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44)
제 444화
128화. 제피린(1)
흑기사의 후드 바깥으로 왈칵 핏물이 쏟아졌다. 손톱에 담긴 독기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손톱에 당한 옆구리의 자상이 벌써 검게 물들고 있었다.
방심했다고는 하나 흑기사였다. 수많은 룬칸델 수호기사 중 오직 열 명에게만 허락된 검은 투구, 그는 중상을 입고도 즉시 반격을 해냈다.
그러나 로브 소매 사이로 삐져나온 클로는 제피린에게 닿지 못했다. 목을 노리고 휘둘렀으나 클로의 칼날은 허공에 궤적을 남겼다.
스아악! 재차 날아든 제피린의 손톱과 흑기사의 클로가 맞부딪혔다.
극독에 당한 육신이 평소 같지 않았다. 흑기사는 단 일 합에 뒷걸음질을 쳤고, 또 한 번 피를 토하며 거리를 벌렸다.
흑기사 혼자였다면 승부는 그 순간에 갈렸을 것이다. 이미 치명상을 입은 흑기사는 이후 이어질 제피린의 맹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진, 무라칸, 발카스 세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반응은 놀라울 만큼 빨랐으나 세 사람 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진은 무엇보다도 ‘흑기사’가 일격에 당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방심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나 누님이나 무명왕 정도의 능력, 혹은 흑기사를 상회하는 무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능력과 무력. 제피린은 둘 중 하나만 갖고 있을 수도, 둘 다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행이 감당하기에 그녀가 굉장히 버거운 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머, 룬칸델 흑기사라는 녀석들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이걸 피할 줄은 몰랐네요?”
흑기사는 벌써 새파랗게 변한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온몸에 퍼지고 있는 극독을 억누르느라 대답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제피린, 네놈! 설마 2대장을……!”
본래 흑기사를 데려오기로 한 2대장.
발카스는 가장 먼저 그를 비롯한 자신의 부하 단원들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제피린이 보여준 무력이라면 그들을 암살하고 찾아온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걱정.
발카스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자 제피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알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단장님은 죽는다고. 그간 쌓은 정이 있어 편히 보내주려고 했는데,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고통스럽게 죽이는 수가 있다구요?”
그 말에 무라칸이 코웃음을 쳤다.
“퀴칸텔 녀석이 정확히 봤었네. 야, 야. 이 악마룡 새끼야,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먼저 정체를 밝혀줘서 고맙다.”
후우웅……!
무라칸이 본모습으로 변신하자 드넓은 응접실 사방에 짙은 영기가 깔렸다.
[지금 이렇게 까부는 이유야 뻔히 그 론텔기우스의 마족 놈 때문일 것 같고…… 그래, 이 무라칸이 있는 걸 알고도 덤비는 것도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테지?]과거, 마족 사회가 인세에서 사라지기 전. 무라칸은 동족을 배신한 수많은 악마룡들과도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강력하기로 유명한 악마룡들을 상대로 언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당시 4대 공작가의 최고 악마룡들조차 무라칸과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을 지경이었다.
무라칸의 무명은 인세에서만 드높은 게 아니었다. 마족 사회에서도 그 이름은 하늘의 절대자로 통했다.
다만, 무라칸이 알고 있던 강력한 악마룡 중에 ‘제피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인물은 없었다.
‘기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겪어본 적 없는 녀석인가. 흠, 당시 웬만큼 이름 드높았던 악마룡 놈들도 한 번씩은 다 나한테 두들겨 맞은 것 같은데.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지?’
얼른 판단이 되질 않았다.
찬찬히 고개를 돌려 진과 무라칸을 쳐다보는 제피린.
“하하, 여전히 오만하시네요. 무라칸 님은.”
[날 아는 듯 말하는군. 난 너 같은 걸 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기억이라…… 그럴 수 있죠. 세상에 당신을 모르는 용이 있을까요? 인세의 푸르고 아름다운 하늘을 지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용이 바로 당신이었으니.”
[그렇기에 나의 태도는 오만이 아니라 진실이다. 진명을 밝혀라.]“당신은 단장님과 달리 죽이진 않을 거예요. 대신 또 한 번 심장이 부서진 채 깊은 잠에 빠져야 할 겁니다. 일어나면, 또 한 번 당신은 당신이 알던 것과 다른 세상을 보아야 할 거예요.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지이이잇-!
별안간 제피린의 손아귀에서 보랏빛 기운이 퍼졌다.
‘마력? 아니, 다르다. 죽은 론텔기우스의 마족이 영문 모를 마법을 펼쳤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깊고 어두워.’
진이 퍼지는 보랏빛 기운에 반응하며 생각했다.
제피린이 펼친 것은 마력이 아닌 마기였다. 무라칸조차 흠칫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마기는 순식간에 응접실 전체를 감쌌는데, 진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일종의 ‘아공간’을 형성하는 중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마기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진과 발카스가 제피린에게 달려들었다.
보랏빛 어둠 속에서 시그문드의 창백한 칼날과 뇌기가 번뜩였고, 발카스의 주먹에 둘러진 묵직한 오러가 일렁였다.
발카스는 3대 용병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격투가’로 분류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쩌엉-!
발카스가 내지른 주먹을 제피린은 등에 메고 있던 도끼검을 휘둘러 맞받아치는 모습이었다.
