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0
20 : Home과 House의 차이 (2)
뾰로롱.
카드를 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이 집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밤이다.
내 거처라고는 해도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문이 열리자 서현 님이 현관 복도에 서 계신다.
어? 왜 여기에 서 계시지?
“다녀오셨어요?”
“네. 다녀왔습니다.”
나는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올라섰다.
그러자 서현 님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는 내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온다.
나가려던 거 아니었나?
“…나가시려던 것 아니었어요?”
“작은어르신 맞이하러 서 있었어요.”
“…언제부터요?”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더 무겁다.
나는 거실에 가방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 죄송합니다. 제가 같이 장 보러 가자고 해 놓고….”
“아니에요.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어요. 제멋대로 굴어서.”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 전 씻으러 갈게요.”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깐 침대에 앉아서 생각해 봤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아침에 그렇게 밥을 얻어먹고, 학교에서 오해를 받고, 그 과정에서 고마운 사람들의 진심도 알게 되고, 그러다 옛 여자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처음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온종일 있었던 일들이 그녀와의 만남 때문에 무게감을 잃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미 진작에 다 끝난 일이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속 한편에서 나는 버리지 못하고 감정의 파편을 잡고 있었나 보다.
가끔 비싼 쿠페에 타고 가는 그녀를 보면서 이제는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파편들은 조금 남아 있었나 보다.
뭐, 그녀가 첫 여자친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안 사귀어 본 건 아니니까.
그런데 첫사랑은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박혀 있는 파편이 아팠는지도 몰랐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씻자. 우선 좀 씻자.
그녀와 헤어지고 꿀꿀한 기분에 두어 시간 마구잡이로 걸었더니, 몸은 온통 땀에 찌들어 있었다.
5월의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를 이겨 낼 정도로 열심히도 걸어 다녔군.
나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물을 틀었다.
***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다.
복학생 노친네들의 말이 맞다. 우울할 때는 배고플 때까지 땀 빼고, 배불리 먹고 처자는 게 최고라는 말.
몸이 힘드니 정신적으로 힘든 것이 조금 덜하게 느껴진다.
나는 샤워를 하고 내 방에 곱게 개어져 있는 반바지를 입고 방을 나왔다.
냉장고에 뭐 마실 것 좀 있을까? 일단 나가 볼까?
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에서 한 손엔 서류를, 다른 한 손에는 전화를 들고 통화하던 서현 님의 모습이 보인다.
“네, 그 일은 협의를…. 잠시만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통화를 하던 서현 님이 나를 보자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다 씻으셨어요?”
약한 하늘빛 도는 블라우스, 주름 하나 없는 여성용 정장 바지를 입고, 두 무릎을 모은 채 조신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서현 님은 전화기와 서류를 내려놓더니 몸을 일으켰다.
왜 서현 님은 집에서도 저렇게 풀 메이크업에 풀 착장을 하고 일하는 것일까?
“네. 잠시 목이 말라서.”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서현 님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찾아 마실게요.”
나는 재빨리 서현 님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자… 뭐가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냉장고를 열었는데….
헉!
뭐가 이렇게 커!
뭐가 이렇게 많아!
뭐가 이렇게 다 영어야!
이게 집 냉장고야, 백화점 식품관이야!
무슨 식당에서 쓸 것 같은 업소용 냉장고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식품들이 꽉꽉 차 있었다.
“뭐 찾으세요? 제가 꺼내 드릴게요.”
어느새 다가온 서현 님은 내 옆에 서서 같이 냉장고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 그냥 목이 말라서.”
“그럼. 어제 그 주스 드릴까요?”
“음…….”
“그러면 탄산수는 어떠세요?”
“네. 뭐. 좋죠.”
내 뜨뜻미지근한 대답에서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서현 님은 탄산수를 꺼내는 대신 나와 같이 냉장고 안을 탐색했다.
뭐가 좋을까나.
