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
가짜 용사 이야기-1화(1/310)
제0화
Prologue – 가짜
“예전에요, 할머니가 이야기해준 적이 있어요…….”
가냘픈 숨결의 단말마가 들린다.
이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을 칼집에 집어넣고 그 앞에 한쪽 무릎으로 꿇어앉았다.
“세상에 심연(深淵)이 창궐하면…… 신들께서…… 용사님을 보내주실 거라고…….”
우루크의 소행이었다.
철퇴로 척추가 으깨져버린 몰골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다고 한들 평생 걸을 수조차 없을 터.
“형이 그 용사님 맞죠……?”
용사, 용사라…….
씁쓸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잊혀진 이름이었다. 신들조차 버리고 떠난, 이 눈물의 땅에선 존재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아이의 눈동자가 내 어깨 너머로 향했다.
내가 베어 죽인 백여 마리의 마물, 우루크 선견대의 사체가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곳으로.
“내가 한 건 맞지만, 나는 가짜라서.”
“가짜……?”
용사.
신화시대에 심연을 봉하고 빛의 시대를 열었던 존재.
아쉽게도, 나는 신들에게 선택을 받을 정도로 거창한 존재는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존재가 모든 시대에 태어날 정도로, 이 세상은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광룡정교회에서는 나 같은 가짜들을 페이쿼리어라고 불러.”
페이쿼리어(FakeWarrior), 말 그대로 가짜 용사라는 뜻이었다. 그래, 가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용사.
잔혹하고 처절한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절박함의 결정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힘이 없다는 소리야.”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 한 번의 참격으로 바다를 가르지도 못한다.
그 모든 무훈은 신화시대의 이야기, 즉 진짜 용사의 이야기.
나는 어디까지나 가짜 용사였다.
“그럼…… 그러면요…… 저것들은 계속 마음대로 살아가요……?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죽이고, 빼앗고, 겁탈하고.
심연은, 심연의 종복들은 늘 그랬다. 인류에게서 소중한 일상을 빼앗아간다.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과 수고를 경멸하듯이.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형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죽였는데…… 그런데도…….”
아이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끊어져가는 숨일 텐데, 어디서 이토록 처절한 울음이 솟아 나올 수 있었을까.
“분해요…… 마지막에…… 이렇게 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그 쏟아지는 눈물 위로, 어린 날 울며 흐느끼던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지금, 이 아이와 똑같이.
별들이 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고 깔깔거리던 그날,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그날.
“나도, 나한테도, 형처럼, 조금이라도 힘이, 있었으면…….”
무엇을 원했을까. 살고 싶었을까, 마지막 위로를 받고 싶었을까.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기에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네가 뭘 기대하든…… 비현실적인 기적은 못 만들 거야, 아마도.”
파르르 떨리는 그 손을.
단말마 속에서 내뻗은 그 손을 잡아주는 것.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약속할게.”
“……?”
“똑같이 갚아 주겠다고. 너와 네 가족에게 한 짓거리 모두.”
조용히.
아주 희미하고 가냘프게.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져오던, 쿵, 쿵, 모질게 떨리던 맥이 흩어졌다. 흩어져 사라졌다.
“…….”
아이의 손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나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화산재가 세계를 시커멓게 뒤덮는 계절.
그 계절의 문턱에서, 까마귀들이 죽어간 이들 위에 새까맣게 내려앉아 살점을 뜯었다.
그때였다.
“Kisayka o tto shiem?”
“Olbera shi ge meruk.”
톱으로 쇠를 긁는 듯한 음성.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우루크 본대가 보였다.
사슬 갑옷의 쇳소리를 음침하게 잘그락거리며 마을 어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놈들의 눈빛은 제각각이었다.
동료를 죽인 자에 대한 분노, 강자에 대한 흥미…….
자신들이 빼앗고 죽인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라고는 일절 없었다.
그래.
너희들은 늘 이런 식이었지.
