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50
151 : …후회해?
나는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오후 수업이 있었으니까.
찬희 녀석이야 ‘이런 상황에서 수업이고 나발이고 아무 의미 없다!’며 수업 거부를 선언했고, 박승환과 이중훈은 그런 찬희에게 ‘그래. 잘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낮술이 최고지. 일단 낮술부터 먹으러 가자’고 악마의 유혹을 시전했지만, 나는 수업 들으러 왔다.
찬희 마음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지만, 내 학점은 치유할 수 없잖아.
그렇다고 내가 아주 방관자 모드를 취한 것은 아니다.
일단 속단하지 말아라. 상황이 확실해지면 그때 유라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든 해라. 지금 당장은 경거망동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솔직히 알맹이 있는 이야기 한 건 나밖에 없다. 승환이나 중훈이는 걱정하는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축제다! 피의 축제다!’라고 소리치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찬희 녀석도 일단 수긍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아무튼 그렇게 대충 마무리하고 다시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공간에 최유라가 있다.
뭐 사실 공교로울 것도 없다. 전공선택 수업인데, 동기와 같은 수업을 듣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
칠판을 기준으로 1시 방향에 앉아 있는 최유라는 열심히 필기하면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런 유라의 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이 진짜 찬희와 형태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유라, 내 친구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녀석 나름, 아니 꽤 괜찮은 녀석이다.
뭐랄까? 겉과 속이 같은 녀석이랄까? 여자애들 특유의 그 내숭 같은 게 없다.
잘한 건 잘했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 그렇게 서슴없이 이야기해 준다.
지수가 날 뻥 하고 차버렸을 때, 여자 동기들 중에서 유일하게 날 위로해 준 녀석이 바로 최유라였다. 지수도 유라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했지.
남동생만 둘이라고 그랬던가? 아무튼 집안 장녀라고 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누님 같은 화통한 면이 있다.
그런 유라가 양다리라….
사실 믿기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아닐 거야. 내 친구 상남자 유라는 그런 애가 아닐 거야. 나믿유믿’하기도 좀 그런 것이…. 증거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일단 중훈이가 어제 목격한 그 장면은 그렇다고 치고, 찬희에게 ‘조카’를 만난다고 말한 것이 치명적이다.
한두 살 차이 나는 조카와 고모? 이모? 아무튼 그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식선에서 봤을 때 일반적인 관계라고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설사 두 사람이 그런 관계라고 해도 숨길 이유가 뭐가 있을까?
거짓말을 했다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인 사이에서 거짓말은 관계가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 지표이다.
만약 유라의 ‘조카를 만난다’라는 말이 거짓말이라면, 찬희와 유라, 두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갔다고 봐야 한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친구 녀석들은 모르는 사실 하나를 더 알고 있지.
-니네 학번에 유라라는 애 있지? 어제 선릉에서 수정이랑 밥 먹고 나오다 우연히 봤는데, 남자애랑 같이 딱 붙어서 걸어가더라고. 우리도 좀 그래서 아는 척 안 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수정이가 그러더라. 유라 옆에 있던 남자애 우리 과라고. 그나저나, 요즘 확실히 연상연하 커플이 유행이긴 한가 보네. 수정이가 그러던데? 남자애 우리 과 1학년이라고.
진철이 형이 이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다.
찬희를 1학년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하지만.
-형태였어. 유라 옆에 있던 남자. 너랑 같이 요리 팀에서 일했던 그 형태. 술이 좀 많이 취한 것 같더라. 유라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모습이었고. 아는 척하기 뭐해서,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치기는 했는데….
수정 누나가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1학년 형태였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을 때, 뭐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불쾌한 느낌이 척수를 타고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일요일 저녁, 찬희가 열심히 과외를 하고 있었을 그 시간에, 유라는 형태와 같이 있었다. 형태는 술에 취해 있었고, 그런 형태를 유라가 부축하고 있었다.
