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69
270 : 에필로그 : 일상 (2)
***
“병진아. 이번 주말에 뭐해? 바빠?”
열심히 마감을 하고 있던 병진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전 점장, 아니, 지금의 여자친구를 돌아보았다.
“주말에요? 바쁜데요? 시간 없는데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여자친구는 놀란 눈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약속 있었어?”
“네.”
약속이 있다고? 약속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무슨 약속?”
“여자친구랑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왜요? 뭐 시킬 일 있어요? 세상에서 제가 제에에에에에일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가 최우선이지만, 뭐 들어는 볼게요.”
그렇게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병진을 여자친구는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진짜 못 이기겠다.”
“나도 가끔은 이겨야죠. 근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병진의 질문에 여자친구는 잠시 말을 주저했다.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아니고?”
“…저녁 같이 먹자고.”
병진은 김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주말에 같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를 하겠다고, 저렇게 말을 꺼낸 것이라고?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집에서.”
“…네?”
집? 여자친구 집?
‘라면 먹고 갈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집에서 라면을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엄마가 밥 차려준다고, 한번 데려오라고 해서.”
“…어머님이요?”
“응.”
그렇게 말하는 여자친구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그…러면 저녁 식사는 어머님하고만…?”
“…아니. 아빠도.”
병진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벙찐 표정으로 여자친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많이 부담스러우면….”
여자친구가 병진의 얼굴을 보고 말한다.
“아니, 아니요. 저기, 그게 부담스럽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말한 병진은 잠시 주저한다.
“혹시 아버님, 어머님도 아세요? 저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부모님이 안 계시고, 어렸을 적에는 나쁜 길로 빠졌었다.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자격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다.
가진 것도, 물려받을 것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몸뚱어리 하나 뿐인,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이라는 사실이 새삼 병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응. 말씀드렸어.”
“…그런데도 절 만나주신다고….”
“응. 그러냐. 그럼 밥 한번 해줄 테니 데려오라고. 그렇게 말했어.”
“…….”
“부담되면 다음에 가도 되고.”
“아니요. 부담 안 돼요.”
“괜찮겠어?”
“저 누나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응?”
“나중에 누나 부모님 찾아뵈러 갔을 때, 그때 부모님께서 반대하셔도, 절대로 너 같은 놈에게 내 딸 못 준다고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 하나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해해주실 때까지,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찾아뵙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저 뵈러 갈게요. 가서 당당하게 말씀 드릴게요. 누나 사랑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씀 드릴게요.”
병진은 자신감 넘치는 시선으로 여자친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지금 혹시 프러포즈?”
“네? 아. 아니. 그게. 저기. 지금 당장 하자는 말이 아니고. 저기….”
당황하는 표정의 병진을 보며 여자친구는 작게 웃었다.
“그냥 밥 먹자는 거야. 처음 만났는데 그러면 마이너스일 것 같은데.”
“…그럴까요?”
“응. 그럴 것 같아. 그냥 편하게 서로 얼굴 보고, 인사하고, 밥 한번 먹는 거니까, 너무 부담가질 것 없어.”
여자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병진에게 다가가 두 팔로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시 해줘.”
“뭐를요?”
“나랑 결혼하겠다는 말.”
여자친구의 품속에 안긴 병진의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
“오빠. 나 대학갈까 하는데….”
막 숟가락을 떠서 밥을 입으로 가져가던 박진철은 잠시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동생이었다. 아픈 아빠를 보살피느라 정신없던 엄마도,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린 채 공부에만 매진하던 박진철 자신도,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했던 동생이었다.
그랬음에도, 말썽 한 번 안 부리고, 투정 한 번 안 부린 동생이었다. 스스로 실업계를 선택하고, 졸업과 동시에 바로 취업해서 집안의 가계를 챙겨온 여동생이었다.
그런 여동생이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여동생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저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고만 있다.
“아니, 지금 당장 가겠다는 건 아니고….”
오빠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하다고 느꼈는지, 여동생은 그렇게 변명을 주어 삼켰다.
그런 여동생을 바라보는 박진철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다시 물밀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나중에 상황 봐서. 그리고 아직 완전히 결정한 것도 아니야. 일단 알아봐야지. 지금 회사도 나쁘지 않은데, 꼭 시간과 돈을 들여서 가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
“괜찮아.”
“응?”
“가치 있어. 분명히.”
“뭐, 내가 가겠다고 갈 수 있는 건가? 공부도 다시 해야 하고…. 아무튼, 그냥 그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뭐가 부끄러운지 작게 웃는 여동생을 박진철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난 대학 안 갈 거야. 취업할 거야. 내가 병원비 벌 테니까, 오빠는 걱정 말고 더 공부해. 죽어라 공부해.
자신의 가슴을 호기롭게 탁탁 치면서, 그렇게 말하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함께해준
-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요. ‘박상호 씨 가족은 수년간 입 퇴원을 반복하는 지난한 투병 과정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하며 버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평일에는 부인 되시는 분이, 주말에는 아드님과 따님이 항상 환자분 곁을 지키며, 환자분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이던 따님은, 보조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으로 수능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문제를 푸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고 장해서 스테이션에서도 참 훌륭한 가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흔히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리우는 병원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복지재단의 이사장이라던 중년 여성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할게.”
박진철이 여동생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응?”
“이제 내가 할게. 내가 돈 벌 거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 시작해. 내가 공부도 도와줄게.”
“오빠 아직 졸업도 못 했잖아. 그리고 시험도….”
“수단일 뿐이야.”
