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66)
제 333화
111화. 흔적(7)
한참이 지났고, 계속해서 발레리아에게서 열기가 뿜어졌다.
이제 그녀의 머리칼엔 염색의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땀에 젖은 로브에서 뜨거운 김이 치솟았는데, 마력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이 꼭 한 덩이의 불꽃처럼 보였다.
[히스터의 핏줄이로구나. 저 아이를 어디서 만났느냐?]“무법도시 마미트에서 만났습니다.”
자세한 경위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쉴라는 더 궁금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쉴라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다행히, 네가 지켜주지 않아도 될 만큼 강인한 아이로군. 하지만 인간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결국 서로를 지키며 살아야만 하지. 혼자서 살 수 있는 생명은 없다.]갑작스러운 이야기였으나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쉴라의 말이 싫지 않았다.
[나의 벗과 네 벗이 고생하는 동안, 우린 변수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좋겠구나.]“지플의 마법사들이 찾아오는 것 말고, 달리 염두에 두신 문제가 더 있습니까?”
[이곳은 비먼트의 땅이다. 내 동족들 중 누군가는 그들과도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하긴, 쪼개진 절대 권력의 파편이 마일라 한 사람에게만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군요. 비먼트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너희 룬칸델에게 붙은 동족도 존재할 수 있다.]“그것만은 아니길 바라야겠군요. 이미 두 세력을 함께 상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말이죠. 일단은, 지플과 비먼트는 확실히 마주칠 것이라 상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비먼트는 테마르의 육신을 찾고 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진이 말했다.
‘요정족 후예 중 비먼트와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은 10할에 가깝다.’
카시미르가 어릴 적 우연히 들었다는 전대 황제와 대신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이 완타라모 숲과의 협상을 운운했던 게 어쩌면 내통자에 대한 내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비먼트가 테마르의 육신을 찾기 시작한 것도…… 애초에 요정족 후예 내통자가 그의 무덤에 대한 정보를 흘렸기 때문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룬칸델조차 시론과 로사, 그리고 주축 원로 몇을 제외하면(이조차 추측이다)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테마르의 무덤을 비먼트가 찾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먼트는 특임대나 친위대를 보낼 겁니다. 대규모 병력 이동은 외부에 완타라모 숲에 뭔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아는 얼굴을 마주칠지도 모르겠군.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특임대와 친위대. 그들은 너보다 강한가?]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대장급들은 저보다 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하는 제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비 기수 시절 직접 만나본 바 있는 특임조장 라츠와, 전직 조장이었던 알리사를 기준으로 유추한 것이었다.
[대장급이 몇이나 되지?]“넷입니다. 그들 모두가 몰려올 일은 없고요.”
친위대장, 부대장, 특임대장, 부대장. 그 넷이 한꺼번에 온다면 진이 아니라 루나라 할지라도 버거울 것이다.
“쉴라 님께서는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갖고 계십니까?”
요정족 후예의 왕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꼭 미리 알아둬야 할 문제였다. 아군의 전력을 파악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지플과 비먼트뿐만이 아니라, 네 번째 무덤의 수호자와도 전투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수호자, 지플, 비먼트.
어느 쪽과 먼저 싸우든, 마지막 상대와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충분한 체력을 남겨둬야 했다.
물론, 세 번째 무덤처럼 수호자가 없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보다 나쁜 경우의 수를 가정할 필요가 있었다.
[글쎄, 싸움이란 것을 해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군. 아주 약하지는 않다고만 알아두어라.]“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순 없는 겁니까?”
그러자 고민스러운 듯, 쉴라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정말로 잘 모르겠는데. 나는 동족들이 침입자를 죽일 때에도 힘을 쓴 적이 거의 없느니라.]“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쉴라는 없는 셈 치고 싸워야 할 것 같았다. 문득 무라칸을 데려오지 않은 게 아쉬운 진이었다.
그를 두고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벨롭의 위장 임무를 보조하게 만들려는 의도(행여 회의 직후 벨롭이 대신 임무를 수행하던 게 밝혀지면 문제가 정말 커질 수 있었다), 둘째는 발레리아가 아직 무라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이유였다.
비록 전보다 나은 협력 관계가 되었으나 아직은 막강한 동료를 대동한 채 발레리아를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애써 조금은 느슨하게 만든 그녀의 경계심을 다시 자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일 상황이 버겁게 흘러간다면 삼파전 구도를 만들어야겠군.’
대략적인 그림은 그렸으나 변수가 너무 많았다.
적들 중 누굴 먼저 마주치게 될지, 그들을 정리하지 않고 무덤을 우선 찾아가는 게 맞는지, 그랬다가 위치만 알려주고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곤란해지는데…….
고민하는 와중, 쉴라가 입을 열었다.
[진 룬칸델.]“예.”
[한 가지 말해줄 것이 있는데, 전투는 반드시 숲이 재생 불가할 정도로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완타라모 숲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의 ‘공공재’였다. 그들 모두가 가왕주의 수요자들이기 때문.
괜히 진과 동료들이 지금껏 완타라모 숲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건 완타라모 숲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권력의 정점들이 철저히 감춰온 결과물이었다.
