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14)
제 222화
70화. 악연(1)
방금까지 휘황찬란하게 섬을 물들이던 푸른 기운들은 다 거짓말인 것 같았다.
뇌기는 물론이고 뇌기가 일으킨 크고 작은 불들과 강풍, 빗방울에 이어 섬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크하하하!
돌연 두 팔을 벌린 채 미친 듯이 웃어 재끼는 무라칸의 두 눈동자가 희열로 물들어 있었다. 그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는, 놀랍게도 온 섬에 지진을 일으키고 인근 해역을 사납게 뒤집어놓고 있었다.
‘전성기 때 어마어마했다는 이야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이게 그 절반 수준이라고?’
진이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자신의 영기가 더해진 데다, 10분이나 힘을 모으긴 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무라칸은 지금껏 함께 지내온 그 바보용이 아니었다.
경외감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위압감. 스스로 곧잘 표현하던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과연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무라칸의 몸이 검은 입자로 변하며 흩어졌다.
이어 사방에 모인 영기가 무라칸이 서 있던 자리로 몰려들어, 흑룡의 본모습을 빚었다.
[옛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예상했던 수준은 한참 뛰어넘는군. 아주 만족스러워!]펄럭…….
날개를 펼친 무라칸이 율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용의 얼굴인지라 표정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지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놀아주마, 페이텔의 화신체.] [솔더렛의 피조물 따위가, 아까부터 주둥이가 험하구나. 네 신에게서 무엇을 배운 것이냐?]그렇게 말한 율리안이 다시 뇌전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뇌전은 영기의 어둠 속에 자그마한 푸른 불씨만 남기다가 저 혼자 꺼져버렸다.
[뭣……!?]황당한 마음을 억누르며 재차 시도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율리안의 권능은 전혀 발현하지 않고 있었다.
무라칸은 한동안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율리안이 뇌기를 일으키기 위해 충분히 많은 시도를 하고, 절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수십 차례나 권능을 부려보았건만, 섬에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권능이 사라진 건 율리안만이 아니었다.
시그문드 역시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람의 잔존 사념 또한 영기 해방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진이 투신 반의 이름을 말하고, 테스를 소환했을 때 율리안이 느낀 것은 ‘과거의 공포’였다. 옛 충격이 떠올라 잠시 움츠러들었을 뿐, 실제적인 공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기 해방을 끝낸 무라칸은 달랐다.
신의 권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피조물에 대해서, 율리안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품위를 잃지 마라. 신이라는 놈이 권능 좀 막혔다고 그렇게 벌벌 떨면, 상대가 민망하지 않겠나?]무라칸이 율리안에게 목을 내리며 말했다. 무라칸을 정면으로 마주한 율리안은 뒷걸음질을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러고도 모자라 황급히 뒤돌아서 엎드려 기어가는 모습까지 보였다.
비록 화신체라고는 하나, 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추태.
그 모습을 보며 무라칸이 가만히 앞발톱을 세웠다.
[온몸이 조각나도 죽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껏 살해당한 수많은 신들은 그럼 무엇이었을까? 대답해봐라, 화신체.] [꺼, 꺼져라! 저리 가란 말이다!] [정신을 못 차렸군. 그렇게 상소리를 할 때가 아닐 텐데…….]쇄액!
나무처럼 거대한 앞발톱이, 빛처럼 빠르게 움직여 율리안의 몸에 한 줄 선을 그었다. 용의 앞발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신속한 일격.
[크아아악, 아으악!]상체와 하체가 잘린 율리안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했다. 무라칸은 감흥이 없다는 듯, 몇 번 더 발톱을 휘둘러 그의 몸을 토막 내었다.
몇 초가 지나자 비명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다시 몇 초가 지나자, 율리안의 잔해들이 입자로 흩어지며 다시 육체를 재구성하였다.
[허억, 헉!]율리안이 제 온몸을 더듬으며 무라칸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러지 말거라. 내 아무리 화신의 형태로 강림했다 한들, 나는 신이란 말이다. 폭풍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날 물러나게 해주면…….]무라칸이 고개를 저어 말을 끊었다.
무라칸의 발톱이 다시 율리안의 몸을 조각냈다.
그때부터는 살육과 부활의 반복이었다. 무라칸은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율리안을 베었고, 율리안은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그만…… 그만.]지켜보는 진조차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영기의 어둠 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채 끝없이 찢기고 베이는 것은 어떤 절망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지겹군.]무라칸이 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율리안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마치 이미 가공이 끝난 고깃덩어리처럼, 부활할 때마다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무라칸, 슬슬 끝날 때가 됐나?”
[거의.]“놈은 죽는 건가?”
[안 죽어. 대신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망아에 이르게 되면 화신이 해제되지. 페이텔의 정신이 빠져나가고, 저 율리안이라는 인간은 다시 평범한 계약자가 되는 거다.]“그 다음엔?”
[그 다음은 네가 정할 문제지. 무리한 화신 해제로 실신해있는 율리안을 죽이거나, 생포하거나. 네 형에게 돌려보낼 일은 없을 테니,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겠지.]“당연히 생포해서 데려간다. 율리안뿐만 아니라 쿠잔과 베리스까지.”
