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18
119 :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나는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가고 있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이 미어터졌겠지만, 아니, 출퇴근 시간이 아니니까 미어터지지는 않았으려나? 아니. 그래도 2호선인데, 11시라고 앉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건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우습게 보는 거다. 더군다나 신림 쪽.
아무튼, 평소 같으면 서서 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앉아서 가고 있다. 원한다면 누워서 갈 수도 있다.
왜냐고?
오늘 토요일이거든.
확실히 토요일 오전에는 사람이 없네.
자. 왜 내가 토요일 오전에 학교를 가고 있느냐?
호출을 받았거든.
***
두 시간 전.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한참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꿀 수 있는 꿈 중에서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아주 아름다운 꿈, 매일 꾸고 싶지만, 다른 사람, 특히 서현 님이나 지연이에게 ‘어젯밤 이런저런 아름다운 꿈을 꾸었어요’라고 말해줄 수 없는 종류의 그런 꿈을 말이다.
그때 전화벨 소리를 들었고, 영원히 깨지 않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에서 억지로 끌려 나와야만 했다.
처음에는 알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재빨리 전화기를 뒤집어 음소거를 시키고, 다시 아름다운 꿈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짧은 문자 알림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가 수신을 거부하자, 문자를 남겼다는 의미다.
깨톡이 아니고 문자?
나는 일단 눈을 떴다. 그리고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9시 20분. 애매한 시간이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목요일 같았으면 이미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토요일 아니던가?
토요일도 그냥 토요일이 아니고, 어제 그 끔찍했던 금요일, 최근 들어 가장 높은 스트레스 지수를 기록했던 그 금요일의 다음 날이라는 이야기다.
좀 더 자야 했다. 혈중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의 농도를 낮춰야 했다. 그런데, 저 전화가, 바로 날아온 문자가 나의 수면을, 스트레스 해소를, 아름다운 꿈나라로의 여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누구냐? 용서 안 한다. 누구든 당신이 저지른 이 만행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먹고서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일단 부재중 확인부터.
이름 대신 번호가 떠 있다.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라는 이야기다.
스팸이나 피싱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다음에 문자.
역시 이름 대신 번호가 떠 있다. 부재중 전화번호와 같은 번호가.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누구든 후회하게 해주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문자 확인 아이콘을 눌렀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 문자 남깁니다. 확인하면 연락 주세요. – 유주원’
유주원? 유주원!
유 선생님!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 뒤에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유 선생님의 목소리.
“네. 선생님. 저 한수입니다.”
-그래요. 한수 군. 혹시 내가 잠을 깨웠나요?
“아닙니다. 일어나 있었습니다.”
하얀 거짓말. 선생님 때문에, 20대 청년이 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군요. 다른 게 아니라 혹시 괜찮다면 오늘 점심 식사를 같이하면 어떠할까 싶어서요.
“점심이요? 네. 괜찮습니다.”
-그러면 있다가 점심쯤에 학교에서 볼까요? 한수 군은 언제가 편한가요?
“저는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일단 나는 연구실에 나와 있으니, 한수 군 편한 시간에 보도록 할까요?
“네. 점심이면 12시 정도. 괜찮으신가요?”
-12시. 괜찮겠네요. 그때 볼까요.
“네. 그럼 그 시간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
유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점심을 먹자는 권유를 받았다. 12시에 만나기로 했다.
이게 내가 토요일 오전에 지하철을 타고 있는 이유.
그나저나 갑자기 선생님이 왜 보자고 하셨을까?
아니, 분명, 그 일 때문이겠지. 어제의 그 일.
어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냥 많은 일도 아니고 놀랄 일들이.
그중에서 베스트를 뽑으라면, 역시 승환이겠지?
그다음이 유 선생님.
유 선생님을 거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다. 그냥 뵌 것도 아니다.
서주(書柱). 유 선생님이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기둥 중 하나이고, 그중에서도 서주(書柱)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니.
유 선생님은 승환이와 다르게 날 보고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 말은?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을까?
아니,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교수님 제자가 된 것도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의지가 작용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일단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알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전화 통화에서 선생님은 나를 ‘한수 군’이라고 하셨지?
설마 학교 가서 대면했을 때, 유 선생님이 나 보자마자 ‘작은 어르신 오셨습니까? 노복이 인사드립니다’하며 고개 숙이시는 건 아니시겠지?