“응?”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 답답했고,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어. 아버지, 박상호의 아들은 대단하다고, 한국대도 붙었고,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고시도 붙었다고,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박진철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확실히 얼굴에 살이 붙기 시작한 아버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박진철은 다시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수단이었어. 우리 가족이 조금이라도 웃게 하기 위한 수단. 그래서 고시를 선택한 거고. 공부 한 거고. 어떠한 수단도 목적을 뛰어넘을 수 없잖아? 내 목적은 우리 가족이야. 너야. 너의 행복이야. 그러니까 공부 시작해. 오빠가 도와줄게.”
박진철의 말을 들은 여동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포기하겠다는 건 아냐. 공부는 계속할 거야. 지금까지 노력한 게 아까우니까. 공직자라는 직업도 마음에 들고. 하지만 급하지 않잖아 이제는.”
박진철의 말에 아빠와 엄마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너도 일하면서 공부했는데, 오빠가 그거 못 할 것 같아? 괜찮아. 이제 오빠가 도와줄게. 이제 진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우리 집 막둥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도록 오빠가 도와줄게.”
“그래. 우리 막둥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엄마가 막내딸의 등을 쓸어주면서 그렇게 말해주었다.
“아우. 진짜. 이래서 내가 밥 먹을 때 이야기 안 하려고 그랬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는 여동생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 있었다.
“공부해. 그리고 우리 학교 와.”
“…내가 거길 어떻게 가냐?”
“너 열심히 살아온 거 반만 공부해도 우리 학교 올 수 있어.”
오빠의 그 말에 결국 여동생의 눈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
윤기훈은 오랜만에 성남 집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가장 체력적으로 왕성하고, 거기에 운동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태평동 고갯길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팔라지고, 이마에 땀이 베어 나왔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한때는 죽을 만큼 이 길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고갯길을 올라가는 그의 걸음걸음에는 어떠한 좌절도 담겨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날, 그의 손을 잡은 그 날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언덕 3분의 2지점까지 올라온 윤기훈은 잠시 발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목적지가 눈앞에 보였지만, 조금 더 숨을 고른 상태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훈이 아니냐?”
윤기훈은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의 오랜 친구가 윤기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마. 맞네. 기훈이 맞네. 아이고, 못 본 사이에 아주 총각이 되어버렸네.”
그렇게 반가운 목소리로 자신을 맞이해주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윤기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이야기 들었다. 좋은데 취직했다며?”
“…네. 뭐. 네.”
“그래. 참말로 잘 되었다. 너도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지. 밥은 먹었고?”
“아니요. 들어가서 먹으려고요.”
“그러냐? 잠깐만 있어봐라.”
할머니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꼬깃꼬깃하게 접힌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어 윤기훈에 손에 쥐여준다.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돼요.”
“아니긴. 어른이 주면 감사하다 그러고 받는 거여.”
“안 주셔도 되는데….”
“할머니에게 효도하라고 주는 거여. 안 그래도 요즘 니 할머니 얼굴에 아주 웃음꽃이 폈다. 웃음꽃이 폈어. 밥 잘 챙겨 먹고, 또 놀러 오니라.”
할머니 친구는 결국 그렇게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고는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윤기훈은 그런 할머니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
“기훈아, 거기 가운데 자리 좀 만들어봐라.”
양손에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를 들고 오는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윤기훈은 재빨리 상에 올려진 반찬들을 밀어내 자리를 만들었다.
이미 반찬이 가득인데, 뚝배기까지 올라가자, 밥그릇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상이 가득 들어차 버렸다.
“또 있어? 이제 그만해 놓을 데도 없어.”
윤기훈이 할머니에게 투덜거렸지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인지 다시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아빠는?”
“응? 지금 몇 시냐?”
“30분.”
“그럼 거의 올 때 다됐다. 그릇 가져다가 밥 좀 퍼라.”
바로 밥을 푸라고? 전화 안 해봐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다.
붉은 혈색, 조금씩 윤기가 늘어가는 피부, 어딘가 편안한 표정,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왔냐.”
윤기훈을 발견한 아버지가 묻는다.
“…네.”
윤기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어여 손부터 씻어. 기훈이 배고프겠다. 너도 얼른 밥 푸고.”
그런 부자를 다그치는 할머니의 목소리.
윤기훈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나 그 마음이 얼굴로 드러나게 될까 봐, 들키게 될까 봐, 윤기훈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
“…일은 하실 만해요?”
식사가 시작되고, 오랜 침묵 끝에, 밥공기에 밥이 삼 분의 일 가량 남았을 때, 윤기훈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뭐 그렇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다시 대화가 끊기고,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만이 방안을 울린다.
“몸이 힘들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아버지가 다시 말을 꺼낸 것은 몇 분이 흐르고 나서였다.
윤기훈의 아버지는 재취업을 했다. 서초동에 있는 한 법무법인 건물의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출퇴근은 할 만하세요?”
“뭐, 지하철 타고 다니는데, 힘들 게 없지.”
아버지의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기훈아. 느그 아버지, 태평역까지 걸어 다닌다. 운동 삼아서.”
할머니가 재빨리 자기 아들을 칭찬한다.
윤기훈의 집에서 태평역까지는 걸어 다니지 못할 거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버스로도 서너 정거장 떨어져 있었다. 물론 엄청난 고갯길도 있었고.
윤기훈은 무어라 한마디를 할까 하다가 그냥 숟가락을 들어 찌개가 담긴 뚝배기로 가져갔다.
“자고 갈 거냐?”
아버지가 무심한 목소리로 묻는다. 여전히 시선은 밥상 위로 향한 채로.
“뭐…. 네….”
“그래.”
그렇게 무심한 목소리로 짧은 대화만 나누는 부자의 모습을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 살고 싶다고, 이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