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22)
제 888화
207화. 엘로나의 결정
비궁을 떠난 후 엘로나 지플은 오랜 시간 망망대해를 걸었다.
자신을 깨운 이들에게, 왠지 빠르게 돌아가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은 가문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건만, 천 년 만에 봉인에서 깨어났건만.
엘로나는 그 사실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검고 깊은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듯이, 자신의 내면을 읽기가 어려웠다.
‘찬바람…… 추워.’
창성에 오른 인간이 겨우 이 정도 해풍에 추위를 느낄 리는 없다. 그녀는 마음의 고독을 추위로 느끼고 있었다.
아메리스의 짐작처럼 그녀는 날 때부터 이상하리만치 강한 힘을 지닌 채 태어났고, 그 이유는 태양신의 사념이었다.
물론 엘로나는 자신에게 깃든 힘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때의 지플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위로 엘로나의 투명한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 제 발자국을 살피는 엘로나의 눈엔, 투명하지 않고 피처럼 붉게 보였다.
천 년 전 자신이 죽인 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피가 자신의 온몸에 가득 배어있을 터였다.
살려달라는 애원이나 고통을 덜어달라는 부탁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 시절, 엘로나를 만난 적들은 대부분 자신이 죽는 순간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엘로나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은 자비를 바랄 일이 없었다. 테마르와 십대기사들처럼 맞서 싸우거나, 저주를 퍼부으며 후퇴할 뿐이었다.
전장에서, 엘로나가 먼저 물러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시절에, 나는 싸우다가 사라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한데. 테마르처럼,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혹시 가문이 미웠나? 더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었나?’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괴로운 마음이 깊어지면 뜻하지 않게 마력이 일어 바다를 마구잡이로 헤집어댔다.
빙결 속성을 띈 마력이 번지면 일대 온 바다가 얼어붙었고, 화염계 마력이 솟구치면 다시 녹았다. 바람이 된 마력은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었고, 그 속으로는 번개가 몰아쳤다.
그 모든 건 마법이 아니라 단지 엘로나의 기분에 의해 생성된 마력에 불과하나, 근처에 있었다면 함대조차 버티지 못하고 잔해가 되었을 터였다.
‘그냥 이대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까. 가문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가문이…….’
지플, 자신이 지켜야 할 가문.
희미하게 기억나는 구성원들의 얼굴은, 모두 두 가지 표정만을 지었다. 공포, 혹은 경멸에 가득 찬 얼굴.
전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가문의 식솔들을 해칠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후자는 이해가 됐었다. 그들은 엘로나가 강하기만 할 뿐, 지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짊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지금도 난 그때와 똑같아. 가문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혼란을 느껴.’
누군가 이 혼란을 끝내주면 좋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엘로나는 어두운 밤하늘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불빛이 다가오는 모습을 확인했다.
지플의 제1함대였다.
“코젝…….”
그렇다면 가주가 타고 있을 것이다. 엘로나는 함대를 올려다보며 흩어진 마력을 정리했고, 함대는 그녀 앞에 하강해서 자리를 잡았다.
“지플 가주, 베라딘 지플이 가문의 오랜 영웅을 뵙습니다.”
베라딘이 얼어붙은 바다에 내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의 뒤로 지플의 수뇌와 마법사들이 모두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엘로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가문으로부터 단 한 번도 이토록 정중한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전공을 올린 날이면 의례적인 치하를 받기는 했으나, 지금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 치하는 오히려 책망에 가까웠다. 십대기사를 죽일 수 있었으면서 왜 놓쳤느냐, 어째서 룬칸델의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지 않았나, 왜 그 힘을 갖고도 늘 그렇게밖에 하지 않는 건가.
때문에 엘로나는 치하가 있는 날이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갑갑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가문의 눈들을 마주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괴로웠다.
“이제야 모시러 와 죄송합니다. 저희가 부족하여 지금껏 엘로나 경을 방치하였습니다.”
“……고개를 조금, 들어줄 수 있나요?”
엘로나와 베라딘의 시선이 맞닿았다. 엘로나는 그가 하는 말에서 어떤 혐오도, 경멸도, 거짓도 읽어낼 수 없었다.
“저를 부른 게 당신인가요.”
“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탑이 엘로나 님의 봉인을 풀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희는 이야기의 탑이 나서기 전까지 엘로나 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탑이…… 저를.”
이야기의 탑, 천 년 전 전장과 더불어 엘로나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탑의 모습을 떠올리자 흐릿했던 기억과 감정들이 빠른 속도로 살아났다.