찬희가 알았을까?
아니,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열심히 알바 하는 동안 유라가 형태와 단둘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번 일과 연관 짓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테니까.
***
수업이 끝나면 제일 먼저 가야 하는 곳은?
사물함이다. 무거운 전공 책을 재빨리 처박아놔야 하니까.
그리고 유라의 사물함과 내 사물함은 가까운 위치에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평소처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물함을 향해 걸어갔다.
유라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마음속에 상남자를 품고 있는 평소의 최유라였다.
사물함에 책을 집어넣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라운지로 향했고, 거기서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자판기 커피에는 담배가 딱인데.”
다디단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최유라가 그렇게 헛소리를 한다.
“복학생들이 내 동기를 망쳐놨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1학년들이 같은 이야기 하고 다니더라. 니네들이 지연이에게 나쁜 물 들였다고.”
그렇게 받아친다.
음. 할 말이 없네.
“그나저나 금요일에 창회 생일 파티 한다며?”
유라가 물어본다.
“어. 올 거지?”
“가야지. 근데 할 수 있겠어?”
“뭐를?”
“창회 생일빵. 가능하겠어?”
“구경만 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상황 봐서. 니들이 성공하면 그때 한 손 돕고.”
“실패하면?”
“119는 불러줄게.”
“아주 고오맙다. 고오맙습니다.”
내 말에 웃는 유라는 평상시의 유라였다.
그런 유라에게서 두 남자 사이에서 부도덕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궁금하기는 하다. 진짜 그날 어떤 난장판이 벌어질지. 1학년 중에서도 몇몇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1학년들하고 친한가 봐?”
내가 그렇게 슬쩍 운을 띄웠다.
“지연이만 예뻐라 하는 니들하고는 달리, 나는 모든 후배를 사랑하는 선배니까.”
유라가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홀짝인다.
후배를 사랑하는 선배?
저거 중의적 표현인가? 지금 단서를 슬쩍 흘린 건가?
“괜찮은 애들 좀 있어? 1학년 중에서?”
“음. 일단 지연이가 제일 괜찮지. 지연이는 솔직히 좀 사기다 싶어. 얼굴 예쁘지. 착하지, 성격 좋지.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지. 그거 빼면 지연이만 한 애가 없지.”
“싸우자는 이야기?”
“어머? 여자를 때리겠다고?”
“야. 하지 마. 어디서 여자 흉내야.”
내 말에 최유라는 웃는다.
평상시의 유라다. 확실히 내가 아는 그 최유라다.
“남자애들 중에서는 무준이도 괜찮아. 애가 리더십도 있고. 믿음직스럽고. 생긴 것도 잘생겼고.”
“무준이? 그런 애도 있었어?”
“무준이 몰라? 너무 여자 후배들만 챙기는 거 아냐? 너 민주는 알지?”
“어.”
“거봐. 예쁜 여자 후배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 남자 후배는 관심도 없다 이거네. 참 못됐다.”
“아니. 나도 아는 남자 후배 있어.”
“누구.”
“형태.”
이렇게 형태 이름이 나오네.
“형태야 같은 요리 팀이었으니까 아는 거지.”
유라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는다.
형태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흠. 뭐지?
“접객 팀에 있던 애 기억 안 나? 키 크고 잘생긴 애.”
유라가 그렇게 설명하자 머릿속에 남자 하나가 뿅 하고 떠오른다.
중훈이 시다바리 중에서 기생오라비같이 재수 없게 생긴 녀석이 하나 있었다.
“아. 그 녀석…. 이름이 뭐라고?”
“정무준. 여자 선배들의 아이돌이라고.”
“너도?”
“아니. 내 스타일은 아니야.”
그렇게 쿨하게 대답하는 최유라.
이상하네. 유라의 모습에서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 깊숙하게 찔러볼까?
“그럼 1학년 중에서 최유라 씨 스타일은 누군데?”
