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9)
제 55화
19화. 연회(5)
‘하긴, 룬칸델의 연회에 비궁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리 없지.’
어느 정도는 예상한 만남이다.
진은 몇 초쯤 시리스를 쳐다보다가 차분히 그녀의 빈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비궁주의 따님이시군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진이 은근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잔을 들이켰다.
-너 같은 녀석이 나처럼 대단한 사람한테 어떻게 은혜를 갚겠니? 그냥 좋은 추억거리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가끔 생각나면 비궁 쪽으로 인사나 한 번씩 하고. 그럼 안녕!
마미트에서 시리스가 했던 말이다.
당시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진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달빛우물 테러 용의 선상에서 곧장 제외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친히 정강이에 치유 송진까지 발라 주었다.
전생에서 소문으로만 접해 본 시리스와는 아주 다른 모습.
그래도 특별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그저 강자의 변덕이었겠지.’
진은 그때의 시리스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시리스가 진짜로 진보다 우위에 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열다섯이면 저와 동갑인데, 어찌 그렇게 빠른 성취를 이뤘는지 무척 부럽군요. 룬칸델의 축복받은 육체가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한껏 부러운 듯 말하는 시리스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다. 그녀 역시 이미 4성 중반, 꽤나 미친 속도로 크고 있는 천재였다.
“저 또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비궁의 혈통 또한 대단한 축복이지요. 비궁주께서 그대를 얼마나 아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요.”
“예, 저는 그대와 달리 독녀인지라 특히 애정을 받는 입장이죠. 아, 이렇게 말하면 혹시 실례가 될까요?”
한층 눈빛을 누그러뜨린 시리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자연스레 흔들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막내라는 사실이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요, 뭐. 저야말로 시리스 님이 부럽습니다. 형제가 많다는 건 때로 피곤하거든요.”
“어머, 그런 이야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보는 눈, 듣는 귀가 이토록 많은데. 차후 형제분들이 그대를 추궁하면 어쩌려고요?”
“투정 부리기는 막내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하하, 아무튼.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비궁에 가 보고 싶군요. 지금부터 시리스 님과 열심히 친분을 쌓는다면 마냥 꿈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하, 검의 정원에서 지내는 분이 비궁을 궁금해 할 줄은…… 좋아요, 조만간 초대장을 보내 드리죠.”
진이 대답하려는 찰나 시리스가 술병을 내밀었다. 쪼르륵 흘러내리는 와인에 무심코 시선이 갔고, 몇 분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날 알아본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슬슬 그때 얘길 할 때가 되지 않았나?’
검댕 좀 묻혔다고 얼굴이 다 가려지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는 변조하지도 못했다. 진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봤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비궁의 후계쯤 되는 인물이 못 알아보면 그건 그것대로 실망스럽지.’
시리스가 불쑥 진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진 룬칸델 공자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군요.”
“예, 시리스 님, 말씀하세요.”
“그때 다친 정강이는 이제 괜찮나요?”
역시, 올 것이 왔다.
진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 괜찮습니다. 저 따위는 감히 은혜를 갚지도 못할 만큼 대단한 분께서 손수 송진을 발라 주신 덕분에.”
진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자 시리스의 미간이 좁혀진다.
“보기보다 얼굴이 두꺼우시네요, 공자. 그렇다면, 그때 그대가 왜 마미트의 달빛우물에 있던 건지 내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당시 제 수하, 비궁 7검의 류가 마법 테러범을 찾지 못했거든요. 저로서는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나중에서야 혹 내가 풀어 준 소년이 범인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답니다.”
드르륵.
시리스가 의자를 끌어 조금 더 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고작 한 뼘 정도의 틈을 두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마법이라, 보다시피 저는 룬칸델입니다. 제가 범인일 것 같나요? 태어나서 검을 쥐는 손으로 마법사들의 지팡이 따윈 잡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물론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그때 마미트에서 룬칸델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겠죠. 그리고 임무가 버거워서 다른 마법사를 고용한 것일지도 모르고요.”
까득, 시리스가 이를 갈며 뒷말을 이었다.
“게다가 당시 달빛우물에 있던 사람 중 룬칸델이 암살로 처리할 만한 인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궁 단원들밖에 없습니다. 비궁 7검의 대장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지요.”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한껏 살의가 묻어나는 목소리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당시 그가 비궁 단원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아 마미트에 왔던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청하게도 비궁 단원을 습격한 장본인을 몰라본 채 선의를 베풀었고 말이다.
‘내가 비궁 단원을 쳤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알카로를 죽이려다 비궁 단원들에게도 피해를 입힐 뻔했으니, 반은 맞는 말이지.’
시리스의 생각을 읽은 진이 마저 능청을 떨었다.
“음, 우리 방금까지 분위기 꽤 좋았는데. 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시리스 님.”
“흥! 끝까지 오리발이로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어떤 고견을 갖고 계신지 여쭤도 될까요?”
