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34)
제 999화
232화. 각성(3)
“혼돈…… 갑자기 그런 물건을 꺼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진은 구슬의 정체를 모른다.
그러나 혼기가 지금껏 사람과 세상을 망쳐 온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슬을 사용하는 순간 분명 상황은 더 나쁜 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사키엘의 원수를 갚지 못했어…….”
“그만둬라, 파엘리토. 그 구슬을 쓴다 하여 나를 상대로 복수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나? 천만에, 차라리 네놈이 마성화를 극복하고 본래의 힘을 되찾는 게 훨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크하하…… 네놈은 이 힘을 두려워하는군.”
“과거의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이게 그만 추락을 멈춰, 파엘리토. 네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기회?”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지. 그래, 너는 분명 내 손에 죽게 된다. 그러나 그게 오늘은 아니야.”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진 룬칸델.”
“죗값을 조금이나마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세뇌에서 벗어나고, 심마를 극복해서 다시 진짜 검마가 되는 거다. 그리고 그 힘으로 지토의 죽음에 일조해. 그때까진 살려 주마.”
진은 파엘리토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괴물이 되었으나 그는 분명 창성이었다. 얼마든지 심마를 빠져나와 다시 빛나는 거인이 될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주어진다면, 진이 옆에서 돕는다면 반드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파엘리토가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지토와의 싸움이 끝나면, 진은 그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그가 설령 지토의 죽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할지라도 번복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과거는 현재의 면죄부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파엘리토, 지금 인세와 진마계에 일어나는 수많은 비극은 모두 지토의 뜻이다. 너의 진짜 원수는 내가 아니라, 너와 마족들을 괴물로 만든 지토다. 그러니 그 구슬을 버리고, 기회를 받아들여.”
“개소리 집어치워!”
악에 받쳐 소리치는 파엘리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다일러스가 최후의 순간에 잠시 세뇌에 묻힌 옛 기억을 떠올렸듯이, 그도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 하는 것 같았다.
“너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그러니 그 구슬을 꺼내 놓고도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구슬을 내려놔라, 너는 돌아갈 수 있다. 돌아가서 사키엘의 원수를 갚고, 죗값을 치른 다음에 죽을 수 있어.”
“닥쳐, 닥쳐! 이 모두 결국 질서가 없기에 일어난 일, 그래. 돌아올 수 있어, 질서가 바로 서면 사키엘은 돌아올 것이다. 다시, 내게로!”
진은 천천히 파엘리토에게 다가갔다.
악인에게 이용되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선인, 파엘리토는 그런 존재였다. 지토라는 불가항력에 굴복해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괴물이 된 것이다. 비셉스를 제외한 진마계의 모든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때가 되면 지금 네놈처럼 사키엘도 부활할 수 있어……!”
두 사람 사이에 열 걸음 정도의 거리가 남은 찰나.
별안간 상공에 한 소형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부엉이, 바멀 연합의 공간 도약함이었다. 방금 막 진이 파엘리토를 제압하며 공간 도약과 통신의 제약이 대부분 해제된 것이다.
“진.”
붉은 부엉이에서 지상으로 하강한 건 발레리아였다. 파엘리토는 불안한 눈동자로 그녀와 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레리아를 공격하거나 인질로 삼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섣불리 움직이는 순간 진에게 구슬을 빼앗기고 제압당할 테니까.
“발레리아?”
발레리아는 진의 변화를 눈치챘으나 일단 그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싸움이 진의 승리로 끝난 게 확실한 데다, 파엘리토가 쥔 검은 구슬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급히 전장을 찾은 이유는 파엘리토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로쉬에 성을 조사하다가 묘한 기록을 발견했어. 사키엘에 대한 기록이야.”
“사키엘에 대한 기록?”
“그래. 성국을 폐허로 만들고 있는 저 끔찍한 괴물이, 과연 이 기록을 보고도 계속 지토에게 복종할 수 있을지 궁금하더군.”
발레리아는 더 설명하지 않고 은소나무지팡이를 들어 파엘리토에게 기록창을 열어 보였다.
파엘리토의 눈동자가 커졌다.
진도 충격을 받고 있었다. 파엘리토가 유난히 사키엘에게 집착한다는 사실은 줄곧 인지했다. 때문에 어쩌면 그들이 연인이었을 수도 있다 생각하기는 했으나 설마 지토가 이런 식으로 그들을 갖고 놀 줄은 몰랐다.
발레리아가 찾은 기록대로라면, 지토는 사키엘을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 그 절망과 고통을 즐겼다. 진이 어렴풋이 예상해온 일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이, 이게. 이게 무엇…… 무슨, 무슨 기록…….”
“네가 본 그대로다, 파엘리토. 사키엘 그로쉬에는 죽기 직전 자신이 지토에게 완전히 놀아났음을 깨달았어. 지토는 우리 인세만 고통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야. 부하인 너희까지도 그저 한낱 장난감에 불과한 거다.”
