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08)
제 222화
67화. 마녀 헬루람의 유산(5)
그때부터는 마물과 함께 불을 끄러 돌아다녔다.
하지만 벌써 이틀째 지속되고 있는 화마를 잠재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으로 소화하는 건 한계가 분명했고, 불이 더 옮겨가지 않도록 검으로 화재 지역을 베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라도 내리지 않는 한 불길을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비가 내려도 이만한 규모의 불을 과연 제압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마를 진압하기 시작하자마자 어디선가 강풍이 몰아쳤다. 마치 둘이 싸움을 그만두고 불을 끄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또 해가 뜨고.
불길을 잡기 위해 그렇게 하루 동안 숲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진으로선 사흘이 넘게 사투를 펼친 셈이고, 슬슬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물은 일찍부터 포기한 듯 귀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는 울음소리만을 냈고, 진은 묘한 죄책감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물은 그저 이 독한 땅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뿐 아닌가. 반면 자신은 마물의 땅을 침범하고, 마물을 괴롭히고, 이제는 자신이 저지른 화마를 제압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일까?
마음만 찝찝해지고, ‘마물’에게 미안한 감정만이 가득해졌다. 진은 시론과 바네사가 왜 이런 시험을 내렸는지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녀석이 죽지 않는 몸이라는 걸 아버지가 모르실 것 같지는 않아. 끝없이 싸웠다간 어차피 내 패배로 귀결되거나, 도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 건가?’
적어도 ‘불사’라는 점에선 놓친 바가 없었다. 저주를 풀지 않는 이상, 마물은 무슨 수를 써도 죽일 수 없는 존재였다.
“후…….”
고민이 이어지는 사이, 끝내 화마는 가시나무 숲을 거의 집어삼켜버리고야 말았다.
타닥, 타닥, 타다닥…….
숲의 9할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다.
진과 마물은 겨우 지켜낸 몇 그루의 가시나무 앞에 앉아, 근처에 퍼진 잔불이 타오르는 허망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탁 트인 대지가 휑했다.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재가 휘날리는 와중, 검게 그을린 둥근 바위들이 무심하게 서 있었다.
[미야아…….]풀썩 주저앉은 마물이 낮은 울음소릴 뱉었다.
“미안하군.”
그것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난데없이 쳐들어와 보금자리를 다 없애버린 꼴이니, 상대가 마물이라 할지라도 미안한 감정이 들 수밖에.
탈력감에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40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전투, 그리고 24시간을 넘긴 화재 진압. 룬칸델의 축복받은 육체라 할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먀아.]홱 고개를 돌린 마물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나 당장 달려들 기세는 아니었다. 마물도 지친 듯, 이내 고개를 푹 떨군 채 한숨을 내쉬는 모습.
진이 마물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마물의 옆구리를 토닥여주었다. 위로해줄 방법이 없고, 미안하다는 말을 더 해봐야 공허할 뿐이니 마땅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난 아버지가 내린 시험을 받아 이곳을 찾아왔다. 내 입장에선 거부할 수 없었고, 그래서 너와 싸우게 된 것이지.”
그러자 마물이 발톱을 세웠다.
그리곤 진을 공격하는 대신,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슥, 슥, 마물의 커다란 발톱은 잘도 섬세하게 움직였는데, 그린 것은 다섯 명의 사람이었다.
‘미친, 잘 그리네.’
검을 쥐고 있는 가벼운 옷차림의 남자 하나와 검은 갑옷을 입은 네 명의 기사.
시론과 전대 흑기사들이었다. 갑옷을 입지 않은 시론이 가운데에 가장 크게 그려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중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먀.]“가운데.”
[먀악!]마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시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척 두려운 모양새였다.
“아버지가 널 해치셨나?”
[먁, 먁.]마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만하군. 아버지가 널 베었는데도, 넌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거지?”
[먀.]“……끔찍한 저주로군. 내가 겪었던 것보다도 심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사물을 완전히 ‘분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시론의 검에 당하고도 죽지 못하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지.
불사란 결코 행복한 현상이 아니다. 특히, 이런 끔찍한 가시나무 숲에 홀로 버려진 경우라면 더더욱.
“네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네게 그런 저주를 걸었는지 모르겠군. 마녀 헬루람, 그 여자는 널 버린 게 맞아?”
[먀…….]그 부분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쯤 되니, 진은 이 마물이 과연 마물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자아를 가진 애완동물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 그건 넘어가고. 여길 떠날 생각은 왜 못한 거냐?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건가?”
[먀먀.]마물은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처음 이 가시나무 숲에 자리 잡았을 때, 마물은 자신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헬루람에게 버려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냥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백년, 그제야 마물은 헬루람은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불사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상실감에 숲을 떠날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으며, 그저 숲의 익숙함에 취해 자신을 숨겼다.
그렇게 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던 와중, 시론과 전대 흑기사들이 마물을 찾았다.
그들은 마물이 불사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마물이 헬루람의 애묘였음을 파악했다.