“1학년 중에서? 없는 것 같은데? 난 연하는 별로라서.”
“찬희도 연하 같은데.”
내가 다른 미끼를 던졌다.
“정신연령은 확실히 낮지.”
유라의 대답이다.
“그런데 왜 사귀는 건데?”
내가 물었다.
유라는 말없이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 커피를 홀짝인다.
뭐지? 이 분위기는?
“한수야.”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어?”
“수업 또 있어?”
“아니. 없는데?”
“잠깐 시간 괜찮아?”
유라가 그렇게 물어본다.
***
학교 근처 작은 술집, 낮에는 밥을 팔고, 저녁에는 가벼운 안줏거리와 술을 파는 대학가의 선술집.
잠깐 시간 괜찮냐고 묻는 유라를 내가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다.
술을 먹여 마음속 깊은 곳에 진실을 끄집어내겠다. 그런 생각은 아니고, 그냥 아지트니까.
유라와 내 앞에는 생맥주잔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감자튀김이 있었다.
맥주는 반 정도 비워져 있었지만, 감자튀김은 처음 나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다.
“기억나?”
내가 유라에게 물었다.
“뭐가?”
“신지수에게 차였을 때, 니가 여기서 맥주 사준 거.”
내 말에 유라가 작게 웃는다.
“말은 안 했지만, 그때 고마웠다.”
“고마웠어?”
“뭐 적당히. 여자 동기들 중에서 그때 나 챙겨준 사람은 너밖에 없었지.”
“아무래도 다들 좀 입장이 좀 그랬어.”
“알아. 이해해. 그래서 너에게 더 고마웠던 것이고.”
“알면 앞으로 이 누나에게 더 잘하도록 하세요.”
유라가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어 올린다.
나도 작게 웃으며 내 잔을 들어 살짝 부딪힌다.
“그런 생각이 들어. 잘한 결정일까? 그런 생각이.”
맥주 한 모금을 마신 유라가 말을 시작한다.
나는 유라가 말한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는다.
“찬희랑 만나기로 한 거?”
“응.”
“…후회해?”
내가 물었다.
유라는 작게 고개를 흔든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유라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물끄러미 맥주잔만 바라보던 유라는 몇 분 정도 지난 후 다시 말을 시작한다.
“…찬희가 싫은 건 아니야.”
“…그래.”
“그런데도 자꾸 걱정이 되니까.”
“…어떤 걱정?”
“혹시라도…. 나중에…. 나랑 찬희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런 걱정?”
내가 물었다.
유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 커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고민이다.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찬희와 만나기로 한 결정, 혹시 확신이 없는데 일단 시작해보자고 그런 건 그런 건 아니지?”
내가 유라에게 물었다.
커플들 보면 그런 경우가 은근히 있다.
확실히 좋다거나 그런 마음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한번 만나볼까?’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커플들이.
“응. 그런 건 아니야.”
유라가 말한다.
그래. 최유라가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녀석은 아니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걱정이 된다라. 뭐 그건 어쩔 수 없어. 일종의 세금 같은 거니까.”
내가 말했다.
“세금?”
“프랭클린이 그랬다잖아.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세금과 죽음이라고. 뭐, 살짝 비트면, 친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커플은 둘 중 하나를 절대 피할 수 없지. 관계가 어색해지는 게 하나.”
“다른 하나는?”
“결혼?”
내 말에 최유라가 끔찍한 표정을 짓는다.
찬희야. 아직 결혼까지는 아닌가 보다.
“아무튼, 그런 찬희를 남자친구로 만나겠다고 결정했을 때. 잠깐만. 그런데 누가 먼저 고백한 거야?”
“누가 먼저 했을 것 같아?”
“미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아무튼 찬희의 고백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안 해 보지는 않았을 것 아냐. 헤어지면 어떻게 하지? 우리하고 어색해지면 어떻게 하지?”
유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받아들인 거고.”
유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