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10
111 : 성북동 비둘기
나는 주소가 적혀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느낌이 쎄한데? 불길해.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
근거?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본능은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도망? 도망칠까? 도망쳐 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 0.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시도해 보겠지만, 할아버지에게서 도망친다는 선택지의 성공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아니, 의심의 여지 없이 제로다.
그래.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대신에 잃는 것이 너무 많다. 일단 중앙그룹의 그 거대한 부.
아니지. 이 자식 보게? 벌써부터 정신 못 차리고 지 꺼라고 생각하고 있네?
이놈! 한수야. 정신 차려! 너 임마! 시골에서 흙 파먹던 한수야!
그리고 중앙그룹은 둘째 치고서라도, 우리 서현 님을 두고 내가 어딜 간단 말이냐?
아무튼, 그런 씨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는데….
김창회가 박승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스탠딩 길로틴 초크(Standing Guillotine Choke) 자세로.
스탠딩 길로틴 초크?
저거는 진짜 위험한데? 진짜로 요단강 건너가는데?
“왔어? 통화 끝났어? 할아버님께서 뭐라고 하시는데?”
승환이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팔짱 낀 자세로 지켜보던 이중훈이 묻는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왜 승환이 명줄을 끊으려 하는데?”
내가 김창회와 박승환을 보며 물었다.
“어. 우리 친구가 거짓말을 하잖아.”
“거짓말? 무슨 거짓말?”
“승환이 저 친구가 전화를 받고 와서는 급한 일이 있다고 가봐야겠다고 하더라고. 아버지가 부른다고.”
“아버지?”
밤의 대통령이시라는 승환이 아버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버지가 불러서 가야겠다니. 저 박승환이? 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땅의 도를 알지 못하는 저 금수 같은 박승환이 무슨 효자 코스프레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 불금에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으니 가야겠다고? 거짓말을 해도 그럴싸하게 해야지. 안 그러냐.”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박승환에게 시선을 준다.
“여자. 여자일 수밖에 없다. 이게 우리의 결론이었지. 그렇다고 우리가 막무가내로 저 녀석을 막 다그친 것도 아니야. 기회를 줬지. 친구잖아. 친구야. 솔직하게 말해라.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다치는 정도로 끝날 수 있다. 여자지?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거지? 그렇게 우리가 기회를 줬는데도, 저 어리석은 친구는 끝까지 거짓을 늘어놓더란 말이지.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으려 했고. 벌주를 멕이는 중이지.”
“벌주가 너무 과한 거 아니냐?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박승환의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예전에 몰래 훔쳐봐서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눌러 잠금을 풀고 통화목록을 열어 가장 상단에 찍힌 ‘아버지’라는 세 글자를 확인하고는 이중훈에게 보여주었다.
글자를 확인한 이중훈의 눈이 흔들린다. 동시에, 발버둥 치던 박승환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진다.
“그만 풀어줘라. 뇌 손상 오겠다.”
내가 창회에게 말했다. 차라리 죽으면 몰라도 평생 침 질질 흘리면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냐?
“3분까지는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창회는 박승환의 목을 감싼 두꺼운 팔을 풀어낸다.
자연스럽게 박승환의 몸이 바닥에 무너져 내린다.
제대로 들어갔다는 증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박승환을 바닥에 제대로 눕히고 가슴에 강하게 압박을 가했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박승환이 눈을 뜨고는.
“…할머니 만나고 왔네.”
그렇게 중얼거린다.
“계속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가는 할머니 손 잡고 먼 길을 가게 될 것이야.”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김창회가 근엄한 말투로 말한다.
얍삽한 이중훈이 재빨리 김창회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김창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원래 감정표현이 크지 않은 놈이라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예리한 내 눈에는 딱 보인다.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박승환이 목을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그런 박승환을 얍삽한 이중훈이 얼른 부축한다.
역시 이중훈. 저 녀석은 구한말에 태어났으면 제일 먼저 창씨 개명했을 거다.