탑과 교감하며 마력을 일으킬 때, 엘로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감을 느끼곤 했었다. 이야기의 탑은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이야기의 탑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군요. 그래서 저를 부른 기운이 그토록 친근했던 거고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탑은 지금껏 엘로나 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저흰 엘로나 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는데, 탑은 조건이 갖춰지자마자 스스로 엘로나 님의 봉인을 풀었으니까요. 자칫하면 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는데도.”
그 말에 엘로나는 내면에 쌓인 고독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잊고 있던 친구가 자신을 안아주는 것 같았다.
“가주인 당신이, 고작 저 때문에 위험했다니.”
“탑은 저보다 엘로나 님이 가문에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저에 대해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했어요. 저는 그리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탑이 저를 통해 봉인을 풀 때 엘로나 님의 삶을 엿보았습니다. 저 역시 탑과 똑같이 판단했을 겁니다.”
“제가 이야기의 탑으로 가봐도 될까요?”
“가문에서, 엘로나 님은 원하는 모든 걸 하실 수 있습니다. 가문의 땅 중에 엘로나 님이 갈 수 없는 곳은 없고, 가문의 물건 중에 엘로나 님이 가질 수 없는 것은 없으며, 가문의 사람 중에 엘로나 님이 부릴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주인 저조차도.”
엘로나는 대답을 고르기가 어려워 한동안 베라딘과 그의 권속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다면 당신과 가문이 제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문을 지켜주십시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에요.”
“의무이기 때문에 가문을 돕고자 하신다면, 엘로나 님은 이미 천 년 전에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그때의 무능하고 오만한 선조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연민이나 정으로 가문을 돕고자 하신다면, 지금의 지플은 엘로나 님이 알던 그 가문이 아닙니다. 단지 가문의 가주인 제 부탁이라 돕고자 하신다면, 그냥 거절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베라딘과 대화할수록 엘로나는 내면이 호수처럼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곧 엘로나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겪어본 적 없이 뜨거운 위로가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라딘은 그런 엘로나의 마음을 읽을수록 그 시절의 오만하고 어리석은 선조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선조라 불릴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작자들. 마신석이 완성되는 날에도 네놈들의 역사가 다시 세상에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탑과 동화되어 엘로나의 봉인을 풀 때, 베라딘이 살펴본 건 엘로나의 삶뿐만이 아니다. 그토록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도 숙원을 이루지 못한 그 시절 지플의 무능도 함께 엿본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들은 제게 큰 위로가 되는군요, 베라딘.”
“가문을 수호한 영웅께서 그토록 고독했다는 사실이 그저 참담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저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어요.”
“말씀하십시오,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저는…… 예전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원치 않는 살생은 피하고 싶고,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볼 때 마음이 쓸쓸해지지 않고 싶어요.”
“은퇴하여 베푸는 삶을 원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탑이 가주의 목숨까지 걸어서 저를 불렀으니, 탑은 여전히 가문을 사랑한다는 뜻이겠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문을 위한 일들을 하며, 방금 제가 말한 것들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의미 없는 살인은 배제하고, 고독과 혼란이 아닌 영광으로 가득한 전장에 나서고 싶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적들과 싸우고, 그들을 죽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
“찝찝한 싸움이 없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날 엘로나 님이 전장에 나설 때,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언제든 가문을 떠나셔도 좋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저는 탑이 가문을 버리지 않는 한 떠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제가 가문에 부릴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였으니, 천 년 전처럼 또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제 뜻대로 가문을 바꾸고 싶습니다.”
“모두 제 허락이 필요치 않은 일입니다, 엘로나 님.”
“그렇지만 당신은 가주입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 저는 가주를 모시는 충실한 권속이 되겠습니다. 또한, 어쩐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저는 태어나서 지금처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군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세요. 계속 저를 올려보시니 민망하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가주.”
베라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로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천 년 전에는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야기의 탑으로 모시겠습니다.”
코젝이 이야기의 탑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엘로나는 창 아래로 보이는 도시를 보며 천 년 전과 다른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벌써 그때와 달리, 진심으로 저 도시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고 있었다.
“가주.”
“말씀하십시오, 엘로나 님.”
“세월이 천 년이나 흘렀으니 제가 새로 알아야 할 게 산더미겠지만. 가장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요.”
“무엇입니까?”
“지금 지플의 적들 중에, 저보다 강한 인물이 존재하나요?”
베라딘은 곧바로 시론과 반, 그리고 진과 무라칸이 떠올랐다.
“……엘로나 님. 테마르 룬칸델. 룬칸델의 초대 가주가 있던 시대엔 어땠습니까?”
엘로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