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12
113 : 상속순위
나는 놀란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어디, 더 이야기해 보거라.’하는 그런 눈빛으로.
분해! 열 받아!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그랬다. 장기를 두든, 바둑을 두든, 맞고를 치든 항상 비장의 한 수를 감추어 두고는 함정을 팠다.
착하고 순진한 내가 함정에 걸려들면 기다렸다는 듯, 어리석다느니, 불민하다느니, 이런 놈에게 가문을 어찌 맡기냐느니 하면서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
오늘도 그렇다. 사춘기 여중생처럼 까칠한 그 태도는 함정이었고 미끼였던 것이다.
발끈한 내가 명분 싸움을 걸어오게 하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미끼를 던진 분 것이고, 나는 그 미끼를 확 물어 분 것이여.
“할 말이 있느냐?”
할아버지가 묻는다.
그 목소리에는 힘의 우위에 선 자의 오만함이 담겨 있다.
승리 선언이다.
“…없습니다.”
나는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에휴. 진짜. 망할 할배 같으니! 언제까지 손자를 이렇게도 골려 먹어야 속이 시원할 런지.
회장님은 뭐가 그리 흐뭇하신지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나에게 의자를 권한다.
“일단 앉으시죠. 차를 내오겠습니다.”
회장님은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았고, 강우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문을 열고 나갔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잡일이나 심부름은 니가 해야지’ 같은 말을 들을 것 같지만, 일단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여기가 할아버지의 세컨하우스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 머릿속 의문 하나가 풀린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가끔 서울에 다녀오고는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어린 손자를 혼자 둘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당일치기였는데, 중학교 입학하고 난 이후부터 외박을 하시기 시작하셨지.
짧으면 1박 2일, 길면 일주일.
뭐 나도 불만은 없었다. 할아버지 없으면 친구들 불러다가 서점에서 야한 책 꺼내 보면서 놀고 그랬으니까.
작년에도 그랬지. 내가 막 대학 입학했을 때도.
당시 내가 머물던 하숙집을 찾아와 주인 할머니에게 부족한 손자를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네고, 내 하숙방을 둘러보고는 ‘네 녀석에게는 과분하구나.’ 같은 이상한 말을 하더니, 약속이 있다고 그냥 가버리셨다.
고향으로 내려가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사나흘 서울에서 뻐팅기다 가셨더라 이거다.
항상 궁금했었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주무시는 것일까?
일가친척 하나 없는 우리 할아버지, 성격도 괴팍해서 친구도 별로 없는 우리 할아버지. 서울에 가도 신세 질 곳이 없을 텐데.
설마 호텔? 절대로 허튼 데 돈 안 쓰는 우리 할아버지가 호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럼 모텔? 여인숙? 그런 데서 우리 할아버지가 주무신다고? 차라리 노숙을 하시면 노숙을 하셨지, 절대 그런 데서 주무실 분이 아니다.
그때 내가 반쯤은 농담 삼아, 서울에 나 몰래 새할머니라도 숨겨 놓고 계신 거 아닐까 하고 의심했었는데, 새할머니가 아니고, 초호화저택을 숨겨 놓고 계셨네?
아니! 하나뿐인 손주는 교도소 독방 같은 하숙방에 처박아 두고!
아. 물론 괴로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난 그 하숙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면적만, 단순하게 면적만 따져봤을 때, 교도소 독방 같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나는 하숙방에 처박아 두고 당신은 북악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비싼 정원수가 심어진 아름다운 정원에는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자쿠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자쿠지에 몸을 담근 채 은은히 들려오는 길상사의 범종 소리를 들으며 샴페인을 홀짝이고 계셨다?
와. 이거 갑자기 배신감 느껴지네.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근시안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할 때가 아니다. 멀리, 조금 더 멀리 바라보자.
이 고급주택은 할아버지의 거주지.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법정상속인.
즉! 내가 이 주택의 유일한 상속인.
PROFIT!
마법 소녀도 아니고, 본캐와 부캐의 갭이 이렇게 차이 나는 우리 할아버지, 당신의 이중생활은 전부 이 손자를 위한 것이었군요.
손자는 당신의 깊은 뜻을 곡해하고 있었나이다. 불민한 손자를 용서….
잠깐만, 혹시, 진짜 여기에다가 새할머니 숨겨 놓고 계신 거 아냐? 오늘 부른 것도 새할머니와 인사를 시키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새할머니가 생기면, 저기, 상속순위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인사드려라. 오늘부터 너의 할머니니라.’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곱게 나이 드신 기품 있는 할머니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거 아니야?
그 생각을 하는 타이밍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강우현 그리고, 처음 보는 여성분이.
***
강우현과 함께 등장한 여성분은 기품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차를 우려내고 계신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서재에 퍼져 나가는 그윽한 다향(茶香)을 음미하면서 여성분이 차를 우려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나도.
