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6)
제 7화
3화. 흑룡 무라칸(1)
‘흑룡 무라칸이 초대 가주에게 패배하고 긴 잠에 빠졌다는 이야긴 익히 들었지만…… 그게 여기였어?’
진은 무라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가문에서도 이 흑룡을 주제로 이야기가 나온 적은 극히 드물었다.
이미 사라진 용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용들에 대해 할 말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유리관은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운 모습이다. 누군가 매일 닦아 놓아서가 아니라, 관 근처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는 마력 덕분이었다.
손바닥을 대 보니 훅, 한기가 끼친다. 꿀꺽 침을 삼킨 진이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좋은 구경 했군.’
멀쩡히 활동하고 있는 용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잠든 무라칸을 상대로는 얻을 것이 없다. 지금은 잠든 용을 빤히 쳐다보는 것보다 비전서들을 찾는 게 중요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넓어.’
지하실은 폭풍성의 중앙 홀보다 넓은 듯 보였다. 하지만 장식물 하나 없이 휑하기만 해서, 비전서가 꽂힌 서재를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끼이이…….
미닫이 문 하나를 열자 곧장 서재가 보였다. 룬칸델의 비밀 서재치고는 달랑 책장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전부였으나, 그 정도면 차고 넘쳤다.
이 세상에 무인 가문의 비전서가 그렇게까지 많을 리는 없으니까.
‘비전서들!’
1미터 5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한 칸짜리 책장에 꽂혀 있는 것들은, 한때 세상의 여러 가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책이다.
오직 룬칸델의 기수들만이 읽을 수 있는, 무가의 정수.
진이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책장에 꽂힌 비전서들을 한 권씩 확인했다.
‘격투술의 마이어가, 티펀가, 창술의 유론가, 샤갈가, 검술의 아틸라가 등등…… 많기도 하군.’
200년 전 폭풍성을 습격했다 멸문한 쿤겐가의 비전서도 몇 권 보였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 보는 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렘에서 비롯된 떨림이었다.
룬칸델에서 추방당하기 전, 언젠가 기수가 되어 이곳에 오길 얼마나 염원했던가. 문득 지난 서러운 날들이 스쳐 지나가는 진이었다.
물론 지금도 기수의 신분으로 찾아온 건 아니다. ‘룬칸델’의 이름을 달고도 도둑처럼 몰래 들어온 신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지는 게, 룬칸델의 미덕 중 하나 아닌가? 또한, 어차피 이 지하실은 몇 년 후 진짜 기수가 되어 다시 찾아올 예정이고.
‘뭐부터 시작하지?’
행복한 고민이다. 어린 시절, 유모들 몰래 춘화를 보던 형제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비전서들을 살폈다.
오늘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두 시간.
진이 새를 추모하겠다며 얻은 자유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이 지나면, 길리가 그를 찾으러 올 터였다.
산해진미가 식탁에 가득 놓여 있는데, 골라 먹어야만 하는 슬픔이랄까.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야. 새를 추모한다거나, 명상을 하겠다는 이유로 계속 찾아오면 돼.’
쏘옥.
서재에서 한 권의 책이 뽑혔다. 진이 처음으로 고른 비전서는, 쿤겐가의 검술을 집약한 물건이었다.
‘셋째 형이 여기서 배울 게 많았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 시작은 이거다.’
쿤겐가의 비전서는 총 세 권. 진이 옆에 꽂힌 나머지 두 권도 빼내 의자에 앉았다.
본래 쿤겐의 비전서는 열 권이 넘었으나, 200년 전 룬칸델에 의해 멸망하면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룬칸델이 의도적으로 없앤 것이다.
그럼에도 남은 세 권은, 바꿔 말하면 쿤겐 검술의 최고 정수만 요약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차락, 차락.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빨랐다. 비전서라곤 하지만, 1권 앞쪽에 있는 내용은 대부분 검술의 기초와 기사의 마음가짐에 대한 천편일률적 내용이었다.
시원하게 넘어가던 페이지가 멈춘 것은 중간 무렵. 활자를 쳐다보는 진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기초나 서술하고 있던 책이, 갑작스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오호… 과연 비전서는 비전서란 말이지. 어려운데?’
대륙 공용어로 쓰여 있지만, 현재 진의 검술 실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킨 왕국에서 급사하기 직전, 스물여덟의 진이 이룬 검술 성취는 3성.
소위 ‘좀 한다’는 이들에 비해도 늦은 편이고, 룬칸델의 평균에는 감히 빗댈 수도 없는 초라한 수준.
그러나 3성에 이르기까지 솔더렛과 계약 후 고작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사실상 어마어마한 성취였다.
다만 3성 수준의 검술 이론으로는 쿤겐의 비전서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게 문제다.
하지만 진이 이런 경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노트와 연필을 챙겨 왔다.
진이 품속에서 그것들을 꺼내 비전서를 베끼기 시작했다. 필사를 하는 것이다. 두 시간이면, 어림잡아 열 장은 필사가 가능할 것이다.
마법사 시절 필사라면 연필을 쥔 손가락의 지문이 사라질 만큼 많이 해 봤다.
하루에 열 장씩.
폭풍성을 떠나기까지, 진에겐 아직 3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3년 동안 매일 열 장씩 베끼면 모든 비전서를 다 적고도 남았다.
‘게다가 계속 공부하다 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할 거고, 필사할 필요가 없는 책도 많을 거야.’
사각, 사각…….