징, 칼집에서 순간 폭발하듯 뽑혀져 나온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이 홍련의 검강을 토해내며 사납게 울었다.
“Kishiro mao karedan da?!”
순간 놈들 중 하나가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란 뜻을 가진 괴어였다.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내가 대답했다.
“나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아라다만텔은 내 성검의 이름.
알터라는 미들네임은 페이쿼리어에게 대리자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고대어다.
이를 풀면 아라다만텔의 대리자 카이센이라는 뜻이 된다.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바로 이 조촐한 이름과.
이 절박하고도 초라한 외침이.
태양과 달들이 두려워서 숨고, 오직 별들만이 내 눈물을 내려다보며 낄낄대던 그날, 내 스스로 기원한 나의 운명이었다.
제1화
그날, 별들이 웃던 밤에
내 어머니는 ‘가짜’ 용사였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건 아마 네 살이 되던 해였던 것 같다.
“카이센, 이 엄마는 말이야. 세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이거든?”
“여-웅?”
“여우? 그래! 여우 같기도 했지. 남자들이 아주 줄을 섰거든. 왜 안 그렇겠어? 예쁘고 상냥한데 엄청나게 세기까지 하잖아!”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한 영웅이 되기까지, 당신이 어떤 비탄으로 얼룩진 수라장을 눈물로 헤쳐 나와야만 했는지.
그냥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른 채, 눈을 빛내며 들었을 뿐.
“페이쿼리어(Fakewarrior; 가짜 용사)는 신체 개조의 부작용 때문에 임신을 못 하거든? 근데 네 아빠가 어찌나 절륜한지 한 번 같이 잤다고 날 임신시키더라?”
“아니, 아이린…… 지금 네 살짜리 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조용히 해, 정력 좀 좋으면 다야? 여하튼 임신한 걸 안 게 마지막 결전을 한 세 달쯤 앞둔 시점이었는데,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어.”
페이쿼리어는 임관할 때 가족도 연인도 모두 버리고 오직 세상의 칼날로 살아가다 죽겠다고 서약한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 서약을 저버렸다.
누나와 나를 낳기 위해서.
그래서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고 이런 땅끝 변두리로 와서 아버지와 살림을 차렸다고.
“사람들은 내가 전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끝마칠 때쯤이면 나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카이센, 너와 네 누나야말로 내가 만들어낸 기적들 중 최고의 기적이야, 후후훗. 그러니 엄마가 평생 소중하게 지켜줘야지.”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어머니는 귀가 엄청나게 밝았다.
잠결에 작은 신음 한 번이라도 흘리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언제 어디서든 쏜살같이 달려와 어르고 보듬어 주었다.
그게 언제든, 그게 어디든.
“음?”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어머니가 검술을 훈련하는 모습을 우연히 지켜본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뭣도 모른 채 그 유려한 칼 솜씨를 멍하니 지켜보는데 불현듯 어머니가 내게로 칼끝을 겨누는 게 아닌가.
“카이센, 누군가한테 생명을 위협당하는 게 어떤 기분이니?”
막연하고도 어렴풋한 공포에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섭지?”
그러자 어머니가 빙글 돌아서더니 내 반대쪽으로 칼끝을 겨누었다.
“자, 반대로 누군가가 생명을 지켜주는 건?”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등이.
어깨 너머로 흘끗 돌아보며 빙그레 웃던 얼굴이…….
찬란할 정도로 상냥해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울음이 멎었다.
“자, 보렴.”
그러자 어머니가 다가와 내 손에 작은 나무칼을 쥐여주었다.
“검이란 건 말이야. 타인을 죽이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타인을 지키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단다.”
“……?”
“우리 카이는 이 검을 어떻게 쓰고 싶니?”
그때.
칼 하나 제대로 못 쥐는, 슬플 정도로 조촐한 힘으로 어머니를 지키고 싶다고 대답했더라면…….
