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83)
제 222화
89화. 테마르의 첫 번째 무덤(5)
* * *
새벽빛이 바올라이를 비추고 있었다.
열쇠를 받은 무라칸은 한동안 씁쓸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씁쓸함뿐일까, 회한, 슬픔, 그리움, 자조, 무력감까지.
온갖 무겁고 어두운 감정들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파내고 있었다.
친구.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무라칸에게 테마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어떤 싸움도 함께할 수 있었고, 그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목숨을 내놓아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삼천 년을 넘게 살아온 위대한 흑룡의 삶에 가장 괴로운 일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그것이었다.
[먀아…….]슈리가 무라칸의 어깨를 핥았다. 한참 핥아도 반응이 없자 잠시 구슬픈 울음을 흘리곤 적옥 속으로 들어갔다.
‘무라칸…….’
평소의 그답지 않은 슬픈 모습에, 진도 달리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
전생의 진도,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기억이 있었다.
검의 정원에서 추방당한 그날, 길리는 오러가 봉해져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불현듯 회귀 전 길리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진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열쇠를 쥔 무라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내 무라칸은 열쇠를 두 손으로 끌어안아 가슴에 품었다. 장대한 근골이 어쩐지 마른 가지처럼 보였고, 뒷모습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일까. 오래전 상처 입히고 떠난 친구가 가여워서.
진이 찬찬히 무라칸에게 다가갔다. 다독여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이, 씨. 이게 왜 이래. 아오.”
무라칸이 걸걸한 상소리를 냈다.
“어, 음? 무라칸?”
“이 열쇠 말이다, 영기를 왕창 처먹여도 발동될 기미가 안 보여. 별게 다 이 무라칸을 짜증나게 만드는군……. 하, 누가 이기나 보자고. 빌어먹을 장난감 같으니.”
무라칸의 뒷모습이 떨리던 것은, 그가 흐느껴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열쇠에 열심히 영기를 밀어 넣느라 부들부들 떤 것일 뿐이었다.
열쇠를 끌어안듯 가슴으로 당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한 손으로 가볍게 영기를 주입하다가, 도통 반응이 없으니 두 손으로 대량의 영기를 주입하기 시작한 것.
“아, 좀 발동해라! 벌써 5성은 처먹은 것 같은데!”
진은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짜증 좀 그만 내라. 돌아가면 길리 바로 휴가 보낼 테니까, 그때 어디라도 같이 다녀오든지.”
홱!
무라칸이 빛의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냐!?”
“그래, 뭐 어려운 일이라고. 길리가 나 때문에 행실을 조심할 필요도 없고.”
“정말 오랜만에 키운 보람이 있는 이야길 하는구나, 꼬마. 크하하, 그래. 이왕이면 길게 줘라. 딸기파이랑 오순도순 재미지게 놀다가 올…….”
“그런데, 딸기파, 아니. 길리가 그냥 거절한 걸 수도 있잖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냐?”
“뭐라고?”
“휴가만 있으면 당연히 길리가 네 데이트 신청을 받아줬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거든. 그런데 또 거절당하면, 감당할 수 있을까 싶군. 상처가 클 텐데.”
발끈하려던 무라칸이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헹! 크하핫,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하긴, 네놈은 97년 말부터 라프라로사에 있었으니…… 아무튼, 말 바꾸지 마라. 그럴 리 없으니까.”
진으로서는 묘하게 열이 뻗치는 대답이었다.
‘길리랑 별일 없던 것 같은데, 뭔 자신감이지? 아니, 그리고 두 사람 이런, 연애…… 연애사인가? 아무튼 이런 문제를 내가 왜 신경 쓰는 거지? 왜 재수가 없는 거지?’
‘꼬마 녀석 아니꼬워서 아무렇게나 말하긴 했는데, 진짜 거절당하면 어쩌지?’
물론 진과 무라칸은 서로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예, 예. 열쇠나 발동시키세요, 위대한 흑룡님.”
“어, 기다려봐. 흠……!”
다시 열쇠에 영기를 주입하기 시작한 무라칸.
하지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영기를 쏟아 넣어도,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솔더렛, 이 자식. 대체 이딴 장치를 왜 만든 거야!”
무라칸이 열쇠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씩씩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용법이 틀린 것 아니냐? 아니면, 피콘 님이 뭔가 잘못 알려줬거나.”
“둘 다 아니야. 저번에도 말했잖냐, 솔더렛이 이런 거 많이 만들었었다고. 피콘이 잘못 알려줬을 리도 없다. 여긴 분명 테마르가 묻혔던 곳이야. 느낌이 온다.”
“그럼 왜 안 되는데?”
후우웅……!
별안간 무라칸이 본모습으로 변신하자 진이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탁 트인 평원, 무라칸을 숨겨줄 것이 전혀 없었다.
“기껏 홀라 산맥에서부터 돌아왔는데, 누가 보면 말짱 황이다. 왜 갑자기 변신을.”
[아무래도 이 열쇠, 영기를 보통 먹어야 발동하는 장치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인간 모습으로 가용할 수 있는 영기는 다 때려 박았다.]진이 흠칫하며 무라칸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대체 얼마나 많은 영기가 필요한 물건이야?”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근처나 둘러보고 있어. 혹시 암흑마법회 잔당 같은 놈들 지나가면 그냥 싹 죽여 버리고.]“없다고, 그런 거.”
충격적이게도.
