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74)
제 222화
88화. 축하 사절단, 의외의 만남(1)
“아랫것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인사를 올리다니, 제가 지나치게 무심했습니다.”
로사가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그녀는 수호기사들의 보고를 받은 직후 진의 방을 찾은 상태였다.
“그래, 무심했지. 이 몸이 깨어나 검의 정원을 찾았으면, 응당 너와 네 남편이 내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그런데 가주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아랫것들은 무례하니 이만저만 서운한 게 아니로구나.”
“현 시간부로 검의 정원에 소속된 전원이 무라칸 님을 가문 대원로와 동등한 수준으로 모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대원로와 동등한 수준, 이라는 표현에 일순 무라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고작 대원로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게 짜증나기 때문.
그러나 무라칸은 더 이상 ‘옛 시절’에 취해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전성기의 힘을 다 되찾지도 못했을뿐더러, 테마르가 지상을 떠난 건 천 년도 더 된 일인 것이다.
테마르가 룬칸델을 처음 일으켰을 때, 무라칸은 그 누구보다도 룬칸델과 가까운 존재였으나.
이제는 외인에 더 가까웠다. 심지어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로사와는 명백한 적대 관계고 말이다.
‘천 년 전과는 풍경도, 사람도 모두 다르군. 테마르, 오랜만에 네놈이 보고 싶구나.’
피식, 무라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룬칸델이 달라지긴 달라졌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이치겠지요.”
“발전이라. 룬칸델이 그런 걸 이룩했다면 지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을 잃은 뒤, 너희들은 지난 천 년 동안 줄곧 약해지기만 했다.”
“저야 한낱 필멸자에 불과해 옛 룬칸델의 위용은 기록으로만 엿볼 수 있지요. 그 시절 룬칸델이 얼마나 강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으나, 저는 그저 전통과 법도에 따를 뿐입니다.”
“그 전통과 법도 또한 지플과 맺은 굴욕적인 맹약에서 기인한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맹약을 깨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네 막내아들을 가문 대부분이 배척하려 드는 것이냐.”
로사가 한동안 무라칸과 눈을 맞췄다.
“원로들은 결전기를 전수해줄 생각이 없고, 너는 오자마자 그 녀석에게 감당키 어려운 임무를 내리려고 한다고 들었다.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면 좋겠군.”
“무라칸 님. 우선, 막내가 맹약을 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지플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누구든 맹약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룬칸델의 피에 새겨진 것은 저주다. 마력이 봉해지는 저주이며, 솔더렛의 힘을 제외하면 그 어떤 마법과 권능으로도 파훼할 수 없다.”
“솔더렛께서 그만큼 전능하시다면, 지난 천 년 동안엔 왜 저희를 그냥 내버려두신 겁니까? 심지어 솔더렛께선 지플의 수호신으로 계셨습니다.”
그 대목에선 무라칸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신이 왜 신인가. 자신을 모시는 인간을 보호하거나,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을 실현하기 때문에 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솔더렛은 테마르 사후 한 번도 룬칸델의 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네 막내아들과 계약하지 않았느냐?”
“단순 계약은 막내 개인의 무력에 도움이 되겠지만, 직접 현현하시어 저주를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가문 전체 차원에선 큰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맹약을 어겼으니 지플의 압박을 받거나, 정통성 훼손으로 인해 가문 내 혼돈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앞에서 정통성을 따지는 것은 우습구나.”
로사가 찻잔을 매만졌다.
“가문의 원로들이 결전기를 전수해주지 않으려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겁니다. 또한,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막내에게 감당키 어려운 임무를 준 적이 없습니다.”
“계속 말해보아라.”
“흑기사 첩자를 살해하는 건 막내의 단독 임무가 아닙니다. 무척 중요한 사안인 만큼, 다른 뛰어난 기수 또한 함께할 것입니다. 가주의 뜻이 있었으니 저 역시 막내가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막내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 출중한 능력을 실컷 이용해먹다 버리고 싶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어차피, 막내는 계속해서 이변을 일으켜야 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룬칸델에서 인정받을 수 없지요. 기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습니까?”
무라칸이 한동안 로사와 눈을 맞췄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도록 하지.”
“말씀하십시오.”
“테마르의 무덤은 어디에 있나?”
“알 수 없습니다.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로사는 무라칸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
“무라칸 님께 무례를 저지른 기사들은 엄벌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사가 방을 나서자 무라칸이 쯧 혀를 찼다.
“시론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저것도 보통은 아니군.”
그러자 길리가 휘유,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무라칸 님, 설마 마님을 직접 호출하실 줄은…… 다음부턴 절대 이러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마님께선 지금 룬칸델의 가주 대행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딸기파이여. 한 번쯤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지. 꼬마 녀석의 가장 큰 적이 어떤 인물인지.”
“행여 마님께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실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품위가 없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님께 무안을 주는 건 그만하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무라칸 님이라 할지라도 가문 재판부에 회부될…… 엇!”
돌연 길리가 움찔하며 말을 끊었다.
창밖에서, 막 건물을 나선 로사가 수호기사들을 베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컥!”
“어억……!”
검의 정원에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 사이로, 수호기사들의 시뻘건 선혈이 튀어오르고 있었다.
모두 메리를 추격하다가 무라칸에게 무례를 범한 수호기사들이었다.
그들을 베는 로사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빠르고, 정확하게 수호기사들의 팔이나 다리를 베었다.