만일 숲이 훼손된다면, 정점들은 반드시 잘잘못을 따지고 그 책임이 가장 큰 쪽에게 합당한 배상을 받아낼 것이다.
씨익.
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각개격파든, 삼파전이든. 압도적으로 내가 유리하다.’
파괴에 제약이 있는 난전.
영기라는 힘의 특성상, 그보다 진이 더 활약할 수 있는 구도는 없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오히려 그쪽이 더 낫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천 년이 지나도 네 선조의 영향력은 세계를 들썩이게 만드는구나.]“제 선조를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자세히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지난 무덤들을 돌아보았으니 알고 있을 테지만, 그 시절의 룬칸델은 거의 잊혔으니 말이다. 다만 그때도 테마르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에 방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건 분명히 기억나는군.]쉴라가 진과 눈을 맞췄다.
[이제는 네가 그의 그림자를 대신해야 할 테지. 아니면 세상에 진 룬칸델이라는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거나.]묘인족들과 발레리아가 작업을 끝낸 것은 그때였다.
[후아!] [끝냈다……!]한 시간 삼십 분.
묘인족은 자신들이 그 안에 붉은 호수로 이어지는 통로와 지플을 교란할 함정 통로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들이 만든 열댓 개의 보랏빛 입구들이 동굴 벽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만 붉은 호수로 이어지는 진짜 통로고, 나머진 숲 한가운데로 빠져나가는 가짜였다.
[입구는 사용할 때마다 위치가 마구잡이로 바뀌어. 지플의 마법사들이 억세게 운 좋고 머리 나쁜 놈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한 번에 정답을 맞힐 순 없을 거야.]선택해야 하는 열댓 개의 문이 있다면 나눠서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루의 말대로 어마어마하게 머리가 나쁜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찰방!
진이 발레리아에게 수통을 건넸다. 그녀는 목이 바싹 타는 듯 수통을 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켜는 모습이었다.
“진 룬칸델, 잠깐만 마력을 가다듬고 출발하도록 하지. 그 정도 여유는 번 것 같으니까.”
다시 정좌해서 마력을 안정시키는 발레리아를 보며, 루루와 미루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쟤 덕분에 신물도 아꼈어.] [절반을 남길 수 있었지!]루루와 미루가 반쪽 남은 고양이 신의 발톱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휘청!
일어선 발레리아가 주춤하자 진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은 거냐?”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이다.”
묘인족의 신물 절반을 지켜주려고 생각보다 무리했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발레리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처음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 것은 효율의 문제였으나, 묘인족을 위해 필요 이상의 힘을 사용한 건 그저 충동이었다.
“십 분쯤은 더 쉬어도 돼.”
“그럴 필요 없어. 내 몸은 내가 알아. 오면서 했던 약속이나 지켜.”
묘인족을 돕겠다고 나설 때와 달리, 다소 날이 선 말투.
발레리아는 자신이 진을 만난 후 이상하게 무뎌지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저번에는 기록 장치를 요정족의 은신처에서 얻었다고 말하더니…… 사실 룬칸델 초대 가주의 무덤이었다고?
-요정족의 은신처에 룬칸델 초대 가주의 무덤이 있던 것이지.
-말장난을 하는군.
-우린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 피차일반이지 않나? 너 역시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많을 텐데. 아니, 나와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걸 감추고 있겠지. 테마르의 무덤까지 이야기했으니 내 비밀은 거의 끝이다.
-뭐, 좋아. 날 속였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어. 테마르의 무덤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네가 조슈아 룬칸델의 별장에서 헬루람의 영기 구슬을 얻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알겠네.
-네가 그 영기 구슬을 살펴보고 날 오해했을 때가 더 당황스러웠다.
-어쨌거나 묘인족에게서 테마르의 네 번째 무덤에 대한 단서를 들어야 한다는 말이지…… 차후 네 번째 무덤을 발견하면, 나도 살펴볼 수 있게 해줘. 가능한가?
-그렇게 해라. 약속하지.
발레리아가 완타라모 숲으로 오며 진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가 말한 약속은 테마르의 무덤에 함께 입장하는 것을 뜻했다.
‘진 룬칸델과 그런 대화를 나눈 게 고작 몇 시간 전이건만, 설마 이렇게 빠르게 네 번째 무덤을 찾게 될 줄은 몰랐군. 묘인족을 구해 그들에게 단서를 듣고, 최소 몇 달은 필요할 줄 알았는데.’
그 무덤에서 선조들의 새로운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이 혼자.
선조들이 남긴 메시지를 추적하고 히스터의 마법을 되찾는 일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독한 일이었다.
언제부턴가는 그게 고독한 줄도 몰랐다. 그저 눈을 뜨면 마법을 수련하고, 선조들의 메시지와 유산을 찾아 세계를 떠도는 게 발레리아라는 인간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스스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인해 히스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게 되고, 선조들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기까지 한다면.
지난날의 어둡고 시린 시간들은 헛된 발버둥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에 말투가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진 것이다.
“……내가 조금 예민했다.”
“힘들었나 보군. 기분 안 나빴으니, 사과할 필요 없어.”
발레리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통로로 진입해야 한다. 붉은 호수에 다다를 때까지, 부축을 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이것도 싫으면 말하고.”
진이 발레리아에게서 수통을 받아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