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49)
제 222화
77화. 악역(7)
오백 척에 이르는 범선이 성국의 동부 항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코 갑작스레 등장해서는 안 될 규모의 함대였다. 심지어 그 함대의 주인은 성국의 동맹조차 아니었다.
베락트 시드리커, 백랑족의 대전사가 이끄는 수인 함대였다.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범선 오백 척을 영해에 진입시킨 것이니, 성국 입장에선 전쟁 선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백 척의 범선은 모두 가장 높은 돛대에 조의를 표하는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또한 한 대도 빠짐없이 모든 함포를 탈거했고, 각 배의 선수엔 거대한 검은 깃발을 흔드는 백랑족 수인들이 한 명씩 서 있었다.
전쟁이 아니라 조문을 위해 찾아온 것이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의 조문 사절단이었다.
“미친놈들인가? 성국이 어지러운 걸 뻔히 알면서, 조문이랍시고 배를 오백 척이나 보내?”
무라칸이 고개를 저었다.
“디노 때문에 킨젤로의 이름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과시하려는 거야. 자기들은 3류 테러단체가 아니라고 말이야.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몰라도, 똑똑하네.”
“똑똑하다고?”
“킨젤로는 날 돕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세간이 킨젤로를 허접한 단체로 인식하고 있으면, 성국에 뭘 제공하든 공신력을 갖기가 어려워.”
“흠, 그것도 그렇군.”
“우린 범선 오백 척을 단지 조문을 위해서도 보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단체다. 그런 걸 알리려는 속셈인 거지.”
“인간 기자들에겐 아주 먹이가 풍년이겠어.”
지금껏 세력을 숨기고 있던 킨젤로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게 의외이긴 했다.
‘더는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건가. 아니면 지금까지는 단지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감췄던 건가.’
어느 쪽이든 지플로서는 열 받을 상황이었다.
칼이 3류 테러단체에 붙잡혔다는 걸 감추고자 이미지를 포기했건만, 킨젤로가 본격적으로 위세를 드러냈으니 말이다.
성국은 오백 중 단 한 척만이 정박하는 것을 허락했다. 오백 척을 다 수용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조문이라 할지라도 이건 정도를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정박한 한 척의 배에선 베락트와 그를 보좌하는 수인 다섯, 그리고 스무 명 정도의 포박된 인간이 내렸다.
베락트의 거대한 몸집이 단연 압도적으로 시선을 끌었다. 보좌하는 백랑족들도 수인들의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전사였으나, 베락트의 기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곧장 이동관문을 이용해 수도로 들어서서 라니가 있는 광장을 찾았다.
베락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근처에 모인 군중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천적을 만난 짐승들처럼 대부분이 감히 베락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
베락트 역시 예의를 지키지 않았으나, 공포감에 짓눌린 군중들은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백야가 코젝을 이끌고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내 베락트가 라니의 앞에 서자 황금방패회 성기사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꼬마.’
진과 무라칸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
‘저거 상당히 강하네. 네 큰누이도 장담하지는 못하겠는데?’
무라칸은 베락트를 그렇게 평가했다.
“킨젤로의 혁명군 총대장이자 백랑족의 대전사, 베락트 시드리커요. 성왕 미클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찾아왔소.”
“……감사합니다, 베락트 시드리커.”
“라니 경, 그대는 모르겠지만 나는 30년쯤 전 성왕에게 빚을 진 적이 있소이다. 전투 중 큰 부상을 당했었는데, 우연히 우리의 땅에서 수행 중이던 미클란이 날 치료해주었었지.”
“아버지께서 그쯤, 수인들의 땅에서 고행에 임하셨다는 걸 이야기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는 내가 아는 인간 중, 가장 괜찮은 인간이었소. 심심한 위로를 전하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기로 유명한 백랑족, 그중에서도 대전사가 찾아온 것도 놀랍건만 이처럼 신사적인 언행을 구사하는 건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라니의 시선이 베락트의 뒤에 있는 포박된 인간들에게 닿았다. 그들은 더럽고 해진 지플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묶여있는 인간들은 우리가 붙잡고 있던 지플의 포로들이오. 우리가 지플과 동맹이었던 시절에, 이 인간들은 지플 가주의 지령을 받아 우리의 땅에서 허락 없이 생체 실험을 자행했소.”
“네?”
“자세한 건 이것들이 자백할 것이오. 부디 그대의 나라가 하루 빨리 슬픔에서 빠져나오길 빌도록 하지.”
군중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진은, 한 번 더 킨젤로 내에서 이 계략을 짠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위세 과시에 이어 은근히 라니를 성국의 수장으로 대하는 태도. 게다가 생체 실험은 켈리악의 지령이었다고 쐐기까지 박아주는군.’
어차피 지플에게 완전히 누명을 씌우는 과정은 진흙탕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락트의 발언은 지플을 향한 아주 훌륭한 공격이었다.
‘사실 생체 실험이 킨젤로와 지플의 합작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뻔뻔한 말이기도 하지만.’