아름다운 분이다. 일단 그게 첫인상이다. 나이는 많아봤자 마흔다섯? 젊은 사람처럼 꾸미면 30대 초반까지도 보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미모가 훌륭하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뭐랄까? 그 부처님의 광배(光背)처럼 은은하게 풍겨져 나오는 기품?
간단히 말하면 여사님이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고, 그 아름다움에 다가가기 어려운 품격, 기품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 성경에 나오는 성녀(聖女)가 저런 이미지이지 않을까 싶은?
잠깐만, 설마 저분이 우리 할아버지의 새할머니 후보는 아니시겠지? 설마….
안 된다. 절대로. 우리 새할머니로는 너무 아깝다. 아름다움과 기품으로 봤을 때, 내 할머니로는 합격인데,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너무 과분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성분께서 찻주전자를 들어 첫 잔을 따르고, 가장 먼저 할아버지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홍차의 은은한 향기가 서재 안에 천천히 퍼져나간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런 나도 참 고급스러운 찻잎을 쓰셨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홍차의 향이다.
할아버지는 찻잔을 들어 올려 향기를 맡은 후, 입으로 가져간다.
“솜씨는 여전하구나.”
작게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의 말.
그 말 안에는 이미 아는 사이. 그리고 예전에도 차를 대접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설마…. 진짜 새할머니는 아니시겠지?
할아버지의 칭찬에 여성분은 작게 미소를 지은 후, 두 번째 찻잔을 따랐고, 내 앞에 내려놓으신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회장님보다 나에게 먼저 차를 내어주셨다는 것은?
내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의미다.
일단 나도 찻잔을 들어, 할아버지처럼 향을 음미하고 가볍게 입에 머금었다.
좋은 것 같다. 내가 뭐 홍차에 대해서 아는 게 없지만, 확실한 것은 무언가 감칠맛이 느껴졌다.
물론 쥐뿔도 모르는 나는 쓸데없이 아는 척하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여성분은 그런 나에게 작게 미소 지어주신 후에야 회장님과 강우현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네 사람의 찻잔을 모두 채우고 다기(茶器)를 정리한다.
“그래. 어찌 지내는가?”
할아버지가 물었다.
여성분은 손을 멈추고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신다.
“어르신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외모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가 여성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서, 나는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
여성분이 다기를 정리해 서재 밖으로 나간 후, 우리 네 사람은 말없이 각자 앞에 놓인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는 눈까지 감고서 그윽한 다향을 즐기고 계신다.
그런 할아버지를 나는 의심스럽게 보고 있고.
분명 무언가가 있다. 저 음흉한 할배가 단순히 집 자랑을 하겠다고 날 불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있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동안 할아버지의 행보를 봤을 때, 그 무언가는 내게 그다지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굴려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맞아도 어딜 맞는지, 언제 맞는지 알고 맞아야 좀 덜 아픈 건데, 준비 없이 맞으면 더 아프고, 더 서러운 법인데, 도대체 할아버지가 뭘 꾸미고 있는지 짐작 가는 게 없네.
생각해! 한수! 생각을 멈추지 마!
일단 저녁을 먹겠지?
올라오면서 봤다. 1층 거실에 설치된 테이블, 그리고 세팅하던 사람들.
단지 밥을 먹자고 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나 말고 다른 손님이 계시겠군.
역시 새할머니인가?
조금 전 그 여성분이?
안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 허락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절대로!
반대해야 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소리쳐야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눈에 흙을 파팟 하고 뿌리려나? 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어쩔 수 없군요. 허락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강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귓속말을 전해 들었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
예상대로 다음 일정은 저녁 식사였다.
복도와 계단을 타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음식 냄새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음. 음식 냄새로 봤을 때, 한식 종류 같다. 뭔가 갈비찜 특유의 짭쪼롬하고, 기름진 육향이 느껴진다.
뭐, 사실 냄새 같은 거 없어도 한식이라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다. 아니, 한식일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는 국 없으면 밥 안 먹는 한식 성애자 아니시던가.
뭐 사실 나도 그렇고. 아니, 지금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니지.
과연 1층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설마 조금 전 그 여성분이? 새할머니의 자격으로?
아니면, 다른 새할머니?
기왕이면 나는 고상하고 기품 있고, 용돈을 자주, 많이 주시는 그런 할머니가 좋은데.
설마 조금 전 그 미부인보다 더 젊은 분이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할아버지가 양심 같은 거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설마….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니, 아까 올라오면서 보았던 테이블 주변에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에는 용돈을 자주, 그리고 많이 주실 것 같은 새할머니는 없었다.
대신, 남자들, 정확히 말하면 아저씨들, 불편해 보이는 양복을 갖춰 입은 세 명의 중장년 남성이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세 분 중 한 분, 다른 사람들처럼,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얼굴에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분에서 내 시선이 멈추었다.
유주원 교수님. 내 대학 은사님,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스승님.
유 선생님. 유 선생님이 거기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