“바로 공자를 결투장으로 끌고 가서 개 패듯 두들긴 다음! 그 가증스러운 낯짝에 침을 뱉어 주는 것이죠. 결투를 신청한다, 진 룬칸델.”
“세상에…….”
행여 시리스의 갑작스러운 상소리를 누가 들었을까, 진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시리스가 딱 붙어서 속삭인 덕분에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더 큰 소리로 말해 줘야 하나? 가자고. 그때 날 우롱한 대가를 받아야겠으니.”
이쯤 되면 결투는 피할 수 없다.
‘시리스 정도라면 지금 내 검술 실력을 확인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상대임은 분명한데.’
비궁주의 외동딸, 시리스 엔도르마. 나이에 비해 대단한 실력자임은 분명하나… 진은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시리스 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결투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설마 자신이 없는 것이냐?”
“아, 그게. 아버지께서 단단히 경고하셨거든요. 저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과는 결코 싸우지 말라고.”
똑!
시리스가 두 손가락으로 쥐고 있던 와인 잔의 얇은 목이 부러졌다. 이내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
“방금, 뭐라고, 했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 또한 시리스 님과 한번 겨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는 없어요.”
“이 개, 후……!”
핏발 선 눈으로 진을 노려보던 시리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녀는 냉정을 되찾은 것인지 부러진 유리잔을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날 놀리는 게 아주 재미있나 봐요, 진 공자. 그럼 나도 한번 당신을 놀려 볼까?”
돌연 시리스가 덥석 진의 손을 잡아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이제 꺅, 어딜 더듬어, 라고 소리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공자를 밀치면…….”
피식 웃음을 흘린 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야, 응해드리죠. 조용히 나갑시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보던 몇 사람은 단단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말세야, 말세. 메리, 막내가 쟤 허벅지에 손을… 게다가 키스까지 하는 것 같았다고. 요즘 애들은 눈만 맞으면 바로 저럴 수 있는 건가? 이런 미친, 저것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건너편 테이블에서 메리와 함께 포도주를 들이켜던 디푸스 룬칸델이 말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선 진이 시리스의 입을 틀어막은 게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널린 게 빈방인데 아무 데나 가겠지. 신경 꺼, 오라버니. 열다섯이면 다 컸어.”
“맙소사. 열다섯에 너도 저랬단 말이냐?”
“알아서 뭐 하게? 감당은 할 수 있고?”
“됐다…….”
“술이나 마셔. 비궁주 딸내미나 우리 막내나, 조금만 더 크면 연애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신세가 될 텐데.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아직 결투장은 한산했다.
싸움꾼과 구경꾼들은 자정이 지난 다음부터 몰려올 터. 진과 시리스가 이번 룬칸델 연회의 첫 번째 결투를 장식하는 셈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꺾어 버리는 건, 그녀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들이 결투장으로 들어서자 수호기사들이 검례를 올렸다.
“막내 도련님. 결투를 하러 오셨습니까?”
“그래. 의료진만 남고, 자네들은 잠시 나가 있게. 아, 쓸 만한 검 두 자루만 갖다 주고.”
“예. 두 분의 결투가 끝날 때까지 결투장은 봉쇄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치 좋은 수호기사가 그렇게 말하자, 진이 만족스러운 듯 끄덕였다.
“부탁하지.”
분위기를 읽은 의료진도 대기실로 몸을 숨겼다.
드넓은 원형 결투장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내 수호기사가 검을 가져왔고, 진은 시리스가 먼저 고르게 했다.
“더 손에 잘 맞는 걸로 고르시죠, 시리스 님.”
“진 룬칸델. 아직 평범한 5성 주제에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시리스는 비교해 보지도 않고 곧장 손에 잡히는 걸 골랐다.
검을 쥐고 자세를 고치자마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분노로 이글대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사선으로 겨눠진 검은 가벼운 떨림조차 없다.
‘소문으로만 듣던 비궁의 검술을 이렇게 경험하게 되는군.’
아직 평범한 5성.
시리스가 진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녀는 진이 아직 룬칸델의 각종 비기와 결전기를 전수받지 못한 걸 알고 있었다.
반면 시리스는 4성 중반이지만 비궁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녀가 명백히 자신보다 더 높은 성취의 진을 낮잡아 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를 약속해라.”
“뭡니까?”
“내가 이기면 당시 마미트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에 대해. 네놈은 하나도 남김없이 내게 알려라.”
“좋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제가 이기면 시리스 님이 그날 우연히 저를 본 건 없던 일이 되는 겁니다. 우린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되는 거죠.”
“켕기는 게 있긴 있나 보군. 들어와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이 거리를 좁혔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압박을 시작하려는 찰나.
파지짓-!
돌연 시리스의 검이 기묘한 냉기에 휘감겨 얼어붙었다.
비궁이 서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는 근원이자, 엔도르마 혈통의 상징과도 같은 힘.
‘만빙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