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91)
제 888화
223화. 불편한 만남들(3)
* * *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1804년 2월 1일.
지토는 진마계를 찾아온 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진마계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말했다.
[아, 짜증 나네.]지토는 그를 보며 대놓고 역정을 냈다.
아직 진마계와 인세 사이엔 통로가 완전히 열리지 않은 상태. 봉마벽은 훼손되긴 했으나 그 기능을 모두 잃은 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인간이 인세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특별한 존재의 도움이 필요했다. 심지어 지토의 거처까지 직행으로 오는 건 봉마벽이 없더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토가 아는 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헬루람이 보냈지? 젠장, 어쩐지 지난번 거래의 대가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더라니…… 네놈을 받아들이는 게 대가였군?]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으로는 충성을 말하고, 몸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으나 그에게선 어떤 비굴한 기색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당당한 태도로 지토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토는 당장이라도 정신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게 헬루람이 원하는 대가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마녀가 네게 먼저 접근을 했을 리는 없고, 네 신이 마녀에게 간청을 한 것이겠지. 내가 너를 받아줄 수 있게 조치를 해달라고. 거 참, 쉬누 그 새끼 옛날엔 참 콧대가 높았던 걸로 기억하는데.]남자의 이름은 켈리악 지플.
그에게선 더 이상 혼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에선 마법의 정점이라 불린 인물다운 광채가 흘렀고, 지플 가주의 상징 ‘흐로티’를 닮은 새로운 지팡이에선 당장이라도 대해와 같은 마력이 쏟아질 것 같았다.
[흐음, 헬루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가 알려줘, 그럼 받아주마. 걔는 이럴 때 진짜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어으, 징그러워. 어떤 면에선 사랑과 평화보다 지독해.]“저는 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 새끼…… 어차피 윗선에서 얘기 끝났으니 당당하다는 거지? 내가 널 고문실로 끌고가서 데리고 놀면, 헬루람이 지랄을 할 거라는 걸 아는 거야. 그렇지?]“받아주지 않으시겠다면 즉시 떠나겠습니다. 어차피 제 목표는 가문을 되찾는 일이니, 저를 그냥 보내셔도 지토 님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지, 아니야. 네놈이 가문을 되찾는 일에 성공하면? 그때는 지금 내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면서 냅다 우리한테 덤빌 수도 있잖아? 어찌저찌 마신석을 완성시킨 상태로.]“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얼마 전까지 아들내미한테 밟혀서 다 죽어가는 신세였으면서, 꼴에 지상의 패자였다는 자존심은 남은 모양이로구나. 한 마디를 안 져, 응? 난 그런 부류 정말 질색이거든.]“받아주시겠습니까?”
지토는 이마를 짚었다.
켈리악에게 말했듯이, 헬루람의 생각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로 며칠 전에만 해도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하며 놀았는데…… 역시, 헬루람은 헬루람이라는 건가.’
인세 정벌을 시작한 이래, 지토는 오늘처럼 찝찝한 날이 없었다.
비셉스가 난리를 칠 때도, 오르갈이 죽을 뻔했을 때도, 인간 중에 붉은 힘 사용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율라 때문에 힘을 일부 잃었을 때도, 부하들이 매번 깨지고 올 때도 지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다. 이번만큼은 이 켈리악 지플이라는 인간이 가져올 변수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문제는 거부할 수 없다는 것. 거부하면 헬루람은 반드시 자신에게 ‘더 큰 문제’를 안겨줄 터였다.
[어, 받아줄게. 대신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너는 공기야, 길가에 있는 바위고, 대머리의 모근이야.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알겠습니다.”
이내 지토가 허공에 한 차례 손을 휘젓자 차원문이 열렸다. 라갈의 독마성으로 이어지는 차원문이었다.
“오, 지토 님!?”
[야, 라갈. 이놈 네 성 3번 감옥에 넣어놔.]“어…… 3번 감옥이요?”
[왜, 거기 뭐 숨겨놨어?]“하하, 숨겨놓기는요. 제가 지토 님에게 비밀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 뭐야. 인간이잖아!? 게다가 이 얼굴은, 그 숙청됐다는 켈리악 지플 아닙니까? 어떻게 진마계에?”
[전부터 느낀 건데, 우리 라갈이는 참 궁금한 게 많아. 응,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짜증이 나는데 말이야?]“호기심 하면 또 이 독마, 지토 님의 귀염둥이 라갈 펀이지요. 흠흠, 대우는 어떻게 할까요?”
[식물 하나 키운다고 생각해. 죽지 않게 때때로 밥이랑 물 주고, 너무 시든다 싶으면 더 주고.]“건드리지 말라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지토가 눈짓하자 켈리악이 차원문을 넘어갔다. 지토는 연신 언짢은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차원문을 닫았다.
“3번 감옥이라…… 설마 지토 님이 내 깜짝 선물을 알아보신 걸까? 그럼 곤란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잘 모르겠군.”
“아, 인사부터 해야겠네. 난 진마계 극독지대의 왕, 독마 라갈 펀이다.”
“켈리악 지플이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말이 짧네…… 뭐, 그래. 한때 잘나갔던 놈들이 다 그렇지 뭐.”
“원한다면 높이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라갈은 지토가 켈리악을 자신에게 맡기자마자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지토가 그만큼 자신을 신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번 맞춰볼까, 너는 마녀 헬루람과 거래를 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지토 님의 거처로 갈 수 있던 거고, 지토 님이 인간인 너를 받아주시기도 한 거야. 그리고 지토 님은! 이 라갈을 믿기 때문에 너를 내게 맡기신 거지.”
