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07)
제 999화
228화. 격전의 그로쉬에 성(4)
레일라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토 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즐기신다.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 역시 지토 님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지토를 위해 적을 죽이는 일이든, 고통에 빠지는 일이든 얼마든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다. 나를 비롯한 모든 마족들은, 오로지 지토 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지토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최종적인 목적’을 부하들에게 설명한 적이 없다.
따라서 마왕을 비롯한 마족들 대부분은 이번 인세 침공의 목적이 단지 고통을 통해 인세를 지배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고통을 통해 태양신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에 따라 모두가 알맞은 운명을 누리게 되리라고 말이다.
그러나 켈리악이 알게 된 바, 지토가 원하는 세상은 그보다도 더 끔찍하다.
“불쌍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계속 무례한 발언만 하는군. 하지만 마녀를 뒤에 둔 인간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
레일라가 부하들을 불러 켈리악을 끌어내려는 찰나, 별안간 켈리악의 눈동자에 화염이 맺혔다. 레일라는 기습으로 착각하고 세검을 뽑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불타는 켈리악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 그로쉬에 성 1차 방어선에서 죽은 다일러스와 마찬가지로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잊고 있던 기억들이.
“큭…… 무슨 짓을 한 거냐!”
정신이 극히 혼란한 탓에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레일라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자네를 돕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군. 이건 내가 각성의 불이라 부르는 권능일세,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게 대체 무엇이냐고……!”
“그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군. 잃어버린 혈육, 친우, 연인…… 혹은 그만큼 소중했던 무언가가 기억나고 있겠지.”
레일라의 두 눈에서 시뻘건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지토에게 무참히 찢어지는 모습들, 그걸 잊게 만들 정도로 끔찍한 고문.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녀의 의식을 찔러대고 있었다.
때때로 지토의 세뇌가 다시 작동하며 켈리악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일러스와 달리 어떻게든 새로이 떠오른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잠시 후 켈리악의 눈동자에 맺힌 불이 꺼졌다.
“허억, 헉……!”
레일라는 거친 숨을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켈리악도 온몸에서 진땀을 쏟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각성의 불을 사용하는 건 그에게도 많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또한 위험을 감수하고 각성의 불을 계속 유지한다고 해도, 지토의 세뇌를 근본적으로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마녀 헬루람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까지 자네가 본 건 일부에 불과해. 잊고 있던 기억의 일부만 겨우 드러났을 뿐이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네가 가장 많이 느끼고 있을 테지만 말이야. 말하자면, 자네는 지금껏 지토에게 세뇌된 상태였다네.”
이딴 건 믿을 수 없다.
레일라는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불의 인장을 본 사람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느끼듯이 각성의 불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각성의 불로 지토의 권능을 잠시 밀어낸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계속 후속 조치를 해주지 않으면, 자네는 또 얼마 가지 않아 지토의 충실한 개로 변하게 될 것이네.”
“하.”
“한편으로는 잊고 있던 모든 진실을 다 확인하지 못하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지. 이것만으로도 이토록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전부 떠오르면 자네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켈리악 지플…… 나조차 모르는, 내 지워진 기억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그에 대한 답은 자네와 내가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한번 묻지, 레일라 벨가시움. 아직도 지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앞으로 지토가 아니라, 나와 함께 싸우기를 원한다.”
“지토 님. 아니, 지토를…… 끌어내리고 이 진마계를 제패할 생각이라도 하는 것인가?”
“진마계를 통치하는 일 따위엔 관심이 없어. 내게 진마계란 가문을 되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다만 내가 가문을 되찾은 다음에는 진마계를 다스릴 통치자가 필요하겠지. 지토 같은 괴물이 아니라, 마땅히 한 세계의 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사람으로.”
쪼르륵…….
켈리악이 찻잔을 채웠다.
“나는 그게 자네의 오라버니, 파엘리토 벨가시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파엘리토 님도 이 사실을 아는가? 그분도 세뇌된 상태인 것이냐?”
“뻔한 걸 묻는군. 파엘리토는 방금 전의 너와 마찬가지다. 자신이 세뇌된 것도 모르고, 자신이 왜 지토에게 그토록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지도 모르지. 그는 세뇌되기 전까지, 진마계 전체를 통틀어 지토에게 가장 강렬하게 저항했던 인물인데도 말일세.”
“크으윽!”
갑자기 온몸으로 밀려드는 끔찍한 고통에 레일라가 신음을 냈다.
“아, 벌써 지토의 기운이 각성된 자네의 정신을 다시 파먹으려 하는군. 아까도 말했듯이, 각성의 불을 본 이상 당분간 시도 때도 없이 지금 같은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많이 괴로운가?”
레일라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몇 분 동안이나 이리저리 몸을 꺾었다.
