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over the family business! RAW novel - Chapter 95
96 : 각목은 훌륭한 대화수단 (1)
아침부터 성남에서 큰일을 처리한 나는 오랜만에 학교 벤치에, 공강 시간 때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찾아왔던 바로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한 시선은 아니었다. 생각을 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학기 초, 신지수랑 깨진 충격에 정신 못 차리고 해롱대고 있을 때만 해도 자주 이러고 있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이 벤치를 찾지 않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갔다가 할아버지에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서현 님을 만나고, 갑자기 이사를 가고, 축제를 즐기고, 하다 보니 어느새 벤치보다 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져 있었다.
그랬는데, 고민이 생기니 또 이 벤치를 찾는구나.
벤치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다면 욕하겠다. 지 필요할 때만 찾아온다고.
뭐,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벤치에 앉아서 고민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일단 하나는 해결했다.
윤기훈을 매수했으니, 그 녀석은 내가 지시만 내리면 경찰서에 가서 바로 증언을 번복할 것이다.
CCTV 영상도 확보했다. 박승환도 CCTV 속 인물이 장영호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날, 그 시간에 장영호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장영호의 자백을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
장영호를 통해서 제이슨 임, 그 개자식을 표면 위로 끌어올려야 하는 문제.
서현 님에게 말했던 대로, 장영호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이슨, 그 자식이 제시하는 카드를 뛰어넘는 카드가 필요했다.
더 많은 이익, 아니면 더 많은 공포.
하지만 고작 대학생인 나에게 그런 카드는 없다. 현실이 그렇다.
그냥 각목 들고 쳐들어가? 쳐들어가서 피박살을 내버려?
“아~ 젠장. 어떻게 하지?”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목적에 집중해야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진철이 형이 서 있다.
뭐야? 이 양반. 닌자야?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이렇게 쑥 나타나?
그리고 목적에 집중하라고? 뭔가 알고 하는 말인가?
“마셔라.”
진철이 형이 내 옆에 앉으며 형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캔커피를 하나 건네준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이 양반 이거 분명 당뇨 있을 거야. 조만간 날 잡아서 건강검진 받게 해야지. 안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캔을 따고 입으로 가져갔다.
달달한 커피가 순간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준다.
“고민이 있구나.”
진철이 형이 묻는다.
“네. 아니. 뭐. 고민이라고 할 건 아니고. 뭐. 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대충 말했다.
사실 고민이지. 고민인데, 뭐 형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돈 문제는 아니고?”
진철이 형이 물어본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구나. 미래 중앙그룹 사위가 돈 걱정할 일은 없겠지.”
그런 말을 하는 형의 옆얼굴을 보니, 왜 이렇게 진지해?
아니, 그건 그거고, 형. 그거 착각이라니까요!
“형. 저기.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부분이 있는데요.”
“응?”
“저기 뭐, 정혼자,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아는 사람, 아니, 그냥 아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가깝기는 한데, 아무튼 그런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진철이 형이 작게 미소 짓는다.
“그래. 나도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니까요!
아! 이 양반 답답하네.
내가 중앙그룹 사위가 될 일은….
잠깐만.
만약에, 백에 하나, 만에 하나, 내가 서현 님이랑 결혼이라는 걸 한다면….
중앙그룹 사위 되는 거 맞잖아.
그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잖아.
억지로 부정하지는 말아야 되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렇게 막 부정하다가 부정 탈라.
말조심, 생각 조심해야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운 내라.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언제든 말하고.”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한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철이 형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뭐, 같이 각목 하나씩 들고 장영호에게 쳐들어가 주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을지도.
“똑같아.”
진철이 형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네?”
“나랑 똑같다고.”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며 캔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저 양반 저거 분명 중독일 거야. 커피 다 떨어지면 막 손 덜덜 떨리고, 헛것 보이고 그럴 거야.
아니, 그런 이야기 할 때가 아니지.
똑같다니? 뭐가 똑같다는 이야기지?
“어떤… 부분에서요?”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네?”
“왜 기억나냐? 예전에 내가 돈 문제로 고민하던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이다. 아버님의 병세는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가족들은 돈이라는 현실적 어려움에 고통받고 있었다.
원래 기본적으로 좀 우울한 양반이었지만, 그때는 유난히 우울했지.
“그때 내가 지금 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데, 해결할 방법은 없고.”
“….”
“혼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해결해보겠다고 끙끙 앓고 있을 때, 수정이가 와서 그러더라. 무슨 일 있냐고.”
“수정 누나가요?”
수정 누나. 저번에 축제 때, 진철이 형 꽐라 되어서 정신 못 차리고 있던 그때, 옆에 착 붙어서 진철이 형을 보살폈더랬지.
두 사람 뭐 있는 거 아냐?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수정이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그저 별일 아니라고,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수정이가 그러더라.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을까?”
“…고맙다고?”