그리고 대장 격이었던 수호기사는 목이 베였다. 툭, 무참히 떨어진 그의 목에 로사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모습.
길리는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고, 무라칸도 뒤늦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그건 무라칸을 향한 경고였다.
한 번만 더 함부로 자신을 호출하면, 그때는 가문 수호룡으로서의 대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
이윽고 로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뜨자, 하인들이 부리나케 몸을 놀려 죽은 이의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옮겼다.
* * *
“그런 일이 있었어?”
치료를 끝내고 돌아온 진에게 길리가 낮에 있던 유혈극을 전해주었다.
“저도 마님께서 수호기사들을 그런 식으로 벌하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한동안 가문의 권속들 모두가 위축될까 우려되는군요.”
“어차피 모두 조슈아의 기사들이니, 언젠가 내 손에 죽거나 다치긴 했겠지만…… 어머니께서 너무하시긴 했군. 그래도 가문을 위해 헌신한 이들인데, 별것 아닌 일로 지나친 벌을 주셨어.”
“단지 무라칸 님의 처사에 분노하셨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야. 어머니의 의도는 분명하지. 권속들에게 어지간해선 나와 엮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거야.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사소한 문제에도 큰 화를 입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지.”
“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런 게 무슨 어미란 말이냐? 꼬마. 테마르의 룬칸델도 꽤나 분위기가 험악했지만, 적어도 혈육과 권속에 대해선 정이 있었다.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고.”
“그런 유대는 지금도 있어. 전체가 아니라 국소적일 뿐이지. 그리고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잖아? 길리, 오늘 죽은 수호기사의 가족들에겐 애도와 보상금을 전해. 은밀하게, 내 이름은 빼고.”
죽은 기사는 조슈아의 사람이니 명백히 진의 적이었다.
그럼에도, ‘넓은 의미에서’ 그 또한 룬칸델의 사람이다.
적이되, 권속. 그의 죽음은 적의 죽음이자 권속의 죽음이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는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밀에서 조슈아의 기사들을 죽였을 땐 예비 기수였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는 기수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알릴 생각 또한 없더라도 권속의 죽음을 챙겨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가 가문을 배신하거나, 진의 친인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예, 도련님. 시끄럽지 않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검을 되찾으셨군요.”
“메리 누님한테 이거 받으려고 마력 폭탄 밭을 뒹굴었지. 진심으로 누님을 죽일까 고민도 했었고.”
“제 생각에, 메리 아가씨는 도련님의 든든한 아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제드 원로께서 아까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도련님을 위한 축하 사절단 방문이 끝난 직후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알겠어.”
이후 진은 한동안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개인 수련에만 매진했다.
복귀하자마자 큰 사건을 연달아 일으켰으니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었다.
그사이 검의 정원엔 진이 ‘메리를 이겼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아울러 진이 기수로 임명된 사실도 전 세계에 전파되어갔다.
검의 정원과 세상 밖이 떠들썩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디노는 진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기사를 작성했고, 쿠잔과 율리안은 ‘광견 잭 글로우’와 ‘파계기사 휘로크’를 하나씩 맡아 미텔 동남부 설산 지대로 몰아가고 있었다.
폭풍의 핵처럼, 진의 시간만이 고요하게 흘러갔다.
이윽고 1799년 2월 15일.
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 하나둘씩 검의 정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위 세력에 격려를 나선 기수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휴페스터의 무가들을 비롯해 온갖 중립 세력과 비먼트까지도 사절을 보냈으나, 진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거의 만나주지 않았다. 심지어 선물만 받고 그냥 보내는 무례를 저질렀다.
“도련님, 계속 그냥 보내셔도 되겠습니까?”
페트로의 물음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런 사소한 행동에 날 판단하는 이들은 급하게 포섭할 필요가 없고, 내 무례에도 대범하게 나오는 부류는 알아서 내 가치를 알아볼 것이네. 무엇보다, 지금 당장은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쓸데없이 가까워져 봐야 괜한 빚만 지게 될 뿐이지.”
줄 수 있는 게 없을 때,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건 큰 이자를 담보하는 법이다.
“델키 왕국과 맥로란, 그리고 쟌 왕국의 빌가, 성왕의 사절만 직접 맞이하도록 하겠네. 나머진 선물만 받고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특별한 호의를 표한 이들은 따로 기록해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볼타 가문에서 사절을 보내면 내게 보고하게. 그들도 직접 만나야겠으니.”
“볼타 가문 말씀이십니까?”
볼타는 휴페스터에서 가장 가난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그리고 휴페스터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곧 가문 내에 뛰어난 무인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온갖 세도가와 굵직한 세력의 사절을 다 그냥 보내고, 굳이 그런 몰락 귀족의 사절을 직접 받는 건 페트로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차, 너무 앞뒤 없이 볼타 이야기를 꺼냈군.’
페트로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진이 은근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길리와 무라칸은 이 내용을 듣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혹 두 사람에게 볼타를 챙긴 이유를 말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건 그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야겠어.’
진이 볼타가를 챙기려 하는 이유는,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라칸, 길리와 달리 페트로는 ‘동료’가 아니라 권속이고 진은 어엿한 기수였다.
명령을 내릴 때, 굳이 자세하게 납득시키거나 해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킨에선 전생의 기억을 이용하기 위해 제트가 필요했고, 이후엔 카시미르 경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지.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진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볼타가의 사절이 오면 즉시 보고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