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73)
제 333화
113화. 테마르의 네 번째 무덤(1)
믿음 때문이었다.
언니 르엣이 왕으로서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그 믿음이, 쉴이 칼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쉴이 떨어진 칼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르엣의 목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쉴을 따라온 요정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내려두었다. 모두 쉴에게 잔뜩 실망한 분위기였다.
쉴, 내 동생아.
쉴은 대답 없이 떨어진 칼만 바라보았다.
당장은 내가 어떻게 설명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지. 하지만 언젠가는 내 선택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만 돌아가거라.
돌아서는 쉴.
그녀가 뒤돌아 떠나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요정들도 걸음을 옮겼다.
하아.
쉴과 동족들이 떠난 숲 저편을 보며 르엣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란한 마음과 더불어 안도감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안도감이 든 건, 동생과 동족들의 칼에 찔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요정들의 문화란 참으로 귀엽군요. 왕을 죽이겠다며 칼을 뽑아놓곤, 말 몇 마디에 그냥 돌아가는 모양새라니…… 후후.
르엣의 뒤쪽에 있는 숲의 어둠에서부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후드를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검은 로브에 룬칸델의 흑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로키아.
르엣이 뒤돌아보며 그자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아 가네스토.
그녀는 룬칸델의 십대기사였고, 순수 마법만으론 룬칸델의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이었다.
룬칸델에선, 아니. 인간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다행이로군요. 진짜로 당신을 해하려고 했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였을 테니.
로키아가 그렇게 말하며 키득 웃음을 흘리자 르엣의 미간이 좁혀졌다.
재미있나요? 이 상황이.
네, 재밌고 귀여워요. 어린애들 전쟁놀이를 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뭐, 칼이 목에 닿았는데도 멈추지 않던 르엣 님은 좀 멋있었죠. 아니, 그만큼 날 믿기 때문이었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목에 닿은 칼날이 손톱 반만큼만 더 들어왔어도 곧장 몰살할 계획이었어요. 나도 나름대로 참은 건데, 죽였다면 르엣 님의 미움을 샀겠죠.
로키아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르엣 님의 미움을 사는 게, 우리 가주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 낫거든. 앞으론 가주와 상의 없이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만약 내가 당신의 호위를 자처하지 않았다면…….
난 호위를 부탁한 적이 없어요.
그게 문제라는 거지. 그래서 눈치 좋은 내가 잘 따라온 거고요. 아무튼 내 호위가 없었고, 도망간 요정들이 당신을 정말 찔렀다면, 그래서 가주가 분노했다면. 반역자들 일부 죽는 정도로는 안 끝났을 거예요.
테마르는 좋은 사람입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자신의 사람을 잃고도 계속 좋은 사람일까요? 룬칸델의 가주가 그런 호구 머저리일 리는 없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방금 요정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게 맞아요. 당신 동생의 말대로.
르엣은 할 말이 없었다.
로키아는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헝클어댔다.
돌아갑시다. 아, 그리고 오늘부로 당신은 우리 룬칸델의 집사장입니다. 당신께 그 사실을 알리라는 가주의 명이 있었어요.
* * *
그날 이후 쉴과 그녀를 따르는 요정들은 태초의 숲을 떠났다.
그리고 잊혔다.
797년 3월 4일 요정족 다섯 사람이 잊힌 걸 시작으로, 채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정의 존재가 잊혔다.
룬칸델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잊혔다 할지라도 형체는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으나,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검고 기이한 형체.
잊힌 요정들은 타인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인파 가득한 대도시 한복판을 떼 지어 걸어도, 온갖 야생동물이 있는 숲을 지나쳐도.
망령같이 변해버린 요정들에게 관심을 주는 존재는 없었다.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가는 바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쉴과 그를 따르는 잊힌 요정들이 몰려다니는 건 일종의 본능일 뿐,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잊히지 않은 존재들의 말소리나 문자를 듣고, 읽고, 기억하는 행위도 불가능했다.
감정을 느끼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잊힌 요정들은 눈에 보이는 검은 공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로 공허하게 흐르는 시간 속을 유영하고만 있었다.
잊힌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세상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으며,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이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을 터.
요정들을 비롯해, 지플의 힘에 짓밟힌 이들은 그토록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와중.
쉴과 요정들은 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목소리를 듣는다…….
잊히기 전엔 하나도 특별할 것 없던 그 지극히 당연한 현상은, 처음으로 잊힌 요정들의 두 눈이 뜨이게 만들었다.
눈이 뜨이고, 어둡게 변한 제 모습을 보고, 의식이 돌아오고, 자신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이해하고, 급격히 치솟은 절망감에 몸서리를 치고.
이 모든 것을 선사해준, ‘오’라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러자 쉴과 요정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림자처럼 검게 변해버린 자신들보다도 더 어둡고 거대한, 한 여인이었다.