“이번엔 내가 뻔한 걸 물었군. 하지만 자네가 정녕 지토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그 고통을 계속 이겨내야 해. 의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고통이 두려워서 정신을 파고드는 세뇌를 다시 받아들이면, 편해지거든. 대신 되찾은 기억도 사라지지.”
“편해질 생각 따위 없다. 이까짓 고통 따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더는 지토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좋은 자세다. 그럼 나와 싸우겠나?”
“진실을 알려주었으니, 그 빚은 갚겠다. 그러나 그게 곧 네게 완전한 충성을 바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 벨가시움가를 위해, 파엘리토 님을 위해, 진마계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싸울 것이다.”
“멋진 대답이야. 그러다 내가 마음에 들면 충성도 바쳐주게, 후회할 일은 없을 테니. 다만, 이런 대답만으로는 자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없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앞으로 보름에 한 번씩 독마성을 찾아오게.”
“독마성?”
“나는 독마성에서 지내고 있으니, 자네가 올 때마다 각성의 불을 밝혀주겠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네가 나를 찾지 않으면, 그땐 자네가 다시 지토의 개가 되었다고 이해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다. 고맙군…… 내 원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어서.”
레일라는 가슴이 찢어지는 일들이 떠올랐음에도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앞으로는 한순간이라도 냉정하지 않으면 다시 지토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독마성이라니, 라갈 펀을 이미 포섭한 모양이군. 그 머저리도 나처럼 세뇌된 상태였나?”
“세뇌에 망가져서 그렇지, 라갈 펀은 본래 무척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라갈을 대할 때 예의를 갖춰주게. 그자는 자네보다 먼저 각성을 시작했고, 자네보다 더 큰 고통을 견디고 있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견뎌내는 중이라고…… 그 라갈이……?”
물론 라갈은 그런 적이 없다. 켈리악은 각성의 불 없이 그를 간단히 회유했으니 말이다. 또한 라갈이 세뇌 전에 정말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켈리악은 사실 잘 모른다. 켈리악은 그저 간단한 방법으로 라갈의 충성심을 올리고 있었다.
레일라는 잠시 라갈의 천박하고 얕은 모습들을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켈리악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건 아니지만, 켈리악이 라갈을 인정했으니 굳이 전처럼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다. 주의하도록 하지. 정말 의외로군…… 켈리악, 보아하니 너는 불멸의 격을 얻은 것 같은데. 그런 네가 높게 살 정도의 인물이었다니.”
“그럼 난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고통을 견디고 보름 뒤에 나를 다시 찾으면 그때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해주겠다. 그때는 정말로 자네의 의지를 믿어도 될 테니.”
“알겠다. 보름 뒤에 독마성으로 가겠다.”
* * *
진마계 1차 방어선이었던 해상.
휘이이이……!
해풍이 불 때마다 라갈이 남긴 독무와 재가 된 마족들의 시체가 바다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로쉬에 성은 1차 방어선을 포기하고 더는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독무 때문에 연합의 군대도 더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진을 비롯한 초인들이 독무를 치우고 마저 진격하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하나, 그보다는 라갈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어차피 나머지 3면의 방어선에선 나머지 거대 세력들이 계속 전투를 펼치고 있으니 말이다.
“발레리아, 조금 쉬고 다시 할래?”
무라칸이 펼친 영기 보호막 속에 쉴 새 없이 푸른 창들이 갱신되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벌써 여섯 시간째 전장의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
“괜찮아, 진. 전장에 망자들의 기록이 너무 많아서 걸러내는 게 번거로울 뿐, 아주 힘들지는 않아.”
진은 조심스레 발레리아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아주었다.
잠시 후 마침내 찾은 라갈에 대한 기록 중 유의미한 내용은, 그 두 줄이 전부였다.
그러나 켈리악과 라갈의 유착 관계를 확인하기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후우, 다른 기록은 전부 전투 상황에 대한 서술뿐이야. 그래도 보람이 있네, 켈리악 지플과 라갈의 유착 관계가 확실히 밝혀졌으니까.”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셉스의 예상대로였군. 켈리악 지플과 라갈 펀이라……. 비셉스에 의하면 라갈 펀은 분명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비셉스에게 세뇌된 상태였지. 그런데 지금 그로쉬에 성을 지키는 것보다 켈리악의 명령을 우선했으니, 켈리악에겐 지토의 세뇌를 풀거나, 적어도 약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꼬마, 켈리악과 지토가 한패일 가능성은?]“그렇게 생각하기엔, 방금 라갈만 제대로 싸웠어도 놈들의 1차 방어선이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전멸하지는 않았어. 켈리악이 지토와 진마계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면 라갈이 전력으로 싸웠겠지.”
진은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진마계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 같군. 켈리악 지플로 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