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55
55 : 있다가 없으면 더 서럽다 (1)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진짜 아프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 몸을 감싼 이불과 침대 시트는 이미 내가 흘린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축축하고 기분 나빴지만, 몸에 서린 한기가 너무나도 차가워서 차마 이불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몸의 70%가 수분이라고 하던데, 맞는 말인갑다. 이렇게 많은 수분이 내 몸에서 흘러내리다니.
“아…. 하…. 진짜 미치겠네….”
누군가 온몸을 빨랫방망이 같은 것을 두 손에 들고 휘모리장단에 맞춰 내 몸을 두드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몰랐다.
몸살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다.
망할 할배 같으니!
***
신력을 함부로 사용한 것을 보고하러 고향으로 간 그날, 나는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서점 책 정리를 했다.
모든 책을 다 꺼내서 분류하고, 다시 재배치하는 서점의 책 정리는 일 년에 한두 번씩 하는 정기 행사 같은 것이어서 그리 낯선 작업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콧노래를 살짝 흥얼흥얼거리며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꺼낸 책들을 하나씩 뒤적이면서 ‘이런 책도 있었군.’ 하며 감탄하기도 했고, 몇몇 서적들은 할아버지가 앉은 자리 바로 뒤의 책장, 내가 소위 할배 컬렉션이라고 부르는 책장에 새롭게 진입하기도 했고, 어떤 책들은 손대기도 싫다는 듯 던져버리기도 했다.
어릴 때는 정말정말정말 하기 싫은 연례행사 중 하나였지만, 오랜만에 하니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직 작은 어르신인지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 할아버지가 나에게는 그냥 할아버지였던 그 시절, 우리 조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해가며 쓸쓸한 명절을 버텨내던 그 시절이 떠올라, 뭔가 그립고 행복하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책을 빼내고, 나르고 새로 꼽고 하면서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을 향해 저물고 있었다.
“고생했구나.”
할아버지는 창밖에 펼쳐진 석양을 등에 진 채로, 새롭게 정리된 서점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은 뭘….”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무언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마음 한켠에서 피어올랐다.
한때는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할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물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을 도시의 화려함 속에서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막상 고향을, 할아버지를 떠나 보니 마냥 좋지만은 않더라.
물론 심적으로 자유롭고, 작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고향에 있을 때와는 다른 허전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고향에 돌아와 할아버지와 예전에 하던 일을 하니, 그 허전함과 외로움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도 같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이,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구나.
나는 흐뭇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다가 저녁에는 제육볶음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제육볶음을 만들어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한잔해야 되겠군.
“할아버지. 오늘 저녁에….”
“그래. 이만 올라가거라.”
응? 뭐라고요?
“올라가라고? 어디로?”
“어디긴 어디냐. 서울로. 네 집으로 가거라.”
“거기 내 집 아닌데요…. 그리고 그냥 가라고?”
“그냥 안가면?”
“아니. 뭐. 저기. 오랜만에 왔는데. 그 뭐냐. 할아버지랑 저녁도 먹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수…. 약주도 한잔 대접해드리고. 뭐 그럴까 싶어서….”
할아버지는 나의 눈을 보신다.
이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것일까? 뭐 그런 의미를 담아서.
“흐음…. 무언가 또 할 말이 남았더냐?”
“아니. 뭐….”
아나. 진짜. 그냥 대충 넘어가지 뭘 또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시나.
오랜만에 할아버지랑 지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아서요! 이렇게는 때려 죽어도 말 못 하겠는데 말이지.
아무튼 이 노인네가 진짜 눈치도 없고…. 아오….
“흐음. 할 말 없으면 올라가거라. 막차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본인 자리에 털썩 앉는다.
“아니. 할아버지. 저기….”
“왜? 차비가 없냐? 용돈이 필요한 것이냐?”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본다.
아니요. 저 뒷주머니에 한도 3천만 원짜리 신용카드 있는데요? 할배보다 부잔데요? 지금 당장 가용한 돈만 따지면…이 아니라. 가슴팍에서 금괴가 나오는 양반이었지….
“아니…. 뭐. 알겠어요. 올라갈게요.”
“그러려무나.”
그러면서 신문을 편다.
느낌이 싸한데….
갑자기 신문을? 석간도 아니고 조간을?
분명히 아침에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보았을 신문을 다시 본다고?
기시감이 찾아온다. 경험이 있다.
할아버지가 저렇게 티 나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하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은?
아. 할아버지가 나에게 할 말이 없구나 하고 방심하고 있을 때, 나쁜 소식이 찾아온다.
보통 아주 나쁜 소식이 말이지.
“그… 그럼…. 나 올라가…요?”
“조심히 올라가거라.”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책방 구석에 놓여 있던 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문으로 향했다.
“나 가요. 나 진짜 가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었다.
그때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말소리.
“그건 그렇고.”
역시.
나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뭐. 어찌 되었건.”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신문을 딱 접는다.
100%네. 저 양반 저거 신문 보지도 않고 있으면서 분위기 잡으려고 신문 보고 있는 척 한 거구만.
“벌은 받아야겠지?”
“버… 벌이라니.”
“힘을 함부로 남용한 것에 대한 벌.”
“그… 그게.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하셨지… 않나…요.”
“내가?”
“그… 그렇지. 할아버지가 분명히!”
생각났다.
“능력을 올바른 장소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대상에게 쓰라고. 그러면서 식권값에 뭐 이것저것 더하면 적당한 값이라고. 맞아. 그랬잖아!”
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뭐. 부족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적어도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의 말에 책임은 진다는 것이다.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라며? 뭐야. 할아버지가 분명 그랬잖아. 설마, 지금 본인이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을 부정하시겠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음. 가야겠다.
로스쿨 가야 되겠다.