켈리악은 대답하지 않고 차분히 독마성을 둘러보았다. 인세의 성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창으로 들어오는 인공 태양의 빛이 진짜 태양보다는 창백했고, 지옥으로 떨어진 인간의 영혼들이 잡일을 하고 있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아주 많아. 지토 님은 널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지. 하지만 그건 그저 고문을 하지 말라는 말씀일 거다. 따라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린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다는 뜻이야.”
“지토 님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헬루람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실 테니까! 하지만 말이야, 켈리악 친구. 자네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옳지만, 나는 자네가 가진 정보나 능력 같은 걸 통해 공을 세울 수 있어. 지토 님이 굳이 내게 자네를 보내신 이유라고나 할까.”
라갈은 콧노래를 부르며 켈리악을 3번 감옥으로 안내했다. 독마성의 감옥은 모두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설 때마다 영혼들이 고문을 받으며 내는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3번 감옥은 최하층에 있는 감옥 중 하나였는데, 입구부터 다른 곳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감옥보다는 마치 수도원처럼 정갈하고 고요한 느낌이 가득한 것이다. 옆에 있는 1, 2번 감옥에선 앞서 겪은 비명들보다 더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 3번 감옥은 말이야, 뭐랄까. 전통적으로…… 교화의 장이야. 그중에서도 종교적 교화에 아주 가깝지. 그래서 간수들과 고문관들도 생전엔 성자라 불리던 놈들이지. 물론 성자가 지옥에 왔다는 건, 그놈들이 사실 여기 올 만큼 추잡한 것들이었다는 뜻이고.”
라갈이 다가가자 신부복을 입고 있는 간수들이 고개를 숙였다.
“작업은 잘 되어 가나?”
“예, 한 명은 이제 교화가 완전히 끝나갑니다, 라갈 님. 나머지 셋은 1번과 2번 방에서 조정 중에 있습니다.”
“아직 세 명이나 조정 중이라고? 호오, 예상했던 것보다 잘들 버티는군. 버텨봐야 어차피 3번 방으로 오게 될 것을. 그냥 바로 와서 편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
“앞으로 사흘 내로는 그래도 다 3번 방에 모이게 될 겁니다. 한데, 이쪽은 신참입니까?”
“신참은 신참인데, 교화 대상은 아니야. 너희가 극진히 모셔야 할 나의 새로운 친구지.”
“몰라뵀습니다, 인사 드리겠습니다!”
간수들이 켈리악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이내 간수들이 3번 방의 문을 열었다. 내부는 마치 거대한 기도실처럼 보였는데, 다른 것이라곤 유리 그림에 아율라나 인세에 잘 알려진 신들 대신 지토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가운데엔 무릎을 꿇은 채 경전처럼 두꺼운 책을 살펴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켈리악 지플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앤 룬칸델?”
앤 룬칸델.
룬칸델의 아홉째이자, 언니인 뮤와 더불어 가장 먼저 혼돈을 받아들인 인물. 그녀는 흉신전 당시 토나 형제와 사투를 벌이다가 지원을 온 흑기사 몬에게 당해 죽음을 맞이했었다. 예언자가 소멸했으니 부활조차 할 수 없었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윤회의 길이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졌다. 앤은 눈을 감은 채 계속 기도문 같은 것을 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1번, 2번 감옥엔.”
“뮤 룬칸델, 그리고 란 룬칸델과 뷔고 룬칸델이 있지. 지금 파엘리토는 말이야, 이것들을 찾으려고 우리 마족들이 즐기는 영혼주의 생산을 중단시켜둔 상태다. 이것들을 이용해서, 루나 룬칸델에게 타격을 주려는 요량이지.”
-사키엘.
-예, 파엘리토 님.
-지금부터 영혼주 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그리고 지옥을 샅샅이 뒤져서, 루나 룬칸델의 형제들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해라. 아마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긴 했었을 것이다. 이미 영혼주가 되지만 않았다면 분명 남아 있을 테지.
휴페스터 시아텔로에 발생한 대균열을 루나가 붉은 검기로 처리했을 때, 파엘리토와 사키엘이 나눈 대화.
라갈은 그 대화를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파엘리토의 계획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라갈은 부관 ‘게로’를 시켜 파엘리토 쪽보다 먼저 이들을 확보한 것이다.
“켈리악 친구, 나는 이것들을 이용해서 지토 님께 깜짝 선물을 드릴 거다. 바로 백경의 최후라는 선물이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 지옥엔 룬칸델 쪽 애들만 오는 게 아니거든. 친구 부하였던 놈들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나더러 그들 중 쓸모가 있는 자들을 선별하라는 것인가?”
“아, 말이 잘 통하는군! 오늘부터 자네가 기거할 이곳 3번 감옥으로 꾸준히 지플의 영혼들을 보내줄게. 자네가 필요한 놈들을 골라주기만 하면, 나는 그걸 통해 지토 님을 위한 공을 세운다. 어때, 간단하지?”
“그렇게 하지.”
“크하하, 좋아. 그럼 좀 쉬고 있으라고, 저녁에 맛있는 것 들고 찾아올 테니 영혼주나 한잔하지.”
라갈이 떠났다. 간수들은 살살 켈리악의 눈치를 살피며 하던 일을 마저 끝내러 갔다.
켈리악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가네스토의 피, 그것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