그 셋이 제 주인에 대한 핵심 정보를 모조리 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라도 유의미한 정보를 뱉어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쿠잔과 베리스라는 놈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군. 아까 율리안의 뇌전을 피하는 것도 버거워 보이던데.]샤악!
무라칸이 율리안을 베었다.
육체가 재구성되며 부활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이제 율리안의 눈동자를 빛내던 푸른 기운이 꺼져가고 있었다.
화신이 해제될 징조였다.
[쐐기를 박아야겠군.]반면 무라칸의 눈동자는 검게 빛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흑진주처럼 변한 눈동자 속으로, 섬 전체에 퍼져있는 영기가 흡수되었다. 그 영기 속에 희미하게 남은 페이텔의 권능들이 스며있었다.
섬이 제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하늘이 걷히며 달빛과 새벽의 어스름, 그리고 먹구름들이 보였다. 이어서 숲과 나무, 바위가 본래의 색을 띠었고, 천둥의 신 그람의 묘지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지상의 사물 중, 그람의 묘지를 제외하면 ‘그림자’가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영기 해방이 펼쳐진 동안 완전히 흡수당한 것이다.
무라칸이 인간으로 변신하자, 황폐해진 대지에 다시 그림자가 생기는 모습.
“후우, 오랜만에 제대로 힘 좀 썼다.”
쩌적, 쩍…… 스르르…….
나무와 돌들에 균열이 생겼다. 곧 그것들은 모래가 되어 바람을 타고 휘날렸고, 그 아래.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율리안의 몸뚱어리가 있었다.
화신은 완벽하게 해제되었다.
“저거 적어도 일주일은 깨어나지 못할 거다. 심하면 반년까지도.”
율리안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면서 그람의 묘지 앞을 지나쳤지만, 시그문드는 다시 반응하지 않았다.
“네 말대로 멀쩡히 살아 있네. 쿠잔하고 베리스의 생사도 확인해보…….”
털썩!
별안간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호흡을 토하는 무라칸.
“무라칸!”
황급히 다가오려는 진에게 무라칸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염병, 몸이 따라주질 않는구만.”
“정말 괜찮은 거냐?”
“그럼, 화신을 해제한 다음에 이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골치 좀 아플 뻔했다. 신하고 싸울 땐, 너무 불공평한 느낌이란 말이지. 효율이 안 좋아도 그렇게 안 좋을 수가 없어. 뭐, 저쪽도 본신의 힘을 다 못 쓰는 거긴 하지만.”
“고생 많았다.”
“너도. 아무튼, 나침반 덕에 제대로 한 건 했네.”
진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몇 번 그 손을 잡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무라칸은 완전히 탈진한 듯 힘이 없었다.
“아오! 못 일어서겠다,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는데. 슈리나 꺼내줘, 베고 한 시간만 자야겠다.”
“그냥 계속 자. 쿠잔하고 베리스 찾으면, 내가 알아서 정리하고 슈리에 태워서 돌아갈 테니까.”
우우웅, 진이 적옥에서 슈리를 꺼냈다.
[먀!]안타깝게도 슈리는 나오자마자 앞발로 무라칸을 이리저리 굴리며 갖고 놀기 바쁜 눈치였다. 그러다 무라칸이 정말 힘들어 보였는지, 그를 핥아주었다.
무라칸은 곧장 실신해버렸다.
진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쿠잔과 베리스를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조슈아. 그 개자식은 쿠잔과 베리스가 타이뮨을 죽인 게 나라고 믿게 만들었다는 말이지…… 어차피 탄로 날 거짓말, 뻔하군. 놈은 쿠잔과 베리스를 나랑 엮이지 않는 선에서 사용하려고 했다.’
정확했다. 조슈아는 쿠잔과 베리스를 자신의 충실한 개로 만든 후, 진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는 일에만 사용하려고 했었다. 그들이 진과 마주치는 순간, 괜히 진실을 알아 의문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런데 진이 청새 군도를 찾아오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울러 비밀 전력 중 하나인 율리안이 노출된 것도 모자라 생포될 위기에 처했으니, 진의 이번 청새 군도 행은 조슈아에게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었다.
“쿠잔! 베리스!”
진이 두 사람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바위와 나무 등, 섬에 있는 은‧엄폐물이 모조리 영기에 휩쓸려 사라졌는데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근처 절벽까지 다 가봐야 하나.’
그렇게 판단한 진이 어디부터 수색할지 하나씩 방향을 잡던 중.
캬아아악……!
갑자기 무라칸이 있는 쪽에서 익숙하고 먼 괴성이 울리는 걸 들어야만 했다.
슈리의 울음소리였다.
“슈리?”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하게 무라칸을 핥아주던 슈리였다.
급격히 차오르는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었고, 진은 왔던 길을 되돌아 동료들이 있는 곳을 향해 전속으로 달렸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
“허…….”
진은 생각지도 못한 한 인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짙은 흑발,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흑검’이 새겨진 로브. 슈리는 털이 곤두선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는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막 도착한 진에게로 그 시선을 옮겼다.
“형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룬칸델의 장남이자 2기수이며, 공공연히 차기 가주로 언급되는 남자.
진에게 저주를 건 원흉.
조슈아 룬칸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