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44
145 : “이미 감싸주고 있어.”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돌아오지 못하는 머나먼 길을 떠나셔야 하는 어머님이, 아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 모습이.
-미안해. 우리 아들. 지우를 부탁할게.
그런 어머님의 말씀에, 눈물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창회의 모습이.
마치 내가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오빠는 그 날 화장로 앞에서 엄마의 마지막 말을 되새기면서 강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대요. 단순히 육체적인 강인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강인함까지 갖추겠다고 결심한 거죠. 그래서 운동을 시작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짬짬이 알바를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그 지옥 같은 집을 탈출하기 위해서, 하나뿐인 여동생을 지옥 같은 그곳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창회가 방 두 개짜리 좁은 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실 저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싫지는 않거든요. 고집 쎈 노인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마 잃은 손녀가 가여워서 할아버지 나름대로 저를 사랑해주셨어요.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살가운 시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집살이를 시켰다거나 부당한 대우를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뭐, 저도 나중에 엄마 일기를 보고 알았지만.”
“…오빠에게 이야기해 줬어?”
지연이가 묻는다.
“응. 하지만, 오빠는 받아들이지 않았어.”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제가 2년 동안 저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 방을 나와서 다시 검정고시를 치고, 지금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오빠도 오빠지만 할아버지 덕분이기도 해요.”
검정고시, 그래서 지우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리지만 같은 학번이었던 것이구나.
“사실 지금도 주말에 외박 나오면 한 번은 고향에 가고, 한 번은 여기로 오고 그러고 있어요. 오빠도 아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지우가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이 친구도 마음이 깊다.
그 미소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부터 오빠가 조금 변했다고 느꼈어요. 평소처럼 무뚝뚝하고, 말도 없고, 징그러운 헬스는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조금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살살 캐봤더니, 오빠들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아. 드디어 우리 오빠도 친구가 생겼구나.”
지우의 표정이 조금 변한다.
“제가 오빠 친구들 보여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한 번을 안 보여주더니 오늘 드디어 보게 되었네요. 한수 오빠밖에 못 봤지만, 그래도 오늘 이렇게 만나고 나니 확실히 알겠어요,”
“…뭐를?”
“오빠들이, 그리고 지연이가 참 고마운 사람이라는 사실이요.”
지우가 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
“일단… 다른 선배들에게는 말 안 하는 게 좋겠죠?”
마음 깊은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그래. 부탁할게.”
“아니에요. 당연히 그래야죠. 저도 일단은 조용히 있을게요.”
“그래. 고마워.”
내가 고맙다고 하자, 지연이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천천히 말한다.
“…자랑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나는 말 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민주가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냐고 물었을 때, 그때 날 바라보던 민주의 눈이 부럽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그 눈을 보는데,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빠들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오빠들과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어서, 그런 내 자신이 뭔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는 작게 웃는다.
평소의 귀여운 웃음이 아니다. 슬픔이 묻어 있는 웃음이다.
“오늘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으면서도, 비슷한 기분이 느꼈어요. 할머니가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빠가 아버님 사진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농담을 하는 창회 오빠의 모습을 처음 볼 수 있어서, 나만 볼 수 있어서, 내가 오빠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젖어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내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오빠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떤 아픔들이 있는지, 어떤 슬픔들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오빠들이 웃고, 나에게 웃어주는 것이 좋아서, 그저 그게 좋아서 오빠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서,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지연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지연이의 얼굴을 감춘다.
하지만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눈물은 감추지 못한다.
나는 가방 안에 있는 휴지를 건네는 대신, 손을 뻗어 지연이의 어깨에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작게 떨고 있는 그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며 말했다.
“아까 지우가 그랬지. 너도 같이 들어주었으면 한다고.”
여전히 숙어진 지연이의 머리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인다.
“창회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신뢰할 수 있다고.”
“…네.”
“너 혼자서 다가온 게 아니야.”
내 말에 지연이가 살짝 고개를 든다.
“단순하게, 우리하고 같이 놀고 싶다고 너 혼자서 우리에게 다가온 게 아니야. 우리도 너에게 같이 다가간 거야.”
지연이의 젖어있는 눈동자가 커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런 지연이에게 미소 지어주었다.
“기억나? 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다시 지연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고민을 했었어. 우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너를 매일 바래다줘야 하는데, 어떻게 핑계를 댈까? 그리고 내가 입원한 상황도 말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그리고 그때 애들이 걱정한 게 뭐였냐면 혹시라도 니가 채무감을 가지면 어떻게 할까였어.”
‘채무감’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의미를 알아챈 지연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내가 농담처럼 그랬거든. 채무감 대신, 자기 자신이 위험하다는 상황을 먼저 걱정할지도 모른다고.”
내 말에 지연이의 눈빛이 변한다. 너무해요. 그런 눈빛으로.
“알지. 지연이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지. 그냥 농담이었어. 아니, 정확히는 그 녀석들이 발끈하는 게 듣고 싶었어.”
“…발끈했어요?”
“발끈했지. 그런 애는 아니야! 그러면서.”
내 재연에 지연이가 작게 웃는다.
거봐.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
“아무튼 일단 입원한 건 비밀로 하고, 우리가 돌아가면서 널 바래다주자. 그렇게 결정을 내렸는데, 그때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었지?”
“…네.”