나 뭔가.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진실을 무기로, 상대방을 압박하고 핍박하는 재능이.
군대는 가기 싫으니, 최대한 돈 모아서…. 아니지. 나 돈 많은 거 아냐? 그냥 가겠다면 갈 수 있는 거 아냐?
설마 나 로스쿨 간다고 서현 님이 날 쫓아내겠어? 강 회장님이?
에이. 설마.
나 한수야. 나 다음 신이야.
“호오….”
할아버지의 눈빛이 변했다.
할아버지의 눈빛 변화에는 4단계가 있다.
1단계가 한심한 놈. 2단계가 고얀 놈. 여기까지는 괜찮다. 보통 물리적인 힘이 따라오지 않는다.
하지만 3단계부터 위험하다. 실제 물리력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3단계 벌레 같은 놈.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다. 아프긴 해도 살아는 있으니.
하지만 마지막 4단계. 시체를 보는 듯한 눈빛이라면?
최소 기절이다. 경험이 있지. 음.
아무튼 지금 할아버지의 눈빛은 1단계 한심한 놈에 접어들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릴까? 그저 살려만 주세요 할까? 아니면 재빨리 어깨라도 주물러볼까?
짧은 순간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
이 재판의 승기는 내가 잡고 있다. 할아버지의 증언은 속기록에 남아 있다.
이번 재판은 내가 이긴다.
“지금 할아버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셨던 말씀을 부정하시겠다는 겁니까? 정녕 그렇게 하시겠다면 이 소손은 그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시고, 인정하신, 그래서 우리 사이에 진실이 된 사실! 힘을 올바르게 사용했다는 그 사실을 부정하시겠다면!”
나는 숨을 잠시 골랐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 소손은, 그 불합리한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진실을 가슴에 품고! 벌을 받겠습니다. 진실이 호도되고, 더 이상 진실이 진실이 아닌 세계에서 진실을 지켰다는 죄를 안고! 이 소손은 벌을 받겠나이다!”
판사도, 배심원도, 속기사도. 모두 나의 최종 변론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어디서 법정 소설이라도 읽고 왔느냐.”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안경을 벗었다.
헉. 저건 위험한데.
“뭐. 좋다. 잘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러면서 의자에서 일어선다.
뭐지? 저 여유 있는 표정은?
“그래. 내가 말했지. 합당한 듯하다고.”
본인이 인정했다. 이러면 빼도 박도 못할 것인데. 뭐지? 저 여유는? 입가에 걸리는 저 미소는?
“그런데 말이다.”
뭐지? 이 불길한 기분은?
“내가 말한 것은 그 진철이라 했나? 그 총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지.”
“네?”
“뭐. 인정한다. 천지 만물과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힘을 사용한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용서받을 정도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처음이니까 그냥 넘어간다 쳐도 말이지.”
“…그, 그런데요…?”
“일전에 사물함을 열기 위해 힘을 쓰지 않았더냐?”
헉! 그게 있었구나!
“사물함이 잠기면 관리업체에 전화를 하고 기다리면 될 것을. 불합리함을 주장하는 손자께서는 어찌하여 힘을 쓰셨단 말인가?”
“아…. 저…. 그… 그게….”
“당황해하는 후배를 안심시키고 싶어서였느냐? 아니면, 당장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교재가 그 안에 있었단 말이냐? 어떠한 이유로 허용되지 않은 능력을 사용한 것이냐?”
망했다.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한 벌은 그에 대한 벌이다. 어찌 불합리한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진실을 가슴에 품고 벌을 받겠느냐?”
“….”
“어찌 말이 없느냐. 배심원들의 심금을 울리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확실하다. 즐기고 있어. 노렸구나. 예상하고 준비했구나. 이 망할 할배가!
“…아닙니다.”
“벌을 받겠느냐?”
“…네.”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진실을 품었느냐?”
아 그냥 쫌! 진짜 이 망할 할배가!
“….”
하지만 나는 말 없이 그저 고개만을 숙일 뿐이었다.
맨날 앉아서 책만 보니까 아주 말로는 그냥 당할 사람이 없다니까. 진짜.
하지만 두고 보자. 이 굴욕은 갚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보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올라가거라. 막차 시간 늦겠다.”
응? 그냥 가라고?
“버… 벌은?”
“받게 될 것이다. 올라가거라.”
그렇게 말하고는 할배 컬렉션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저건 진짜네. 명백한 축객령.
“그… 그럼…. 오… 올라갈게요….”
“그러려무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책을 펼쳤다.
***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과연 어떤 벌이 내려질지 고민해봤다.
벌이라…. 딱히 다음 신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래서 능력을 함부로 썼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면서 혼나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과연 어떤 벌이 내려올까?
버스 안에서 답 안 나오는 고민을 계속 해보았지만, 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할아버지라고 해도 하나뿐인 손자를 죽이기야 하겠어?
받고 말지. 뭐. 그까이 꺼 기냥.
그리 큰 잘못도 아닌 것 같은데…. 물론 내 생각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딱! 누었는데!
그때 내가 받는 벌의 실체를 알았다.
아프다. 몸이 여기저기 콕콕 쑤신다. 누가 끝이 무딘 나무젓가락 같은 걸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몸살이구나.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감기나 몸살 같은 것으로 아파본 적이 없었다.
감기나 몸살은커녕, 심하게 외상을 입은 적도 없었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 놈들이랑 누가 K캅스의 최종일이 될 것인지를 정한다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다가 발목을 접질린 정도? 사실 그것도 아프다고 한 이틀 쩔뚝거렸지만, 실제로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싹 나았잖아.
생각해보니 아픈 기억이 없네.
그런데 아프다고? 몸살이 걸렸다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할아버지가 말한 벌이었다.
나는 능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