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43)
제 222화
77화. 악역(1)
어젯밤.
“라니, 네가 나를 베어야 한다.”
진이 성국으로 생존자들을 데리고 돌아오자마자, 비투라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진이 떠나있는 사이, 차후 성국에서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침입자와 반역자를 몰아내기 위한 고민을 끝낸 상태였다.
아니, 그것은 고민이 아니라 결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투라 경,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 공자가 증인들을 데려오고, 증거를 가져왔다. 게다가 지금은 강림제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눈이 이 땅을 지켜보고 있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확실하게 놈들을 끝장내려면, 함께 죽을 악역이 필요해.”
“농담…… 이시죠?”
라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비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인들이 있고, 새벽마차회 성자가 고통 속에 순교하며 기록한 증거가 있습니다. 굳이 비투라 경이 그들과 함께 엮이지 않아도, 충분히…….”
“그건 꿈같은 이야기다, 라니 살로메.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그 거대 가문을 상대로, 나라를 되찾는 일이 정말 그것만으로 가능하리라 믿는 것이냐?”
“안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플이든, 킨젤로든, 그놈들이 얼마나 대단하든. 그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생존자들의 몰골을 무슨 수로 부정하죠? 게다가 진 공자의 말대로라면, 지플은 칼 지플 때문에라도…….”
“물론 진 공자의 도움만으로도 놈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것은 가능할 테지. 하지만, 그 다음은? 놈들은 꼬리 자르듯 책임자 몇을 내세우고, 다시 이 땅을 좀먹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비투라 경을 역적으로 만들 순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잠시 정적 속에서 라니의 불안한 숨소리가 도드라졌다.
“라니 살로메. 지금 성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대답하지 못하는 라니.
“지도자다. 성국이 끝장나지 않았다고 믿게 해줄, 희망의 상징이 필요하단 말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역적들을 처단하고, 성국의 주인은 오직 아율라의 자녀들뿐이라고 소리칠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야 할 시점이다.”
“저더러…… 그 역할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비투라 경께서 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지도자가 되십시오.”
“라니.”
“막말로, 저는 경에 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그저 성왕의 딸이기에 신민들의 사랑을 받은 것일 뿐. 제가 무슨 자격으로 신민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제겐 그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미클란, 그 친구는 애초에 널 성왕으로 기르기 위해 데려온 것이다.”
“아버지께선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율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미클란은 아율라께 네가 성왕이 될 것이란 계시를 받았다.”
“그건 또 갑자기 무…….”
“이것을 보아라.”
비투라가 품속에서 한 권의 공책을 꺼냈다.
미클란의 일기장이었다. 국정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이, 사사로운 일상과 종교적 고찰만을 적은 그 일기의 중앙쯤에 라니와 아율라의 계시에 대한 일화가 적혀있었다.
“하.”
미클란의 필체를 라니가 몰라볼 리 없었다.
“그러니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아율라의 뜻이라 여기고 받아들여라. 너는 그 누구보다도 아율라의 말씀을 잘 따르는 자녀가 아니었더냐.”
“신께서 절 선택하셨다고 할지라도…… 이건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나는 전부터 대표적인 친 지플파로 알려진 상태인 데다, 실제로 오랜 기간 그들의 하수인인 척을 해왔다. 네가 나를 처단함으로써, 아율라의 화산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라.”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비투라 경.”
라니는 성왕이 납치되기 전부터, 오랜 기간 은연중에 비투라를 싫어했기에 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녀에게 비투라는 충신이 아니라 가장 먼저 지플의 앞잡이가 된 인물이었고, 아버지의 최대 정적이자 성국의 방해꾼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비투라는 그 누구보다도 미클란과 깊은 우정을 나눴고, 언제나 악역을 자처하며 내외의 적들을 감시해온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평생 사죄하고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에, 마지막까지 악역으로서 혼자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도록 내버려두라니. 라니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전 자신이 없습니다, 비투라 경…….”
“아니, 넌 할 수 있다. 너야말로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라. 이보다 좋은 수는 없다는 걸 사실 너도 알고 있잖느냐? 우리와 별 인연도 없는 진 공자조차 성국을 위해 큰 싸움을 치르고 왔다. 나를 베는 건, 그에 비하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아무도 경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잖습니까! 오히려 경을 손가락질하고, 모욕할 것입니다. 역사에 경의 이름은 끔찍한 배신자로 남을 것이고요……!”
“선을 행함에 있어 보상을 바라라고 하셨더냐, 신념을 지킴에 있어 인정을 바라라고 하셨더냐, 희생을 결심함에 있어 계산을 하라고 하셨더냐. 아율라와 위대한 성자들께선 그런 가르침을 남기신 적이 없다.”
“하지만.”
“라니 살로메!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더는 날 실망시키지도 마라. 나처럼, 너 역시 감내하라. 사사로운 마음의 고통이 두려워 나의 각오를 욕되게 할 것이냐.”
결국 라니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제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괴성을 질렀다.
그때, 진과 무라칸은 일순 라니의 몸이 환히 빛나는 것을 보았다. 착시라고 느낄 만큼 극히 짧은 빛이었다.
잠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다가 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비투라.
진과 무라칸은 아까부터 잠자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비투라가 제시한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있는지를.
떠오른 게 있다면 말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비투라의 희생이야말로 성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 틀림없었다.
외인이라고 하나.
당연히 진 또한 비투라의 희생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개인의 삶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비리를 폭로하고 휴페스터에 망명하거나 지플과 제대로 야합하는 쪽이 훨씬 안락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강철 같은 사내의 결정에 첨언하는 것은 크나큰 실례였다.
“진 공자.”
“예, 비투라 경.”