“궁금하셨을 텐데요?”
“궁금했지만…. 특히 오빠가 안 보여서 불안했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이야기해 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가 기특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지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이 기특한 녀석 같으니. 어머님이 누구니? 도대체 널 어떻게 키우셨니?
어머님은 몰라도 아버님은 아는구나….
“내가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창회한테 처음 들었을 때, 니가 뭐 물어봤는지 기억나?”
“…오빠 왜 다쳤냐고?”
“아니.”
“뭐였죠?”
“너 바래다주는 거, 그거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거냐고.”
내 말에 지연이가 기억 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수업 끝나고 바로 연락 주겠다고, 혹시 선배들 수업 있으면 과방에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렇게 하면 폐를 조금이라도 덜 끼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어. 기억나?”
“…네.”
“창회가 그때 그랬어. 마음씨가 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봤다고.”
“네?”
“니가 궁금한 거 있다고 했을 때, 창회는 내가 왜 입원해 있는지, 내가 입원한 게 너하고 관련이 있는지, 그걸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그런 질문이 아니라, 제가 먼저 연락드리고 기다릴께요. 그러니까, 창회가 놀란 거지.”
내 말에 지연이의 얼굴이 조금 빨개진다.
예쁘다는 칭찬을 밥 먹어라 보다 더 많이 들었을 것 같은 지연이도 부끄러워하는구나.
“그때뿐만이 아니야. 기훈이 녀석 새로운 보금자리 찾는 과정에서도 지연이는 우리 중 하나였어. 관계자라서 우리가 널 포함 시킨 것이 아니야. 이미 너는 우리였으니까 함께한 거야.”
지연이의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다.
“나도 몰랐어, 창회 이야기. 처음 들었어. 다른 녀석들은 아직도 모르고. 하지만 우리가 창회가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친구가 된 건 아니잖아?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아. 이 녀석이 이런 상처가 있구나. 그럼 내가 친구가 되어줘야지. 그래서 친구가 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이 녀석 미친놈이구나. 같이 놀면 재미있겠구나. 그렇게 놀다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러다 상처도 발견하고, 얕은 상처라면 후벼 파주고. 깊은 상처라면 조심스럽게 감싸주고 하는 거지.”
“제가…. 같이 감싸줘도 될까요?”
지연이가 그렇게 묻는다.
날 바라보는 눈동자가 다시 젖어 들어간다.
“이미 감싸주고 있어.”
내 말에 지연이가 미소 짓는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 대신, 항상 보여주었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지연이의 미소였다.
***
일요일 오전,
나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왜냐!
할 게 없거든! 할 게 없단 말이다!
서현 씨는 다시 공치러 간다고 연락이 왔었다.
어른들이랑 공치는 거 하나도 재미없다고, 어서 빨리 돌아오고 싶다는 말도 덧붙어 있었다.
불쌍한 우리 서현 씨.
나중에 회장님에게 정식으로 항의 넣어야 하겠어.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혼나겠지?
아무튼, 서현 씨는 저 멀리 쿤밍에서 열심히 접대골프 중이시고, 나는 할 것 없어 빈둥거리고 있고.
뭐하지? 뭘 하고 오늘 하루를 보내야 잘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오늘은 좀 타락하고 싶은 기분인데? 내 육체와 영혼을 쾌락의 한가운데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인데?
좋아.
일단 라면부터 끓이자.
평소에는 서현 씨 눈치 보여서 쉽게 끓이지 못하는 라면을 끓여 먹자.
물 조금 넣고, 염도 팍팍 올려서 아주 맛있고, 건강에는 안 좋은 그런 라면을 끓여 먹는 거야.
후후후. 일탈의 달콤함이란 이루 형용할 수가 없구나.
어떤 라면을 끓일까? 오늘 어둠의 제단에 어떤 공물을 올릴까?
그런 고민을 하며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린다.
깨톡이 온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깨톡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잠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
-한수 오빠.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놀라셨죠? 갑자기 깨톡 해서.
-놀라기는. 어제 번호 다 교환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갑자기 죄송한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오늘 잠깐 만나 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 언제?
-제가 오늘 오후 6시까지 학교로 복귀해야 해서, 혹시 1시 정도는 어떠세요?
-ㅇㅇ 괜찮아.
-괜찮으세요?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1시면… 점심이나 먹을까?
-네. 좋아요.
-그럼 창회랑 같이 보자. 어디서 볼까?
-저기. 죄송한데요….
-응?
-오빠는 모르게 만났으면 하는데요….
***
창회는 모르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깨톡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김창회가 그 단단한 팔뚝으로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이었다.
아니, 장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기절했다고 팔을 풀어주지 않고, 거기에 더 힘을 주어 내 목뼈를 박살 내버리는 그런 상상이었다.
“감히… 내 여동생에게 그 더러운 손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내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창회의 모습이 마치 실제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안 된다. 절대로. 단둘이 만나서는 안 된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일단 목숨이 붙어 있어야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 그렇다고 내가 창회 여동생이랑 사랑이라는 걸 하겠다는 건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도대체 지우는 무슨 생각인 거지?
그렇게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다시 깨톡 알림이 온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고,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 그리고 괜찮다면 승환 오빠도 같이 만났으면 하는데, 혹시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승환이?
갑자기 여기서 승환이가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