내가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맞아. ‘고맙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지. 그랬는데, 수정이가 그러더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네?”
“주변에 손 내밀 용기도 없으면서 그렇게 마음 없이 고맙다는 말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쎄게 말했네요.”
수정 누나. 원래 성격이 좀 직선적이기는 했지만, 저런 말을 직접적으로 할 줄이야.
“그렇지? 가끔 보면 그 녀석 무섭다니까. 후배인데도 말이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쎄게 했다는 것보다 정곡을 찔러왔다는 것이 더 무섭다.
“아무튼, 오늘 고맙다는 말하는 널 보니, 그때 내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너에게 고마운 게 있지.”
진철이 형이 말한다.
“아니. 저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뭐 한 게 없다니까요.”
“그래. 그것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
아. 진짜 이 양반 고집불통이야.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너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 평생 갚아나갈 고마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다.”
“…불법적인 일이라도요?”
어쩐지 진지한 분위기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그렇게 농담으로 받았다.
“그래. 불법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네가 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진철이 형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나의 농담을 받았다.
“지금 고민하는 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라. 그리고 나중에 그 이상 보답을 해주고.”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린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런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진철이 형을 보내고, 다시 생각에 집중하려는데,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보네요.”
마치 성우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심리학 전공 포닥, 정지수 선생님, aka 한국대 프린스는 특유의 상큼한 미소로 내 인사를 받아 준다.
“앉아도 될까요?”
프린스가 그렇게 말한다.
“아. 네. 앉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옆으로 비켜 앉았다.
“일광욕하기에는 볕이 좀 강하네요.”
한국대 프린스가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금세 알아챘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냐?’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역시 배운 사람인가.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프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양반 심리학 전공이지?
진짜로 미드에서 나오는 것처럼 표정과 말하는 억양만으로도 심리를 막 꿰뚫고 그런 건 아니겠지?
“고민이 있나 보네요.”
맞았어. 역시 미드가 맞았어. 심리학은 독심술의 또 다른 이름이었어! 학문이 아닌 주술이었어!
“뭐, 딱히 독심술 같은 걸 배운 건 아닙니다. 후배님 얼굴에 그늘이 보이네요.”
내 마음속 소리를 듣기라도 하는 듯, 프린스가 그렇게 말한다.
뭐야. 진짜 독심술인가?
“뭐. 별거는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둘러댔다.
그렇잖아. 사실 제가 장영호라는 깡패를 하나 재껴야 하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각목 들고 쳐들어가지 않으실래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심리학 전공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상담을 주로 떠올리고는 하더군요. 심리학 전공이라고 해서 모두 다 심리상담사가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프린스가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상담도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것은 맞습니다. 상담심리학 전공이 아니어도 상담 실습은 심리학 전공자에게는 꼭 경험해봐야 하는 필수 과정 중 하나이고요.”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교수님이 되실 프린스이신데 친구에게 말하듯, ‘본론만.’ 그렇게 말을 자를 수는 없잖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지만, 상담이라는 작업은 어찌 보면 이야기를 털어놓는 내담자보다 상담자에게 마음의 부담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감정적인 영향을 줄 때가 있습니다. 농담 삼아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하죠. 상담이 끝나고 내담자가 상담실을 나가면 상담자의 마음이 뒤따라간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계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자꾸 말이 길어지는군요. 뭐, 심리상담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게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문제의 답이 명확한데, 내담자만 그 답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 말이죠.”
“인지하지 못한다고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내담자의 잘못된 신념 때문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의 문제 등등 다양한 요소가 작용을 하는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 상담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손가락으로 정답을 가리키고 싶지만, 윤리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상담사이지, 교사가 아니니까요.”
프린스, 얼굴 때문에 실력이 저평가받는다고 하던데, 진짜인가보다. 알아듣기 쉽게 말 엄청 잘하네.
“후배님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혹시 모르니 주변을 잘 살펴보았으면 싶습니다. 어쩌면 그 고민의 답은 후배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프린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쓸데없는 소리만 했네요. 미안합니다. 이게 일종의 직업병 같은 거라.”
프린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분명 머쓱하다는 표정인데,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가, 저대로 사진 찍으면 돈 받고 팔아도 되겠다 싶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퇴원하면 제가 밥을 한 번 사겠다고 했는데, 후배님이 조만간 시간을 한 번 내어주시죠.”
프린스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거 빈말 아니었어? ‘밥 한번 먹자’는 대한민국 공인 가장 알맹이 없는 약속인데.
“네. 저는 언제든 괜찮습니다. 선생님 편하신 시간에.”
“그럼 다음 주 주중에 점심 한번 어떤가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통화하고 그때 시간 한번 맞춰보도록 하지요.”
프린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물론, 나도 전화번호 알려주었고.
프린스 전화번호를 다 따보는구만.
친구 놈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프린스에게 홀렸느니 어쩌니 하는 이상한 소리 듣기는 싫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