“그래. 아버지가 부르시면 얼른 가야지. 자고로 효도는 모든 행함의 근본이라고 그랬어. 주자께서 소학에 그렇게 쓰셨다고.”
이중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박승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이 자식들아. 지금 네놈들이 박승환에게 가장 큰 불효를 범하게 할 뻔했다고.
부모님보다 먼저 저세상 가는 불효를 말이다.
박승환은 목을 좌우로 흔들어 자신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 말한다.
“유자징.”
“응?”
“소학 편찬 유자징. 주자가 아니고 유자징.”
역시 승환 위키. 세상 모든 쓸데없는 지식을 외우고 다니는 박승환이 그렇게 오류를 정정해준다.
“그렇구나. 몰랐네. 그런데 유자징이 누구야?”
이중훈이 물었고.
“저세상에 가서 직접 만나 물어봐라!”
박승환이 튼튼해 보이는 카페 의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이스 초이스. 아무리 괴물 같은 김창회라고 해도, 체어샷은 감당할 수 없겠지.
하지만 카페에서 로열 럼블이 개최되지는 않았다.
내가 의자를 지그시 눌러 승환이의 움직임을 봉쇄했거든.
“원래 아버님과 약속이 없었는데 갑자기 부르셨단 말이지?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걸까?”
내가 눈동자에 ‘나 지금 졸라 진지함’이라는 눈빛을 담아서 승환이에게 물었다.
승환이와 아버님 사이의 특수 관계를 아는 사람인 친구들 중에서 나뿐이고, 그런 특수관계와 관련해 나의 ‘졸라 진지함’이라는 눈빛이 승환이의 분노를 잠재워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먹혔다. 박승환이 살짝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액순환에 방해를 받아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구나. 아버님이 부르시면 가야지. 마침 나도 할아버지가 오라고 하시네. 불금인데 너무들 하신다. 아무튼 오늘은 이만하자. 끝. 디엔드. 씨마이. 승환이는 내가 챙겨 갈 테니까, 니들은 어서 가라. 가.”
내가, 손짓으로 살인미수 용의자 두 명에게 얼른 현장에서 도주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찌릿찌릿찌릿찌릿.
내 사인을 수신한 이중훈과 김창회는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는 친구야 사랑한다느니, 우정은 다이아몬드처럼 변치 않는다느니 같은 헛소리를 하며 몸을 감추었다.
어쩔 수 없다. 운명이고 의무다. 나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에게 부여된 의무다.
아무튼 이 자식들아! 나에게 목숨 하나씩 빚진 거야!
***
김광섭 시인의 대표 작품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수능 언어영역에 언제 출제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작품이기에 수험생은 물론, 일반인들도 제목 정도는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시다.
뭐, 지금 교수님들이 대입 학력고사 준비하던 시절처럼,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수험생에게 ‘성북동 비둘기!’ 그러면 벌떡 일어나면서 ‘성북동 비둘기는 자유시, 서정시이며, 비판적,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 대한 향수와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적 어조로 표현했습니다.’라고 줄줄 외워댈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고3이라면 제목이나 주제가 자연환경의 파괴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북동 비둘기라는 제목을 들어본 수험생은 많아도, 실제로 길지도 않은 시 전문을 읽어본 녀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작품을 읽어보면, 뭐랄까. 내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산업혁명 초기의 스모그가 가득 들어찬 런던 하늘을, 군데군데 검댕이 묻은 하얀색 비둘기가 처연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뭔가 우울하고, 춥고, 서러운.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본 성북동 비둘기는 그런 내 느낌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저게 비둘기야? 닭이야? 뭘 먹고 살았길래 저렇게 뚱뚱해?
아니 뚱뚱한 비둘기야 둘째 치고, 잿빛 가득한 하늘 아래 우울한 성북동은 어디로 가고, 맑디맑은 하늘 아래, 북악산 자락을 병풍처럼 두른 고급, 아니, 초고급 주택가가 펼쳐져 있다.