그때쯤 마물은 처음으로 이 땅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시론이라는 인간의 어마어마한 힘을 떠올리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온몸을 무겁게 짓눌러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론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흑해를 조금만 벗어나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시론은 늘 같은 말을 했다.
-언젠가 내 딸아이가 너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마물은 그 명령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버린 주인, 헬루람이 분노해 소리칠 때보다도 시론이 나지막이 말하는 게 더 두려웠으니까.
이 모든 걸 울음소리나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행동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마물은 먀먀, 그렇다고만 대답한 것이다.
“음…… 숲을 못 떠난 건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랑 같이 나가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먀?]“널 쓰러뜨리면 보상이 있을 거라고 하셨거든. 내 생각엔, 그게 널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물이 한동안 눈동자를 끔뻑였다.
넌 딸이 아니라 아들이잖아, 그런 의미였지만 진은 알아듣지 못했다.
“거짓말 아니야.”
[미야아아.]“어차피 숲이 다 타버려서 갈 곳이 없잖아. 내 잘못이니까, 밖에 나가면 새집을 구해줄게. 여긴 독성이 심해서 숲을 복원할 사람들을 데려올 수가 없다.”
[미야!]있다!
“어디? 아, 설마 아까 그 굴?”
화마를 제압하는 동안, 진은 가시나무 숲 최심부에 한 동굴이 있는 걸 발견했었다. 그곳은 마물의 집이었다.
벌떡 일어선 마물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기서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불사라도 허기는 느끼는 거 아니야? 그래서 가시나무를 먹던 거고. 근처에 사냥감이라도 있는 거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이 숲은 시론의 영향 때문에 근처에 다른 마물이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마물은 대답하지 않고 굴을 향해 이동했다. 하는 수 없이 진은 한참 동안 마물을 뒤따라 걸었다.
그리고 굴에 도착하자마자, 진은 낯선 물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굴 가장 깊은 곳에 한 병의 술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술은 마치 누군가 방금 가져다놓은 것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다.
그 술병은 마물도 바로 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술병?’
진과 마물이 서로와 술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너도 모르는 눈치지?”
[먀아아.]다가가 술병을 들어 올린 순간, 진은 뒷면에 적힌 글씨를 마주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가왕주 – 시론 룬칸델)
“허…… 아버지가 갖다놓으신 모양이군. 자, 봐봐.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다. 아, 글은 읽을 줄 모르나?”
가왕주.
그 신비로운 술에 대해선 진도 몇 번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요정족의 후예들이 특별한 날, 특별한 순간, 특별한 사람을 위해 주조하는 술.
마시면 술의 주인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노래처럼 머릿속에 퍼지는데, 듣기 기막힌 곡조가 나온다고 하여 이름이 가왕주였다.
‘뭔가 내게 전하고 싶은 뜻이 있으셨겠지.’
퐁.
고민할 것도 없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뚜껑을 잔으로 삼아 가득 술을 채워 들이켰다.
노래는 세 잔을 마셨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술을 빚은 요정족의 후예들이 지닌 아름다운 목소리가 진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시론 룬칸델의 첫째 딸, 루나 룬칸델을 위한 짐승…….
시론 룬칸델의 첫째 딸, 루나 룬칸델을 위한 짐승…….
노래가 시작되자 기억이 떠오르듯 시론의 옛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오투왕 보라스의 어금니를 받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그처럼 또렷하지는 않았다.
노래가 너무 완벽한 나머지, 그 장면이 자연스레 상상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보인 것은 젊은 날의 시론이 요정족의 후예들을 찾아가 술을 빚는 모습이었다. 시론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요정족의 후예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마물을 찾은 직후인 듯 보였고, 곁에 선 흑기사들은 루나가 좋아하겠다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론은 요즘과 달리 어딘가 인자한 기색이 스민 모습이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비와 다름없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진에게는 노랫말보다 그 모습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루나 누님을 위해 이 녀석을 남겨두고, 가왕주를 빚으셨나보군…….’
본래 이 가왕주를 마셔야하는 것은 진이 아니라 루나였다.
가왕주의 노랫소리를 듣는 동안, 진은 시론이 루나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노래가 온통 시론이 루나에게 가진 애정과 기대감을 말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한창 듣기 좋은 음색이 이어지는 도중, 돌연 노래가 뚝 끊겼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 역시, 젊은 날의 시론이 아니라 최근의 시론이 보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을 따라가라.
그건 마물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지도’가 진에게 넘어갈 것 같다고 확신한 후, 시론은 루나를 위해 빚었던 가왕주를 들고 다시 요정족의 후예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왕주 속에 새로이 노랫말을 한 줄 추가해주라고 부탁한 것이다.
진을 따라가라, 그렇게 추가된 노랫말을 이제는 시론이 아닌 요정족의 후예들이 읊조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진이 술잔을 채웠다.
“너도 마셔봐.”
조심스레 혓바닥을 갖다 대자, 마물의 머릿속에도 진이 들은 것과 똑같은 노래가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