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35
136 : “한수 참 못됐다.”
“네?”
지연이?
이 맥락에서 지연이 이름이 나온다고?
“지연이하고 사귀는 거 아냐?”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물어본다.
“아니요. 지연이하고 저 그런 사이 아닌데요.”
“그래? 그럼 헛소문이었던 건가?”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
소문?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데요?”
“축제 끝나고, 지연이가 고백하고, 한수 네가 받아들였다고.”
“그런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는데요?”
“술자리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 안 나네.”
수정이 누나가 별것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한다.
그런 소문이 돌았다고? 술자리에서?
“아니야?”
수정이 누나가 물어본다.
“네. 아니에요. 지연이하고 저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래? 고백받은 적 없어?”
고백? 받기는 받았지.
아니, 그걸 고백이라고 해야 하려나?
축제가 끝나고, 과방에서 피자를 시켜놓고 뒤풀이를 하던 그 날.
이중훈이 지연이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다 선배인데, 왜 한수만 오빠라고 부르냐고.
-저 한수 오빠 좋아해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부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래도 괜찮죠?”
지연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걸 고백이라고 해도 될까?
지연이가 이어서 이렇게 말했었으니까.
-철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는데, 제 솔직한 마음은 당분간 지금 같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한수 오빠가… 그… 특별하게 좋기는 한데, 지금 당장 사귀고 싶다거나, 남자친구가 되어서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거나, 이런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
나는 수정이 누나에게 그렇게 적당히 그 날 오갔던 말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수정이 누나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더니, 작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지연이네. 역시.”
그렇게.
역시 지연이라고? 그게 무슨 의미지?
궁금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수정이 누나가 설명해주었다.
“그때 도촬 사건 때문에 지연이하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눴었거든. 밥도 한 번 같이 먹고. 그때 이야기하면서 지연이가 참 똑똑하고 바른 애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날 지연이가 자기 마음도 솔직하게 잘 드러내면서도, 주변 사람을 배려해서 똑똑하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칙 아니니? 그렇게 예쁜 애가 똘똘하고, 착하고,”
동의합니다. 지연이는 반칙이죠. 사기 캐릭터죠, SSS급이죠. 치트 캐릭터죠.
내 이야기도 아닌데 지연이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잠깐? 기분이 좋아져? 내가 왜?
“아무튼, 지연이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거구나.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돌았던 거였구나. 음. 알겠어.”
수정이 누나는 뭔가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가 된 듯,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그래서 한수 너는 뭐라고 했어?”
그러더니 갑자기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
“저요? 뭐, 특별한 말 안 했는데요.”
그랬다. 뭐 그 이후에 특별한 말한 게 없다.
그날 집에 같이 가면서, 학기 초에 있었던 해프닝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다음에 특별히 뭐 내가 지연이의 고백 비스무리한 것과 관련해 이야기했던 적은 없다.
사실 그렇지. 지연이는 당장 사귀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그냥 다 같이 우당탕, 와장창하며 노는 게 즐겁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랬지.
그리고 시간도 자연스럽게 흘렀고, 지연이도 그와 관련해서 뭐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고.
물론 그사이에, 제이슨의 습격도 있었고, 윤기훈이와 할머니 건도 있었고 해서 지연이와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붙어 다니기는 했지만, 그날 그 고백 비슷한 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수다 떨고 그랬지.
“한수 참 못됐다.”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
“네?”
“그 날 이후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런 적 없다고?”
“…네.”
내 말에 수정이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수야.”
“…네.”
“물론 남자도 그렇겠지만, 여자는 고백할 때,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해. 백 번도 넘게 생각하고, 천 번도 넘게 고민해서 하는 게 여자의 고백이야.”
“….”
“단순히 자존감에 대한 문제가 아니야. 상대방이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의 친구들 사이에서 술안줏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설사, 받아들여 줬다고 해도, 이 사람이 정말 나에게 마음이 있어서 받아주는 것일까? 단순히 육체적인 부분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닐까? 그 외에도 정말 수천, 수만 가지의 고민과 걱정을 하고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고민과 두려움을 뛰어넘었을 때만 고백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거야.”
