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4)
제 55화
20화. 세상 밖으로(1)
진은 꿈을 꾸고 있었다.
시커먼 촉수 괴물이 얼굴에 딱 달라붙어 도무지 떼어지질 않는 악몽이었다. 으으, 으으! 숨이 막히고 답답한 와중 낮은 신음이 겨우 토해졌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자마자, 진은 악몽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냥.
냥냥냥, 냥!
잠든 진의 얼굴을 깔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무라칸이었다. 벌써 무라칸은 30분이 넘도록 진의 얼굴에 올라타서 꾹꾹이를 하고 있었다.
“내려가, 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창틈으로 가득 햇살이 번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향긋한 차향이 났다. 길리가 곧잘 끓여 주는 홍차였다.
‘무라칸 때문에 악몽을 꾼 모양이지만… 막상 깨어나니 개운하군. 비슈켈과 결투를 끝내고 곧장 기절한 건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가슴팍의 절상과 여타 상처들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그가 기절한 사이 룬칸델 의료진이 솜씨를 부린 결과였다.
“깨어나셨군요, 도련님.”
인기척을 느낀 길리가 찻잔과 시원한 물을 챙겨 침대 맡으로 다가왔다.
“길리.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이틀입니다.”
“뭐? 이틀?”
살짝 놀라웠으나 이내 수긍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마지막 순간엔 일순 새로운 경지에 다다라 진력을 소모했다. 그걸 감안하면 일찍 깨어난 편이었다.
“연회는 이미 끝났겠군. 나 보려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인사도 못 한 모양새가 됐어.”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지난 이틀간 도련님과 비슈켈 경의 결투가 계속 회자되었거든요. 그것으로 충분한 답례가 되었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8성과 5성의 미스 매치였으나, 두 사람의 결투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마지막에 진이 보여준 ‘심검’ 때문이었다. 결코 완벽한 심검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8성 기사와의 대결에서 이변이 벌어질 뻔한 것 자체가 대사건이다.
비슈켈을 포함해 그 사실을 알아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특히 비슈켈은 충격이 심한 듯, 그날 이후 연회가 끝날 때까지 결투장을 다시 찾지 않을 정도였다.
‘그간 루나 누님께 지도받던 나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군. 처음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훈련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무슨 종교 의식처럼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말하던 루나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심검이 어떤 감각으로 이루어지는지는, 한창 청아석 훈련을 할 때 처음으로 인지했다. 이후 그 감각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 약간 조바심이 났었다.
‘지금은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나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수준인 것 같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심검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흔히 초고수라 불리는 8성 반열의 기사들에게나 허용된 경지니까.
진이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건진 게 많은 연회였어. 지플 내 베라딘의 위상을 확인했고, 비궁의 후계와 친분… 비슷한 것을 다졌다. 적어도 결투 이후에도 내게 호의적인 듯 보였으니까.’
게다가 부바르 가스톤을 두들겨 팼고, 그가 비슈켈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확이었다.
‘변신 범죄의 배후가 이블리아노가, 혹은 비슈켈 개인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비슈켈이 모종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그곳에서 부바르를 부리고 있는 위치라든가.’
여러 가정이 떠올랐지만 속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차차 뒤를 캐서 알아보아야했다.
또한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했다. 5년 전, 지플 추종자들을 변장시켜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죄를 추궁해야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찰나, 길리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화병을 가리켰다. 안개꽃과 비슷하지만 은은히 빛나고, 새하얀 꽃잎이 눈송이처럼 아롱진 꽃이었다.
“비궁의 후계께서 두고 간 꽃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도련님이 깨어나길 기다리다 돌아가셨죠.”
“응? 시리스 님이 두고 갔다고?”
“예. 그분은 도련님이 마음에 든 걸까요?”
“아니. 비궁 설화의 꽃말은 ‘끝나지 않는 싸움’이야. 나랑 한판 다시 붙고 싶나 보군. 이상한 집념이 있네, 그 사람도.”
길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여성분에게 처음으로 꽃을 받은 셈이로군요.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크하하, 처음으로 받은 꽃이 도전장이라니. 기념비적이야. 안 그런가, 딸기파이?”
무라칸이 과장되게 소리치며 길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길리 몰래 연회장으로 나간 일 때문에 눈치를 보는 중이다. 길리는 이틀째 무라칸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사정을 알아본 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무라칸은 어느새 다시 고양이로 변신해 두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나저나 도련님. 가주께서 깨어나면 즉시 찾아오라 명하셨습니다. 전에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격을 증명할 때가 온 것 같군요.”
기수 시험을 치르기 위한 자격. 진작부터 예상했지만, 막상 아버지의 명이 떨어지니 기분이 묘했다.
전생에선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던 일이 현실이 되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그래. 당분간 가문을 떠나게 되겠군.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영묘에 계십니다.”
“다녀올게.”
진의 형제들은 시론의 이런 부름을 받았을 때, 단정한 정복 차림에 머리를 빗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하지만 진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여행복을 골랐다. 그리고 허리춤에 브라다만테를 찬 채 복도를 걸었다.
영묘.
검의 정원 호정에 빼곡히 꽂힌 수천 자루의 검이 그 자체로 무덤이나 다름없지만. 영묘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업적을 이룬, 가문의 영웅들에게만 허락된 땅이다.
안뜰, 가장 깊숙한 지하였다.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운 내부에서 진한 쇠 냄새가 났다.
“왔느냐.”