그렇게 작게 말하면서 말이지.
에잇. 젠장. 더 미안해지네.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사실 배가 고팠다.
신지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한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놈의 몸뚱아리는 어김없이 음식을 내놓으라고 뇌를 갈구고 있구나.
생각해 보면 박승환이랑 학식 먹고, 신지수랑 커피 한 잔 마신 걸 제외하면 뭐 먹고 마신 게 없구나.
지금 시간에 뭐 먹자니 좀 그런데. 우유나 마실까.
“우유나 한 잔 마실까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는 우유로 손을 뻗었다.
“작은어르신. 혹시… 저녁 드셨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무언가 알아차렸는지 서현 님이 묻는다.
저녁을 먹고 간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저녁 안 먹었어요. 그렇게 말은 못 하겠다.
거짓말이 들통 날까 봐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차려 먹겠다고 하면, 서현 님이 저녁을 차려 준다고 하겠지. 아무리 거절해도 서현 님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 놓고서 저녁을 차려 달라고 한다?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는 없지.
“네. 뭐, 대충. 먹고 왔어요.”
거짓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서현 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하지만 믿는 눈빛은 아니다.
“안 그래도 출출해서 간단하게 간식이라도 챙겨 먹으려고 했는데, 작은어르신도 같이 해요.”
그러면서 냉장고 안을 살펴본다.
강 회장님이 손녀 중에서 가장 똘똘한 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틀렸다.
가장 똘똘하고, 현명한 아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 괜찮아요. 저 이거 한 잔만 먹고 잘게요.”
나는 손수 컵에 우유를 따르고 그 잔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내 뒤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혹시라도 좀 허전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근데, 저 이거 바로 먹고 잘 거예요. 서현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밤 10시나 되었을까?
내가 또 방을 나가면 그녀가 이것저것 날 챙긴다고 일을 못 하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그냥 일찍 내 방에 스스로 감금당하기로 했다.
***
눈을 떴다.
정말 적응 안 되는구만. 이 방. 뭔 놈의 방이 이리도 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반.
참 일찍도 일어났다.
그제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아니면 우유의 수면 효과가 발동한 탓인지, 나는 방에 들어가서 우유를 한잔 마시고 책을 보다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 덕분인지 참 빨리도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김에 운동이나 하러 갈까? 여기 입주민만 사용할 수 있는 피트니스도 있던데.
어쩔까 하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내 방문에 귀를 갔다 댔다.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끔 우웅 하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정도밖에.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집이 좋으니 문도 아주 부드럽게 소리도 없이 열리는구먼.
그리고 발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슬라이스 치즈 두 장을 몰래 빼서 다시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왔다.
잠입 액션 게임을 많이 해 본 게 이런 데 도움이 되는구만.
다행히도 서현 님 방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치즈를 까먹으면서 생각해 봤다.
시간이 얼마 안 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태생이 시골에서 흙 파먹던 촌놈이라 그런 것일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의(善意). 좋은 의도.
회장님의 마음이 선의인 것은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그 선의가 나는 불편하다.
문을 열 때 보이는 현관의 크기도, 거실에 설치된 초대형 TV도, 이리저리 굴러도 떨어지기 힘든 이 침대도, 그리고 서현 님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 같다고 생각했다.
***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저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문밖의 동향만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7시가 살짝 넘은 시간, 서현 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음. 일찍 일어나셨군.
그녀는 아침을 준비하려는지 부엌 쪽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그런 소리가 났음에도 쥐 죽은 듯 가만히 방에 있었다.
8시가 지나고, 그녀는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만약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면 지금쯤은 나가야 할 텐데. 그녀는 나갈 기색 없이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9시가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녀는 출근 복장인 듯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작은어르신.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서현 님.”
“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제가 차려 먹을게요.”
“아니에요. 준비 다 해 놓았으니 그냥 앉아만 계세요. 제가 금방 준비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정했다.
오늘 밤.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