고요한 지하실 속에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열 장을 채우자 딱 한 시간이 지났고, 진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벽에 뚫어 놓은 구멍은 대지 마법과 흙을 이용해 다시 덮어 두었다.
* * *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진은 그간 쿤겐가의 비전서 세 권과 마이어가의 격투술 비전서 두 권을 필사할 수 있었다.
무료하고 삭막한 폭풍성에서의 나날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요즘처럼 즐거운 시기가 없었다.
‘오늘은 무슨 핑계로 지하실에 가 볼까. 추모? 명상? 아냐…… 어제도, 그제도 그걸 말했으니.’
최근 폭풍성 하인들 사이에선 진에게 죽은 새의 영혼이 씌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두 달째 매일같이 추모나 명상을 핑계로 무덤가를 찾아가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돌만도 했다. 아울러 소문을 들은 토나 형제는 왠지 전보다 진을 더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흐음. 뭔가 매일 거길 찾아가도 될 만한 이유를… 만들어 봐야 하나?’
한참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무덤가의 굴을 매일 찾아가는 걸 대체 무엇으로 납득시킨단 말인가?
이내 진이 생각을 고쳤다.
‘납득시킬 필요가 없지. 내가 거길 매일 가겠다는데, 감히 이 폭풍성에서 누가 날 말려.’
이미 수호기사들은 진을 아이가 아니라 ‘진 룬칸델’로 모셨고, 하인들은 애초에 납득시킬 대상이 아니다. 토나 형제는 진을 무서워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길리.
유모는 수호기사나 하인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자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길리 유모.”
“예, 도련님.”
“나 오늘도 거기 갈까 하는데.”
“오늘도요……?”
곧장 길리의 눈빛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몄다.
하아.
길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련님. 안타깝지만 그 새는 이미 죽었어요. 두 달이나 흘렀죠. 이 유모는 몹시 걱정되어 잠들지도 못하겠습니다.”
“새는 이미 잊었어. 내가 매일 무덤가를 가는 건, 사실 그냥 거기가 좋기 때문이야.”
“거, 거기가 좋다뇨? 도련님. 무덤가를 좋아하시면 안 됩니다. 부정 타요!”
“무슨 부정을 탄다고 그래?”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잖아요.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도련님께선 좋은 기운만 받아도 모자란다고요.”
하여간 이놈의 룬칸델은 유모들마저 미신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군. 진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앞으로도 무덤가를 좋아할 거야.”
“도련님!”
“유모. 잘 생각해 봐. 나는 룬칸델의 막내아들이야.”
진이 진지한 목소리를 꾸미자 길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갑자기 그건 왜…….”
“룬칸델로 태어난 내가 앞으로 살면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무덤을 만들겠어? 사실, 요즘 나름대로 ‘죽음’이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 노력 중이거든. 그래서 익숙해지려고 매일 가는 거야.”
“아.”
길리의 이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나왔다.
잠시 사고가 정지된 그녀는 빤히 자신의 어린 도련님을 바라본다.
고작 일곱 살에 룬칸델이라는 ‘포식자’로 태어난 자의 숙명을 직시하고 있는, 어린 도련님을.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길리의 착각이다.
두 번째 인생인 만큼, 진은 전생의 자신보다 어린 길리를 뜻대로 요리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일곱 살에 누가 저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아무리 이 지독한 룬칸델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길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진의 언행을 의심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회귀했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가주를 뵌 후, 도련님의 내면에 깊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해. 무언가 엄청난 이야기를 해주셨나 보군.’
길리가 표정을 고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 유모는 장차 도련님께서 룬칸델을 짊어질 훌륭한 기사가 되리라 의심치 않으니까요. 도련님의 솔직한 이야길 들으니 몹시 자랑스럽기도 하네요.”
“고마워, 길리. 앞으로 폭풍성을 떠날 때까지, 나는 매일 한두 시간씩 무덤가를 찾을 거야.”
“예, 도련님.”
“그리고 그때는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수호기사들에게도 당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응?”
“도련님의 유모로서, 또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닐 겁니다. 부디, 가끔은 즐거운 일을 더 가까이 하세요.”
“알겠어, 꼭 그렇게 할게. 길리. 그러면 음. 이따가 간식은 딸기파이로 부탁해. 꿀을 듬뿍 바른.”
굳어 있던 길리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아주 맛있게 구워 놓죠. 다녀오세요.”
진이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됐다! 이제 마음 졸이지 않고 필사에 몰입할 수 있어.’
지난 두 달간, 지하실을 찾을 때마다 두려운 순간이 꽤 많았다. 수호기사나 길리가 굴을 찾아와 자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가문이 뒤집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내게 관심을 보였으니 걸려도 죽지는 않았겠지만, 꽤나 피곤한 일이 벌어지겠지.’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벽을 파내는 대지 공명도 오늘따라 리듬감이 흥겨운 느낌이었다.
오늘은 마이어가의 격투술 마지막 장을 필사할 예정.
사각, 사각!
향후 3년의 자유가 보장된 감격을 음미하며 격투술을 옮겨 적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회귀의 축복인가 싶다.
‘마이어가 격투술은 쿤겐가 검술에 비해선 어렵지 않은 것 같군. 다만, 육체를 오러와 일체화시킨다는 구절은 대체 뭔…… 차차 알게 되겠지.’
한 시간이 흘렀다.
쉴 새 없이 필사를 하니, 얇고 물렁한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3분 정도만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딸칵…….
미닫이 문 너머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란 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흑룡 무라칸을 덮고 있는 유리관이 열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