고아들이 잔뜩 있잖아.
그 여인은 아주 흥미로운 듯 요정들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요정들은 그녀가 웃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나.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헬루람…….
쉴이 말했다.
잊히기 전, 요정으로서 기록이라는 의무를 행하던 중 알게 된 마녀의 이름.
그러자 헬루람이 흡족한 듯 웃음을 흘렸다. 하하, 웃음이 이어지는 동안 쉴과 요정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잊힌 요정들이 그런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세상에 수많은 대재앙을 몰고 온 전설 속의 마녀라 할지라도.
어쩌다 그런 꼴이 되었니?
지플이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웠다.
억울하니?
억울하다.
왜?
그야…… 우린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쉴은 그렇게 대답하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부끄러움인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했고, 이내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언니를 배신했고, 언니를 따라 지플에 맞서 싸우는 동족들을 외면했던 것.
그 사실을 마주하자 숨이 막혔다. 차라리 잊힌 채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게 나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헬루람은 그런 쉴의 내면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쉴과 요정들이 잊힌 전말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비웃을 가치조차 없는 대답이로구나.
그토록 모욕적인 말에도 쉴과 요정들은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저 잘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든 헬루람에게 잘 보여서 다시 세상에 존재하고 싶었다.
왕과 동족을 배반했다는 수치심과 자괴감 같은 것은, 다시 존재할 수만 있다면 결국 망각하게 될 테니까.
후회하니?
쉴과 요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은 아무런 죄가 없다더니, 이제는 후회된다는 말을 하는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생겼는데 말이야.
무엇이지?
분명, 반드시. 비슷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너희처럼 뻔뻔한 것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헬루람이 쉴과 눈을 맞췄다.
그녀의 손에서 마력과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기, 그림자와 그의 계약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힘.
마력과 영기가 뒤섞이며 수십 갈래의 띠를 이루어 요정들을 감쌌다.
어, 엇……!
띠에 감긴 요정들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검게 변했던 몸이 다시 본래의 빛깔을 되찾았고, 요정족 특유의 붉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쉴과 요정들은 서로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꼭 수백만 년 만에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막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요정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또 한 번 변하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이건, 대체. 안 돼!
이럴 수는!
요정들의 몸이 쪼그라지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은 병 걸린 짐승의 털처럼 무참히 빠져나갔고, 조화롭게 빚어진 얼굴은 괴물처럼 흉측하게 변해버렸다.
팔다리는 기괴하게 뒤틀렸고 목에선 쇳소리가 났다.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추해질 수 없어, 역병 걸려 썩어 문드러진 시체처럼 보였다.
그때 잠시 변화가 멈췄다.
그게 너희의 본모습이다.
헬루람이 짧게 감상을 말하며 한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띠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요정들의 모습이 한 번 더 변화하기 시작했다.
몸이 어린애 머리통만 한 크기로 작아지고 등에 자그마한 날개가 돋아났다. 피링, 피리링, 날개가 움직일 땐 그런 앙증맞은 소리가 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요정들은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참 재밌어. 우린 죄가 없다, 후회된다. 그것도 모자라, 그저 다시 세상에 존재하고만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했던 녀석들이 굴욕감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도 느끼고 말이야.
우릴 어떻게 한 거야!
기회를 줬지. 다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헬루람이 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는 특별히 큰 한 쌍의 날개를 더 달아주었다.
이제부터 너는 저것들의 왕이다. 너희가 후회한다고 말했던, 그것과 비슷한 순간이 올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도록 하마.
후회되는 순간.
동족을 배신하고 지플에 맞서지 않았던 순간.
언젠가 그와 같은 상황이 또 온다면 쉴과 요정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헬루람이 궁금해졌다고 말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교훈을 잊지 않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
헬루람이 쉴을 놓아주며 뒷말을 이었다.
게다가 너흰 이제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해졌으니,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 가라.
요정들은 감히 헬루람을 쳐다볼 수 없었다. 가라, 헬루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요정들이 뒤돌아 날개를 파닥였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존재를 되찾고 세상을 떠돌았다.
완타라모 숲이라는 보금자리를 찾기까지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쯤 요정들은 자신들이 진짜 요정이던 때의 기억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헬루람의 힘을 빌려 다시 존재하게 된 것일 뿐, ‘자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잊은 것은 진짜 요정일 때의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쉴, 아니. 쉴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정들은 헬루람이 자신들에게 해준 일과 말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달리 목적도, 의미도, 희망도 없이 이어지는 삶은 그야말로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우연히 숲을 찾은 인간들을 죽이며 재미를 찾았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직 쉴라만이 그들의 왕으로서 미래를 고민했다.
쉴라의 고민이 끝난 것은, 한 인간이 완타라모 숲에 솔더렛의 전언을 전하러 온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