열쇠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무려 여덟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다행히 무라칸이 바올라이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자그마한 사물과 씨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욱, 후우, 후……!
무라칸이 마지막 남은 영기를 짜낸 순간.
돌연 무라칸의 손톱 끝에 붙어있던 열쇠가 서서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끝난 거냐? 드디어?”
무라칸이 인간으로 변신하며 진의 옆에 섰다.
적잖이 지친 기색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안색이 창백했다.
하늘로 솟구치던 열쇠가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마치 영기 해방이 펼쳐진 것처럼.
실제로 사위를 검게 물들인 것은 열쇠로부터 방출된 영기였다.
열쇠에서 나온 영기가 드넓은 바올라이 전체를 반구 형태로 모조리 감싸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보다, 이렇게까지 규모가 크면 누구에게든 노출될 수도 있겠는데.’
무라칸도 이런 건 처음 보는 눈치.
애써 홀라 산맥에서부터 돌아온 게 헛수고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찰나.
바올라이를 뒤덮은 영기의 반구가 서서히 작아지는 게 느껴졌다.
꼭 어떤 거대한 누군가가, 바깥에서 반구를 손으로 쥐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작아지는 반구의 경계선이 곧 진과 무라칸에게 닿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반구가 하나의 점이 되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바올라이는 이전과 같이 언덕에 푸르른 풀이 가득한 풍경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곳에 서 있던 진과 무라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영기로 이루어진 아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하, 어쩐지 영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 싶었다. 아공간이라…….”
무라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은 갑작스런 공간 이동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어둑한, 그러나 끝이 짐작되지 않을 만큼 드넓은 공간.
이 황량한 풍경이 테마르 룬칸델의 첫 번째 무덤이었다.
“솔더렛이 이렇게까지 숨겨놓았는데, 지플 새끼들이 여길 찾아서 헤집었었다는 말이지.”
무라칸이 분노를 다스리며 고개를 저었다.
“영기로 꽃 한 송이만 만들어, 꼬마.”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영기로 형태를 빚는 것일 뿐이니, 어렵진 않았다.
진이 영기로 조화弔花를 빚어 땅에 내려두었다.
“그 녀석 시체는 여기 없지만, 그래도 꽃 한 송이는 놔줘야지.”
조화를 내려두고 잠시 묵념했다.
무라칸은 친구로서, 진은 후손으로서 조의를 표한 것이다.
“꼬마.”
“어.”
“고맙다.”
묵념이 끝나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영기의 조화를 부드럽게 지우고 무심히 흘러갔다.
“신입 대장장이의 신, 피콘 민체가 여기서 테마르의 의지였던 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맞아. 브라다만테를 강화하려면 이곳에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이 무라칸이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거든. 테마르의 첫 번째 무덤이 어떤 형태일지, 이미 다 털렸을 텐데 대체 무엇이 남아있을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짐작 가는 게 별로 없더라고.”
“그런데?”
“이 아공간을 보니까 확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무라칸이 잠시 말을 끊었다. 불길한 기분에 휩싸인 것이다.
진은 그사이 피콘 민체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안즈 대평원에 바올라이라는 지역이 있다. 안즈 대평원의 중심부지. 그곳에서 이 열쇠에 영기를 주입해라. 그러면 그의 첫 번째 무덤이 드러날 것이다.]
-주의 사항은 없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지 말라고 하더군. 솔더렛이 네게 전해주라던 말이야.]
-다른 말은요?
-[없었다. 무운을 빌어주마, 진 룬칸델.]
무운을 빌어주마.
진도 그 대목이 마음에 걸렸었다.
왜 ‘의지’를 마주하는데 무운이 필요할까, 선뜻 납득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꼬마, 내 생각엔 수호자야. 이 무덤엔 아직 수호자가 있다.”
“수호자?”
“그래. 무덤을 지키는. 그리고 솔더렛이 굳이 영기를 이만큼이나 쏟아 부어야 작동하는 열쇠를 만들었다는 건, 최소한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이곳을 찾아오라는 뜻이었을 거다.”
피콘에게 그런 얘긴 듣지 못했다.
그리고 피콘 또한 솔더렛에게 그런 사항은 전해들은 바가 없었다.
어차피, 충분한 영기를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열쇠가 작동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열쇠를 작동시킨 장본인은 진이 아니라 무라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무라칸은 그것 때문에 영기를 죄다 사용해버렸다.
“……무라칸. 네가 보기에 내가 가진 영기로도 열쇠를 작동시킬 수 있었을 것 같냐?”
“어림없지. 이 무라칸 님이 무려 여덟 시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퍼부어서 겨우 작동시킨 건데. 네 7성 영기로는 무리다.”
“그럼 난 사실 이곳에 올 자격이 부족했다는 거네? 그 수호자인지 뭔지가 튀어나와도, 넌 영기가 다 바닥났으니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렇지……. 뭐,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 어쩌면 수호자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는 거고. 조금 있으면 뭐든 결과가 나올 테지.”
무라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솔더렛의 계약자가 테마르를 위로하러 왔는가…….]저 멀리서부터 웅혼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라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즉시 알아보고 이마를 짚었다. 천 년 전엔 매일같이 듣던 목소리였으니까.
“이건, 실더레이 녀석의 목소리잖아……!”
실더레이 지제크.
그는 테마르가 ‘룬칸델’이라는 가문을 일으킬 때,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플에 의해 그 역사와 전설이 모두 지워진, 비운의 기사.
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건 바로 실더레이 지제크의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