지플을 성국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킨젤로의 죄는 성국이 정상궤도에 오른 다음 추궁해도 늦지 않는 것이다. 일단은 킨젤로의 이름도 수면 위에 띄워놨으니 말이다.
라니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베락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래 있어봐야 다들 불편하기만 할 테니, 바로 떠나보겠소. 우리 또한 지플과 동맹이었던 건 사실이니, 추후 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소.”
* * *
베락트가 데려온 포로들은 모두 지플의 아카데미 소속 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그간 지플이 성국 신민들을 대상으로 행한 모든 실험을 남김없이 까발렸다.
자백은 머츄얼 실라가 남긴 기록과 거의 일치했고, 합작이 아니라 지플이 단독으로 벌인 실험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자백에 의해.
성국 내에 추가 실험 시설이 있다는 것이 온 세상에 까발려졌다. 성국 수도 북부와 몇 개의 도시에 지플은 비밀 실험실을 만들어두고 있던 것이다.
그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라니와 신민들은 성국 내에도 지플의 실험실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건 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칼 지플이 꼬리라는 걸 밝혀도, 지플의 이미지를 깎아먹고 적당히 물러나게 만드는 게 가장 좋은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성국 내에도 실험실이 있었을 줄이야.”
선하고 정의로운 마법사 가문이라는 것은 성국 내에선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럼에도 지플은 아직 이렇다 할 추가 성명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킨젤로가 제대로 지원을 해줬군. 아니, 꼬마. 네놈이 그놈들을 잘 이용했다고 봐야 하나?”
“그게 맞지. 그놈들도 가만히 둘 생각은 없어. 분위기가 계속 이렇게 흘러가면 킨젤로는 잃는 게 없거든. 지플의 마탑주를 납치하고, 지플의 마법사들을 포로로 잡을 수 있는 잘 나가는 단체라는 좋은 이미지만 얻고.”
“암흑마법회가 괴멸되고 리올 지플의 마법서를 잃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것으론 부족해. 킨젤로도 지플과 다를 게 없는 놈들이라는 걸 알려야지. 이만하면 성국에선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버릴 때가 됐다.”
“어떻게 하려고?”
진이 대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급히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방문을 두들겼다.
“진 공자!”
다급한 목소리, 카시미르였다.
“카시미르 경? 무슨 일 있습니까?”
“칼 지플이 살해당했습니다……!”
진과 무라칸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요? 지하 수용소는 황금방패회 충신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까?”
“암살자가 황금방패회의 경계를 뚫었어요. 지플에서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하.”
칼 지플은 지금 죽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살아있어야 켈리악이 아들을 무고한 꼬리로 이용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칼이 사망하면 성국이 지플을 압박할 명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플이 ‘생체 실험의 주범’이라고 보낸 인간을 성국이 죽인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지플로서는 칼이 사망했으니 ‘죗값을 치렀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칼을 죽인 건 물론 성국이 아니라 지플의 암살자이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플의 펜대들은 오늘부로 칼이 죽었는데도 성국이 지나친 사과를 요구한다며 날조 기사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꼬리 자르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결코 꼬리를 자르면 안 된다.
“벌써 지플의 언론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플은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말이죠.”
“인간이 바보 같은 종족이긴 하다만, 그걸 믿겠어? 미물, 딱 봐도 칼을 죽인 건 지플이잖아.”
“성국 내에선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죠. 다만, 외인들은 성국이 칼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지나친 고문을 하다가 죽였다고 생각할 겁니다. 성국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칼의 죽음을 암살로 포장했다는 이야기가 나돌 것이고요. 왜냐하면…….”
카시미르가 한숨을 내쉬며 뒷말을 이었다.
“지플, 그놈들이 살해 현장에 바멀이라는 이름을 남겨놨습니다.”
진과 무라칸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놈의 피로 성국 신민들의 원한을 씻겠다 – 바멀.
칼을 죽인 후, 암살자는 수용소의 입구 벽에 검으로 이렇게 문장을 새겨두었다.
“이미 기자들이 벽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했습니다. 일부러 칼이 가둬져있던 독방이 아니라 입구에 새겨놓은 겁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말이죠.”
“무슨 의도인지 알겠군요. 이미지, 위신. 내 덕분에 둘 다 잃었으니 나더러 정체를 밝히라는 뜻일 테죠.”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공자.”
칼을 죽인 암살자가 스스로를 ‘바멀’이라 밝혔다.
무라칸의 말대로 그걸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바멀이 공식적으로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성국은 더 이상 지플에 죗값을 물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칼이 죽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진짜 바멀인 진이 공식석상에 나타나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그때부터 지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성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룬칸델의 상징이었던 ‘악과 패도’가 지플의 몫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렇게까지 악역이 되고 싶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거들어줘야겠죠. 나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야겠습니다.”
“공자의 뜻이 중요하긴 하지만…… 제 생각에, 정체를 밝히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공자 말대로 이미지도, 위신도 잃었으니 바멀이 누군지 찾아내서. 지플에 대항한 자가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지플에 대항한 자가 별 탈 없이 잘 살아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놈들에게 큰 타격이 될 겁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정체를 밝히면서 킨젤로까지 엿을 먹여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