수정이 누나는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래. 지연이가 그렇게 말했다고. 당장 사귀고 싶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지금처럼 이렇게 다들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그게 100% 진심은 아니야. 여자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그 사람도 나를 특별하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거야.”
“….”
“나는 모르지. 한수 네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지연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고, 물어볼 수도 없겠지. 하지만, 선배로서, 그리고 지연이를 아끼는 언니로서 한마디 하자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연이에게 답을 해줘야 해. 그게 사람의 마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해.”
“…네.”
나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주제넘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맞는 말씀인데요.”
“그리고 나는 찬성.”
“네?”
“지연이하고 너. 괜찮은 것 같아. 아마 모르는 사람들은 지연이가 아깝다고 그런 말을 하겠지만, 한수 너도 꽤나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수정이 누나가 웃으며 그렇게 내 칭찬을 해준다.
평소 같으면 역시 누님께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누나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은 아니지.
“혹시, 별로야? 지연이가?”
“네? 아니요. 설마요.”
여자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지연이는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지.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지연이가 아깝다.
“그러면?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수정 누나가 그렇게 물었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머릿속에 서현 씨가 떠올랐다.
지난 주말, 유달리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서현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요.”
나는 그렇게 답했다.
***
나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정확히는 강의실에 앉아만 있었다.
칠판 앞에서는 조별 과제 발표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임명하고,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백낙신을 비롯한 탐관오리 수령 몇이 적발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삼정이정청 설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탐관오리의 처벌은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삼정이정청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은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계속 이어졌습니다. 임술민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발표자가 역덕인지, 조별 과제 발표답지 않게 아주 열성적으로 발표를 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수정이 누나가 했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유지연.
학기 초, 말도 안 되게 예쁜 애가 우리 후배로 들어왔다는 소문으로 처음 지연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들었지만, 아주 작은 관심도, 호기심도 갖지 않았다.
지수에게 그 끔찍한 일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지연이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시선을 돌릴 마음의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친구 놈들에게 억지로 끌려간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얼굴을 봤을 때도 그냥 예쁘긴 하네. 그 정도의 느낌이었지,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나가면서 인사나 하는 그런 정도였는데, 아니, 반년 전에는 유지연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지금 지연이는 내 옆에 서 있다. 상당한 존재감을 가진 채로.
축제가 전환점이었지. 아니, 어쩌면 그 시작은 사물함 사건이었다.
지연이가 층수를 착각해 한 층 위에 있는 내 사물함을 열려다 비밀번호 입력 횟수를 초과했고, 사물함이 잠겨 버렸다.
뭐, 작은 해프닝이었다. 신력으로 간단히 열어 버렸으니까.
두 손에 크로우바를 들고 뛰어오는 그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니 나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간다.
귀여웠지. 그 녀석.
아무튼, 그렇게 작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면 지금의 지연이와 나는 이런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아니, 지연이 녀석은 내 번호를 알고 있었으니, 내가 지연이 전화번호를 알게 되고, 깨톡 친구로 등록을 하고, 그날 밤에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고, 다음날 단둘이 만나서 밥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며칠 전까지 전화번호도 모르는 후배였는데,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날만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하게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축제. 우연치 않게 같은 요리팀에서 일하게 되었고, 도촬 사건이 있었고, 의도치 않게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지연이 곁을 지키게 되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우리 사이의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지금 찬찬히 돌이켜보니, 마치 무슨 시나리오라도 써놓은 것처럼 지연이와 나 사이의 거리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축제가 끝나고 그날, 지연이가 마음을 보여준 그 날이 있었고, 그 이후 지연이는 계속 내 곁에 있었다.
제이슨 폭행 사건이야 지연이도 관계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해도, 사실 상관도 없는 윤기훈 처리 과정에서 지연이는 항상 우리와 함께했었다.
이삿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나나 우유를 먹고 있는 지연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어제는?
다른 후배였다면 우리끼리 할 말이 있다고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연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옆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지연이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어느새 지연이는 ‘우리’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지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밤, 지연이가 마음을 보여 준 그 날,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던 그 날 밤.
그 예쁜 눈동자로 내 눈을 바라보면서.
-고마워요. 그때 구해줘서.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의 얼굴이 꽤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