주먹과 도끼검이 닿자마자 충격파가 번졌는데, 마기가 공간을 잠식하지 않았다면 그 일격에 응접실 내부는 대부분 박살이 났을 터였다.
마기에 뒤덮인 아공간은 응접실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공허한 공간처럼 보였다.
그 틈에 진은 제피린의 측면으로 칼날을 밀어 넣었으나, 제피린은 도끼검을 꺾어 그것까지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진과 발카스 두 사람 다 팔목을 타고 전해지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제피린이 가볍게 휘두른 듯 보이는 도끼검에 룬칸델의 축복받은 육체와 10성 무인의 강체가 모두 고통과 충격을 받은 것이다.
화아아악!
두 사람이 공격 이후 자연스레 보법을 밟자마자 무라칸이 시커먼 영기 숨결을 토해냈다. 작은 성채 정도는 일격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숨결이나, 제피린은 그조차 가볍게 양단하고 있었다.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얼굴이었다.
“듣던 대로 숨결이 따뜻하시네요, 무라칸 님.”
무라칸은 대답하지 않고 양 날개에 영기를 형성해 검은 송곳들을 쏘았다.
진과 발카스는 기예를 부리듯 그 송곳들 사이를 오가며 한 번씩 제피린을 공격하는 모습.
현란하게 움직이는 도끼검을 보고 있으니 흡사 루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과 발카스, 그리고 무라칸의 공격을 다 받아내면서도 제피린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강적 중의 강적.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도끼검을 휘두르는 제피린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
콰직! 크드득! 차앙-!
두 자루의 검과 주먹, 영기가 뒤섞여 어둑한 공간을 어지러이 물들였다.
싸움은 언뜻 호각세처럼 보였다.
‘정말 호각세라 할지라도 불리한 건 우리다.’
일행의 등 뒤에는 죽어가는 흑기사가 있었다.
물론 그는 조슈아의 사람이며, 조슈아가 진을 방해하기 위해 흑왕산채로 보낸 것이나. 흑기사는 분명 룬칸델의 최고 전력 중 한 사람이었다.
흑기사를 이토록 허망하게 잃는 건 곧 가문의 전력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아주 엄밀한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정확히 조슈아의 사람이 아니라 ‘차기 가주’의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당장 성왕과 그의 치유사들, 혹은 쿠잔 수준의 독술사의 치료가 필요하다.’
10성의 강체가 아니었다면 손톱에 찔린 순간 이미 죽음은 확정이었다.
만독주가 있는 진조차 본능적으로 완전 면역일 수 없다고 느낄 만큼 끔찍한 독이었다.
과연 흑기사가 얼마나 버텨줄까. 부들부들 떨며 피거품을 쏟아내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긴 시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속도를 높였다. 흑왕단장 역시 자신의 땅에서 흑기사가 죽어나가는 건 문제가 커질 수 있으므로 극도로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듣긴 뭘 들어, 그때 내게 대든 악마룡들 중 내가 숨결까지 꺼내야 했던 놈들은 죄다 뒤졌는데.]“그건 그래요. 하지만 제가 다른 평범한 용들하고 친구였을 수도 있잖아요? 어쨌거나, 한때는 오만이었겠지만. 약해진 지금은 그저 왕년을 못 잊은 노인네 같아요. 검황성에서 보여준 것처럼, 제대로 싸우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자 무라칸이 다시 코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그때는 인간 놈들 지키느라 마음대로 못 싸웠지. 바라는 대로 보내주마, 지옥으로.]“오오, 기대되는걸요!”
도끼검에서 뻗어진 마기를 머금은 검기가 사방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헤집었다.
무라칸이 펼친 영기의 장막이 찢겨나갔고, 진과 발카스는 정신없이 보법을 밟으며 검기를 쏘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검기이지만, 그때쯤.
진 일행은 제피린의 검술이 묘하게 엉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 위력은 살벌한데, 어째서인지 검술이 묘하게 부자연스러워.’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움직이는 것 같군.’
막고, 휘두르는 건 잘하지만 검이 움직이는 결이 깔끔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진과 발카스가 경지에 이른 무인이니 보이는 것이지, 어지간한 8성 이하 무인은 그 느낌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불현듯, 불쾌하고 불안한 느낌이 일행의 뇌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설마, 도끼검이 주 무장이 아닌 건가……!’
처음엔 정신없이 공방을 섞느라, 또한 육체 능력이 심히 뛰어나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제피린이 매우 엉성한 ‘도끼검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은 곧 확신으로 변했고, 오소소, 등허리와 팔뚝에 굵직한 소름이 돋았다.
세 사람 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긴 했으나 제피린은 그 속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말했다.
“음, 재미있어 보이기도 하고. 좀 궁금하기도 해서 한 번 써봤는데 말이죠…… 역시, 영 허접한가요? 하하.”
인간인 척 행세할 때 그랬듯.
제피린은 태어나 단 한 번도 도끼검을 제대로 익힌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호 대상 중 한 사람을 벤 무기가 과연 어떤 것인지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부웅, 훙!
제피린이 장난스레 도끼검을 허공에 돌렸다.
그리곤 흥미가 꺼졌다는 듯, 이걸로는 너흴 다 손쉽게 죽이기 어렵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도끼검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떨어진 도끼검이 묵직한 소음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걸로 무라칸 님의 심장을 박살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조금은 경의를 담아서 잠에 빠뜨려주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