발레리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파엘리토의 두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조작된 기록이다! 크아악……!”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터지면, 잊고 있던 기억들이 밀려들 것 같았다.
파엘리토는 그 감각을 부정하기로 했다. 차라리 이대로 소멸하고 싶었다. 그 기억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세뇌된 자아인지, 아니면 진짜 자신의 의지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을 거다. 하지만 우리 히스터는 지플과 달리 기록을 절대로 조작하지 않아. 그걸 막으려고 존재해 왔으니까.”
“그렇다면 지토 님이 왜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이냐? 우린 그분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우리를 배신해서 지토 님이 대체 무엇을 얻는다고!”
“아마도, 쾌락을 얻겠지. 그자는 오로지 고통이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심연의 존재니까.”
은소나무지팡이에 재차 마력이 모여들었다. 가볍게 바닥을 내리치자, 파엘리토의 전면으로 세 개의 기록창이 열렸다.
기록창들은 지금 파엘리토가 간신히 틀어막고 있는 기억을 서술하고 있었다.
기록창은 눈을 감아서 보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보고 싶은 욕망은 눈을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파엘리토는 망설임 없이 제 눈을 찔러 버렸다. 손가락이 안구를 파고드는 것조차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댐이 터지듯, 한 번 밀려들기 시작한 기억은 시력을 잃어도 외면할 수 없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아, 아아 아……. 아아아…… 아, 아, 아, 아아, 아…….”
심마와 파엘리토의 목소리가 조금씩 뒤섞이고 있었다.
진은 그 모습에서 한 번 더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가 세뇌를 벗어나 죗값을 치른 후 죽음을 맞이하는 가능성을.
“파엘리토.”
이윽고 진은 무릎 꿇고 오열하는 파엘리토의 앞에 섰다.
그리고 몸을 숙여 파엘리토가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검은 구슬을,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파엘리토는 저항하지 않고 꺽꺽 절규를 토하기만 했다. 다만 검은 구슬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진은 파엘리토가 심마를 빠져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세뇌와 마성조차 가릴 수 없는 깊은 슬픔이 파엘리토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진은 구슬을 억지로 빼앗지 않았다. 지금은 그를 자극할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파엘리토가 고개를 들었다.
“네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벌어진 비극들은 돌이킬 수 없어. 그러나 추락은 멈출 수 있다. 함께 지토를 처단하자. 모든 게 다 끝나면 너를 사키엘의 곁으로 보내 주마. 그 과정에 네가 다시 괴물이 된다 할지라도, 내게는 언제든 너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있다.”
“지토를…… 함께, 죽이자고…….”
“그래.”
“참…… 좋은 이야기군…… 그러나, 네 말대로. 나는 해서는 안 될 학살을 저질렀고, 너는…… 사키엘을 죽였다.”
“심마를 빠져나온 지금도, 사키엘을 죽인 게 나인 것 같나?”
“진 룬칸델, 여전히 너는 내게 증오심을 느낀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진. 그는 결코 파엘리토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나 역시 그렇다. 세뇌로 인해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인간들을 죽인 건 분명 나다. 그리고 지토가 사키엘을 죽음으로 내몬 건 사실이나, 그녀를 벤 건 분명 너다. 그러니 나 또한 여전히 너를 증오할 수밖에 없어. 근본적으로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운명이…… 지독하고 더럽게 꼬인 거다.”
“……그렇군.”
“그러니 우리가 같이 싸울 수는 없다, 진 룬칸델. 너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사키엘을 벤 자와 함께 싸울 수 없어. 대신…….”
검은 구슬을 쥔 파엘리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진은 강제로 그의 손아귀를 벌리려 했으나, 파엘리토는 심마를 빠져나온 상태다.
그는 순식간에 구슬을 부쉈다.
“나는 지금 지토에게 갈 거다. 이 구슬을 부수면, 지토의 거처로 이동된다더군. 내가 그걸 원하기만 한다면.”
이미 구슬이 부서졌으니 진으로서는 그를 더 말릴 수 없었다. 구슬에서 빠져나온 혼기가 파엘리토를 물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세뇌와 마성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야. 몇 시간 내로 나는 또 미칠 것이다. 차라리 극마의 힘과 감각을 잠시라도 되찾은 지금 지토와 싸우다 죽는 것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고 죽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하지만 진은 파엘리토를 물들이는 혼기를 보며 직감하고 있었다. 그건 파엘리토를 지토의 거처로 이동시켜 주는 물건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파엘리토도 구슬을 깨자마자 그 사실을 알아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화아아아……!
별안간 파엘리토가 어두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이 이어졌고, 진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쥐었다.
파엘리토로부터, 검의 정원에서 흉신이 탄생하던 그때와 유사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끝까지 누군가에게 이용되기만 하는 최후를 선택했군, 파엘리토. 너는 그 구슬을 깨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