실루엣처럼 보이는 시론의 뒷모습. 진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토록 편한 차림으로 내 부름에 응한 자식은 오랜만이야. 당분간 가문 밖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예감한 모양이지?”
“예, 곧장 떠날 생각입니다.”
시론은 진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감히 자신의 부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을 밝히는 모습.
다른 자식들에게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자신이 부르면 어려움과 두려움을 감추기 급급할 뿐……. 그나마 루나는 달랐으나, 그 아이는 제 손을 떠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진도 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생각해 일부러 이런 옷차림을 한 것이었다.
‘회귀 후, 어째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읽기 쉽단 말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생에선 가장 어려운 데다, 접점조차 별로 없던 인물이 바로 아버지다.
한동안 부자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영묘에 와 보는 것은 처음이더냐?”
시론이 먼저 운을 뗐다.
“예, 아버지.”
“정원이 가문을 빛낸 이들에게 허락된 자리라면, 영묘는 가문을 지킨 이들을 위해 마련된 땅이다.”
말 그대로였다.
룬칸델 천 년의 역사에 얼마나 무수한 위기가 있었겠는가. 사사로운 분열에서 멸문 직전에 이르기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싸움과 적들이 룬칸델을 위협해왔다.
그때마다 기어코 가문을 수호한 자들만이 이 영묘에 묻히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알고 있느냐. 초대 가주, 테마르 룬칸델. 그분은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
진은 테마르의 이름이 나온 순간 직감했다. 아버지가 솔더렛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예, 또한 검의 정원 어느 곳에도 그분을 위한 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테마르의 애검이었던 ‘바리사다’만이 가보로 내려올 뿐, 룬칸델엔 그를 기리는 예식조차 하나 없다.
“네가 지닌 그 어두운 힘. 그것이 바로 우리가 초대 가주를 기릴 수 없는 이유다. 영기를 펼쳐 보아라.”
진이 차분히 손바닥 위에 영기를 뭉쳤다.
초대 가주 테마르의 죽음 이후, 룬칸델은 지플과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다.
두 번 다시 마법을 사용하지 말 것.
또한 마법을 사용했던 선조들을 숭배하지 말 것.
‘유일한 마검사 가문’이었던 룬칸델이 기사 가문으로 전락하게 된 진짜 배경이다. 더 이상 지플의 신들로부터 룬칸델을 지켜 줄 솔더렛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맹약의 결과로 지플의 신들은 힘을 합쳐 룬칸델의 피에 저주를 내렸다.
테마르 이후 모든 룬칸델은,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
“네가 영기로 토나 형제를 때려눕힌 그때, 나는 그 힘을 얻게 된 경위를 묻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느냐?”
“예. 제가 영기를 가문을 위해 사용하겠다며 거짓말한 것도 기억납니다.”
“하하, 그래. 어렸으니 망정이지, 지금 그런 거짓말을 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진심이라는 걸 안다. 진은 그래서 함께 웃지 않았다.
“……솔더렛. 그분의 목소리는 들었느냐?”
“예, 들었습니다. 저를 계약자라고 부르시더군요.”
물론 회귀 후엔 한 번도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이제는 계약자라고 밝혀서 나쁠 게 없었다.
“네 형제들로서는 꽤나 불공평한 일일 수밖에 없겠구나.”
루나 이상의 잠재력을 타고난 것도 모자라, 오래전 가문을 떠난 신과도 계약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계약자가 될 수 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 힘을 이용해 형제들을 꺾고, 가문을 집어삼킬 수 있겠느냐?”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두었다.
“나가서 세상을 살펴보고, 룬칸델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것이 없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이 대답이 아버지를 무척 만족시키리라는 것도 예상한 바다. 역시나 시론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가문에 인정받기 위해 검의 정원을 떠났건만, 네놈은 오히려 가문을 인정할 구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셈이로구나.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크흐흐.”
시론이 오른 손바닥을 펴 진 앞에 내밀었다.
“5년을 주겠다. 그 안에 가문에 인정받든, 가문을 인정하든. 답을 내려서 돌아오너라. 기대하겠다.”
그밖에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스릉!
진이 브라다만테를 뽑아 검례를 올렸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5년 뒤에 뵙겠습니다, 아버지.”
영묘를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오자, 길리가 이미 떠날 채비를 끝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이라곤 작은 바구니 하나가 전부였고 그 안에는 무라칸과 약간의 건조 식량과 비전서 필사 노트들이 들어있었다.
길리의 손목과 발목에 쇠침이 딱 맞게 박혀 있다. 진의 시선이 닿자, 길리가 옷매무새를 고쳐 그것을 가렸다.
진의 기수 자격이 증명되기 전까지 오러 사용을 막아두기 위한 시술이었다.
“선배 유모들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힘을 잃으니 좀 어색하긴 하네요. 하하…….”
길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고 진은 가슴 한가운데가 콱 막혔다.
전통이었다. 행여 예비 기수들이 유모의 무력을 이용해 명성을 쌓으면 곤란하므로, 유모들의 무력을 봉인하는 것이다.
이후 룬칸델의 허가 없이 봉인을 함부로 해제하는 일은, 폐인이 될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번 5년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가 유모를 지켜 줄게. 미안해.”
“미안하다니요, 다시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도련님이 벌써 예비 기수가 된 게 그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시험이 끝난 후 힘을 되찾게 될 텐데요.”
그들은 그길로 검의 정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