“그대에겐 갚기 어려운 큰 빚을 졌군. 성국을 위해 행한 그대의 노고는 내 죽어서도 잊지 않겠소.”
“……경과 달리 차후 대가를 받기로 약조를 받고 시작한 일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소.”
“비투라 경.”
“말씀하시오.”
“차후 경의 가족이 휴페스터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책임지고 조치하겠습니다.”
비투라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라니는 그의 가족을 챙길 수가 없었다. 성왕이 역적의 가족들을 돌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비투라의 가족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큰 낭패를 본 지플이 과연 그들을 살려두겠는가.
성국의 신민들은 아율라의 자애를 실현하며 돌팔매질을 하진 않겠지만, 역적의 가족들을 나서서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감사를 전하고자 이야길 꺼냈건만. 또 빚을 지는군.”
“검의 정원에서 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선배 무인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이라 여겨주십시오.”
* * *
“이 추악한 이단자들이,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교리수호 여명회! 저것들을 당장 끌어내라!”
비투라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격한 반응에, 광장은 오히려 무서울 만큼 조용히 가라앉았다.
다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생체 실험의 흔적이 역력한 열 명의 신민과, 허겁지겁 그들을 향해 이단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성기사 총대장, 그리고 경악에 젖은 가짜 성왕의 표정.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급격히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척, 척, 척!
비투라의 곁에 있던 교리수호 여명회의 성기사들이 순식간에 진열을 짰다.
인파가 자연스레 비투라와 교리수호 여명회의 성기사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그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나아가는 모습.
“폐하! 저것들은 모조리 이단입니다. 놈들에게서 물러나십시오! 황금방패회, 네놈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 그 이단자들을 폐하에게서 떼어내지 않고!”
황금방패회는 비투라의 명령에도 꿈쩍하지 않고 마차를 둘러싸고만 있었다.
가짜 성왕이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와중, 라니가 비투라를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총대장께선 어찌 이들을 이단이라 단언하십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이토록 함부로 검을 뽑으시다니요. 물러나십시오!”
광장에 선 사람들 중 성왕과 비투라의 정치적 대립을 모르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눈에 비투라의 모습은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악을 쓰는 지플의 개처럼 보였다.
“나는 성기사 총대장이다. 이단 심판에 대한 전권은 내게 있다. 눈이 있다면 보아라, 라니 살로메. 저 흉측한 몰골들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느냐? 필시 마족과 내통한 자들이다!”
“그건 폐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폐하, 비투라 경이 물러나도록 명을 내려주십시오.”
가짜 성왕은 부바르의 도움으로 변신했을 뿐, 킨젤로가 아닌 지플의 사람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이단자들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성국의 위신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저들을 제압하고 축성식을 속행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입을 놀리면 너 역시 이단으로 간주하겠다, 라니 살로메. 다들 비켜라! 길을 터라!”
비투라와 교리수호 여명회 성기사들이 신민들에게 닿을 듯 가까워지자.
황금방패회 성기사들이 발검하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비투라 경.”
“네놈들이……! 네놈들은 내 직속이다, 감히 가로막는단 말이냐?”
직속.
비투라가 진을 만났을 때 목을 친 자들과 달리, 끝까지 충절을 잃지 않은 황금방패회의 기사 서른.
그들은 혀를 끊는 심정으로 비투라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폐하의 명 없이 무기를 꺼낸 것만으로도 반역에 해당합니다. 총대장께선 당장 검을 감추십시오.”
챙!
비투라가 황금방패회 성기사들을 향해 사납게 검을 내질렀다.
동시에 교리수호 여명회의 기사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곳곳에서 선혈이 튀었다.
비투라는 악귀에 홀린 사람처럼 생존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들만 죽이면 오늘의 사태는 나중에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비투라와 오십 명의 교리수호 여명회 성기사, 그리고 라니와 서른 명의 황금방패회.
전투는 완전히 난전의 양상이었으나 비투라는 과연 총대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황금방패회의 성기사들을 힘으로 밀어내며 생존자들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는 것이다.
“이 이단 놈들, 목을 베어주마!”
비투라가 가까워질수록, 열 명의 생존자들은 가짜 성왕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당연히 미리 이야기가 된 사항이었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생존자들 전원이 비명을 지르며 가짜 성왕을 둘러쌌고, 라니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라니의 앞에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당연히 비투라였다. 황금방패회는 교리수호 여명회가 라니에게 진입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항전하고 있었다.
라니와 비투라의 눈빛이 마주쳤다.
둘 다 겉으로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으나,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라니, 네년도 이단자다. 추후 엄중히 죄를 물을 것이야! 폐하, 폐하! 제가 왔습니다, 이 비투라가 이단자들로부터 폐하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카앙!
라니와 비투라의 검이 섞였다.
두 사람이 밤새 연습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라니는 그의 공격을 피하고, 막기만 하면 되는 반면. 비투라는 그녀를 밀어내고, 생존자들을 죽이려는 척하며 가짜 성왕을 노려야 했다.
챙, 채앵-!
비투라의 검을 받아내는 동안, 라니는 꼭 그가 검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고 말이다.
터엉!
비투라의 찌르기에 라니가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때 가짜 성왕, 생존자들과 비투라의 거리는 겨우 두 걸음이었다.
광기에 찬 눈빛으로 라니를 지나쳐 한 번 더 검을 내지르는 비투라.
다음 순간 벌어진 결과는, 그야말로 비투라의 실수처럼 보였다.
“커, 허……!”
비투라의 검이 가짜 성왕의 목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가 제 실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멈칫한 뒤, 생존자들에게 다시 검을 뻗으려는 찰나.
막 일어선 라니의 검이 비투라의 뒷목으로 쇄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