‘자 성북동 비둘기. 이거 자주는 아니어도 언제 수능에 나올지 모른단 말이지. 거기 졸지 말고! 이거 중요한 거니까 잘 들어둬! 성북동 비둘기의 주제가 뭐냐? 택지를 개발할 때, 고급주택을 집적함으로써 지역 전체의 이미지를 상승시키고, 이를 통해 주변 지역보다 더 높은 지가를 형성할 수 있다. 오케이? 그럼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뭐야? 오늘 며칠이지? 19번. 일어나서 답해봐.’
‘정확한 평가분석을 통해서 지가 상승 전에 매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 맞았어. 이거 수능에 나온다. 다들 밑줄 쫙!’
나는 그런 학원 수업을 상상하며, 성북동 언덕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젠장. 숨차네. 괜히 조금이라도 더 늦게 가고 싶다는 심정으로 한성대입구역에서 걸어 올라왔더니, 거의 30분 가까이 걷고 있네.
마을버스 타고 올 걸 그랬어.
아무튼 그렇게 언덕을 오르고 올라 나는 목적지 근처인 길상사(吉祥寺) 근처에서 발을 멈추었다.
길상사. 한번 와봐야지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찾아오게 되네.
길상사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요정(料亭)이었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요정이었고, 군사정권 시절 요정정치의 핵심장소 중 하나였다나?
뭐 군사독재고, 요정정치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길상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원각의 주인인 김자야의 스토리가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김자야, 그분께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당시 시가로도 천억 원이 넘었다는 대원각을 통째로 법정 스님께 시주하셨다는 그 이야기.
‘저기 보이는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언제더라, 중3 때였나? 고1 때였나? 아무튼 책에서 그 글을 읽었을 때, 그 범종 소리를 꼭 들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법정 스님은 안 받겠다고 하고, 김자야는 시주한다고 하고, 그렇게 10년을 아웅다웅하다가,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였고, 결국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사찰로,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는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때렸지.
하지만 서울 올라와서는 까먹고 있었다. 학교 다니고, 연애하고, 알바하고, 차이고 한다고 나름 바빴다. 내 멘탈이 너덜너덜해졌는데, 범종 소리 들으러 갈 여력이 어디 있겠어?
아무튼 길상사에 이렇게 오게 되네?
여기까지 온 김에, 팔각정의 범종 소리를 듣고 갈까 싶었는데, 슬슬 저녁 공양 시간인 것 같은데, 조금만 버티면 범종 소리 들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더 늦었다가는 할아버지에게 혼날 것 같으니, 길상사의 범종 소리는 다음 기회에!
어디 보자. 아까 지도를 봤을 때는 대충 이 근처인데….
주택가는 분명한데, 대문은 안 보이고 고압적인 분위기에 담벼락만 가득이다.
아니, 고급주택의 담벼락이라기보다 계급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하층 계급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성벽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꼬여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성벽을 따라 걸었다.
걷다 보면 대문도 나올 테고, 대문에 주소도 적혀 있을 테고, 그러면 확인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지.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성벽을 따라 걷고 또 걸어가니, 저 멀리 대문 비슷한 게 보인다.
아니, 대문만 보이는 것이 아니고, 대문 앞에 서 있는 한 남자도 보인다.
뭔가… 느낌이 익숙한데? 아는 사람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남자가 두 손을 앞으로 모은다.
불길한 예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렸고, 몸에 잔뜩 힘을 주고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남자의 형태가 명확해진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그 순간!
남자가 서현 님의 오라버니이신 강우현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깊게, 그리고 정중하게.
예상했고, 준비된 나도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그리 짧지 않은 맞절이 끝난 후에 고개를 든 강우현의 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할아버지가 보내준 주소가 이 거대한 저택이 맞다는 의미.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강우현이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대문을 가리킨다.
마치, 호랑이굴처럼 열린 문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