병사들에게 잡혀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영주성으로 가야 했어. 검 한 자루 없이.”
바네사의 동생은 심한 매질을 당한 채 영주성 앞마당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기사는 바네사에게 옷을 벗고, 기어서 영주성 앞으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 대목을 들은 진이 주먹을 부르르 떨자, 바네사가 손을 저었다.
“푸흐흐, 다행히 내가 그 굴욕적인 요구에 응할 일은 없었다. 옷을 벗으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귀를 찢는 포효가 들리고…… 불덩이가 쏟아지기 시작했거든. 하필이면 그 순간에 용이 영주성을 습격한 거다. 화룡이었지.”
그 화룡은 한순간에 영주성을 무너뜨리고, 영주와 영주의 병사들을 죽였으며, 기사들을 살해했다.
모순적이게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화룡과 싸운 것은 바네사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 난리통에 죄수들이 탈출하고, 병사들도 도망가고, 영주와 그 기사는 용이 등장하자마자 죽었는데, 말뚝에 묶여 있던 내 동생은 운 좋게도 용의 숨결을 피해 살아있었거든. 그래서 싸워야했다.”
그 싸움에서 바네사는 각성했다.
본인도 모르던 잠재력이 만개했고,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괴력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난 죽은 기사의 검을 사용해 동생을 지켰다. 동생을 잡아간 그 기사의 검이지. 그리고 그 모습이, 화룡에겐 꽤 재미있게 보였나보더군. 내가 필사적으로 동생을 끌어안고, 놈의 불길을 쳐내던 모습이 말이야.”
각성했다지만 화룡의 힘을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화룡은 얼마 안 가 그녀에게서 동생을 빼앗았고, 일부러 그녀를 살려두었다.
“놈은 성을 지나 마을을 다 불사르더니, 동생을 찾고 싶으면 안테 산맥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갔고, 한 동굴에서 화룡을 다시 만날 수 있었지.”
동생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화룡은 나와 싸워주지 않았다. 날 두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어. 놈은 그냥 내가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거지. 시골 마을을 짓밟는 것보다, 그게 훨씬 재미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날 이후, 계속 안테 산맥에 계셨던 겁니까.”
“그래, 나가서 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더군. 지쳤었거든.”
진도 이제 바네사처럼 술잔을 빠른 속도로 비우고 있었다.
이후 바네사는 시론을 만날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용들이 찾아오면 용들을 죽였고, 사람이 찾아오면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인 일은 많지 않았으나, 그중엔 바네사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무인들도 몇 섞여 있었다.
모두 화룡에게 원한을 품고 있거나 도전하려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미쳐가고 있었지. 아니, 미쳤었다. 용을 백 마리 이상 죽였는데, 그 화룡은 끝내 나타나질 않았고,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네 아버지, 시론 경이 찾아온 거다.”
시론은 처음으로 바네사를 꺾은 인간이었다.
“네 아버지는 나를 제압한 다음 날, 곧장 그 화룡과 화룡의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왔다. 알고 보니 놈은 켈리악 지플의 수호룡, 카둔의 혈육이었더군. 그래서 카둔도 왔어, 제 혈육을 지키겠다고.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아버지가 모조리 다 죽였을 것 같군요. 카둔은 부상을 입고 도망갔을 테고요.”
“시론 경은 카둔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만 했다. 화룡과 그의 새끼들과 싸우는 건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주었지.”
복수는 바네사의 것이었다.
그녀는 끝내 화룡을 죽일 수 있었고, 죽이기 전에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왜 그랬느냐고.
“아까도 말했듯, 놈은 내 동생을 재밌어서 죽인 거야. 내가 절망하는 게 재밌어서 죽인 거고…… 시론 경이 두려워서인지, 어차피 죽을 거 끝까지 날 엿 먹이고 싶던 건지 유희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더군.”
“하.”
“나는 자연스레 시론 경의 기사가 되었다. 검은 투구를 쓴 뒤엔, 지나간 순간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지. 그러다 익숙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말과 행동이 제법 그럴싸한 기사처럼 변해 있더구나.”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네가 더 강하더라도, 네 부하들이 스스로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거라. 검귀들의 왕이 되려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다.”
“가슴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또한, 되도록이면 내 동생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말거라. 그들은 우리와 달리 너무나 쉽게 죽고, 우리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난데없이 부서지기 마련이다. 네가 언젠가 절망에 빠진다면.”
잠시 말을 멈춘 바네사가 진과 눈을 맞췄다.
“그건 너보다 강한 인간의 검에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네 곁에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 겪는 비극 때문일 거다. 나도, 네 아버지도 그런 것에 상처입고 괴물이 되었으니. 난 이제 동생이 돌아오지 않는 사실조차 슬프게 느껴지지가 않는구나.”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가운데,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바네사가 마지막 남은 술통을 열었다.
“네 아버지 얘긴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직접 들어라.”
“예.”
초월적인 인물로 거듭난다는 건,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당연한 감정을 거세해가는 과정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티칸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조언은 이만하면 된 것 같고…… 이걸 받아라.”
바네사가 품속에서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지도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지도와는 완전히 다른 데다, 진이 알고 있는 대륙의 대략적인 모습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또한 상당 부분이 비어 있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도임을 알 수 있었으며,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영역도 많아 선뜻 알아보기 어려웠다.
“흑해의 지도다. 붉게 표시된 지역으로 가라. 동료들과 함께 가도 상관은 없으나, 표시 지역부터는 만독주가 없다면 독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게 말씀하신 상입니까?”
진은 흑해에 지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전대 흑기사들은 거의 평생에 걸쳐 흑해의 지도를 만들었고, 그건 아직도 진행 중인 과업이었다.
“시론 경은 그 지도를 만들자마자 내게 맡겼다. 그리곤 경의 자식들 중, 내가 보기에 괜찮은 녀석이 나오거든 주라고 한 것이지. 따라서 이건 내가 내리는 상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시험이기도 하지.”
“가면 무엇이 있는지 여쭤도 알려주지 않으시겠죠?”
바네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한 걸 왜 알려주지 않겠느냐. 붉게 표시된 곳엔 한 마물이 있다, 그걸 쓰러뜨려라. 오래전, 마녀 헬루람이 기르던 녀석이라더군.”
진의 동공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