솔직히 그건 싫은데….
***
유 선생님과 함께, 흔히 교수 식당이라고 불리는 교내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행스럽게도, 유 선생님은 평소처럼 나를 대하셨다. 존대를 하시기는 하셨지만, 그건 항상 그러신 거고.
점심을 먹는 동안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이 학교생활과 공부에 관한 내용이었지,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서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선생님으로부터 연구실에서 차를 한잔하자는 권유를 받았고, 나는 이제부터가 메인 이벤트임을 직감했다.
유 선생님은 차를 우려낼 때까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전기 주전자에서 끓어오른 물이 두 잔의 보이차로 우러나는 시간 동안 불편한 마음으로 연구실 소파에 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표정과 말투에서, 우리 둘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에서 사주의 하나인 서주(書柱)와 작은 어르신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작은 어르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고개를 숙이신다.
나는 그런 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경하는 스승님, 나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유 선생님이 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스스로 아랫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선생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했던 생각, 준비했던 말이 있었다.
“듣겠습니다.”
“말씀드렸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의 저서를 보았습니다. 그 저서를 읽고, 이런 책을 쓰는 분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에 왔고,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년, 신입생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직책명인 교수보다 선생으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제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제자들에게 항상 존대를 사용하시는 선생님을 보면서, 저는 이 학교에 온 저의 선택이 짧은 삶이지만, 제 선택 중 가장 잘한 선택이라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학자로서, 그리고 인생의 스승을 이용하여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한국대의 교수이시기에, 단지 저에게 성적을 주시는 교수님이시라서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 선생님은 내 말을 경청하고 계신다. 언제나처럼.
“아침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선생님께서 저를 한수 군이라고 불러주셨을 때, 기뻤습니다. 하지만, 지금 선생님께서 제게 사과를 하실 때,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하는 제자이고, 선생님도 제가 존경하는 그 유 선생님이신데, 저희 둘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바뀌게 되는 것이 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유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시더니 다시 말씀하신다.
“한수 군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유 선생님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보이신 후, 찻잔을 드신다.
나도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보이차 특유의 향이 잠시 동안 코끝에 머물다 사라졌다.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요. 한수 군의 이야기는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칭찬입니다. 작년에 궤주님, 강민철 회장님으로부터 한수 군과 승환 군이 우리 학교로, 우리 과 전공을 선택해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어르신의 의중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승 작업을 위한 포석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생활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르신도, 한수 군도, 그리고 승환 군도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제가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되겠지만, 저도 당분간은 맹자께서 말씀하신 군자의 세 번째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유 선생님의 얼굴은 평소 유 선생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그렇게 나와 유 선생님은 커다란 한고비를 넘긴 후, 찻잔을 사이에 두고 평소의 사제관계로서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를 들어 박승환이 그 자식은 유 선생님 수업 힘들다고 수강 신청 안 했다는 이야기 같은 거.
유 선생님 수업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다. 전필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승환이가 어쩔 수 없이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되는 그날, 선생님은 오늘 내가 해드린 말을 기억해 내실 것이다.
이것이 카르마 아니던가. 후후.
“승환 군은 어제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군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던데.”
놀랐지. 아주 많이 놀랐지. 특히 마지막에.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어제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조금 충격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박승환 그 자식, 놀라기는 많이 놀랐겠지만, 금세 털어버리고 일어날 놈이라고 확신한다.
아무튼 그렇게 한 30분 정도 더 승환이 험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존경하는 스승님과의 대화는 즐겁지만, 염치없이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럼. 선생님. 저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막 몸을 돌려 문을 열려는데, 선생님이 다시 날 부르신다.
“한수 군.”
“네.”
“오늘 만나면 이야기한다는 것을 잊어먹고 있었군요.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부탁? 유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려야지!
“네. 말씀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제 여식이 한수 군에게 연심을 품고 있습니다.”
“네?”
“물론 한수 군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딸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더군요.”
“네?”
“한수 군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지연이를 잘 부탁합니다.”
“…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여식, 딸 가진 아버지, 지연이?
유 선생님의 딸 지연이? 유지연?
그 유지연? 우리 지연이?
그 순간 의식의 수면 아래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승환이가 그런 말을 했었다.
‘유 선생님에게 잘 보여 봐. 따님이 엄청나게 예쁘다는 소문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