내 운명의 수레바퀴를 조금은 뒤틀 수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칼이 닿지 않고 또 칼이 벨 수 없는 곳으로 나를 견인해가고 있었으니까.
“빛의 인도하심에 의해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됐군요,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인생에 드리워질 여름의 전조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땅끝 마을까지 법황청의 의전단이 어머니를 찾아온 것인데, 마지막 햇살이 황금의 갑옷 위에서 고결하게 아롱졌다.
법황청은 어머니의 본명을 알고 있었으며, 어머니가 죽음을 가장해 탈영한 사실 또한 알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군요. 영웅 서사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용사가 벽촌에서 사냥 따위나 일삼아 살아가고 있었다니.”
“이제 그딴 거 줘도 안 해.”
“저희들이 말장난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십니까?”
“이게 말장난으로 들려?”
어머니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가늘어지자, 의전관이 한숨을 내쉬며 남쪽 바다를 돌아보았다.
“여름이 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혹독한 여름이. 벌써 코앞까지 왔을지도 모르죠.”
“…….”
“심연(深淵)이 준동하고 있어요. 대륙 곳곳에서 흑교회의 그림자가 나타났죠. 테르쉬 열도에서는 연이어 패전의 소식만이 날아들고 있고.”
테르쉬 열도에서 벌써……?
그 말에는 만남 이후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어머니조차도 일순을 눈썹을 치키시고 말았다.
테르쉬 열도는 이 아크라드 대륙과 마인지경(魔人地境), 즉 마계와의 중간 지점이었다.
현재 인류 활동 영역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는 섬들로 이해하면 편했다.
“아직 초여름은커녕 늦봄도 오지 않았는데. 거짓말하지 마.”
“사실입니다. 그러한데 인류는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만 있는 상황이라, 구심점이 될 영웅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
“바로 당신을 말하는 겁니다, 홍련의 라미네아.”
“…….”
“당신께서는 용사로서 서약을 했지 않습니까?”
“…….”
“대답해 주십시오. 이런 상황에 당신께서 있을 곳이 정녕 이곳이라 생각하십니까?”
어머니는 의전단이 도착한 그날, 차디찬 밤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우셨다.
왜 우셨을까.
왜 당신이 울어야만 했을까.
잘못된 것은 이 세상이며, 당신이 아니었는데.
“실은 오늘 우리 공주님과 왕자님에게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물로 붉게 짓무른 얼굴로 나와 누나를 불러 마지막 미소를 보이셨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그게 엄마의 원래 이름이야.”
알터 아라다만텔.
이 수식어는 귀족의 성씨가 아니었다.
알터라는 건 대리자라는 뜻의 용언, 즉 이를 풀이하자면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의 대리자라는 뜻이다.
“엄마가 늘 이야기했지? 엄마가 엄~청 대단한 용사님이었다고. 그래서 말인데, 사람들이 다시 엄마를 필요로 하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다시 전장으로 나가야 한단 거란다, 라텔. 아마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엄마.”
“테르쉬 열도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하니…… 라텔, 카이센, 너희들은 의전단을 따라 먼저 위로 올라가렴.”
대화의 얼개를 재깍 들여다보지 못하던 나와 달리, 늘 의기양양하게 잔소리만 해대던 누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마저 떨었다.
“그게 뭐야. 싫어. 왜 싸우러 가야 돼? 전장은 위험하잖아! 엄마도 우리랑 같이 가. 또 도망치면 되잖아.”
“안 돼. 광룡께서는 이미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지금까지 눈감아 주었을 뿐. 어디로 도망친들 다 알겠지.”
광룡 하라데리만.
법황청의 지도자로 신들이 떠난 이 세계를 신들을 대리해서 관리하고 있는 신룡(神龍).
그의 신통력은 절대적이었다.
“라텔, 그러니 약속해줘. 어떤 일이 있어도 카이를, 동생을 아끼고 사랑해 주겠다고. 엄마를 대신해서.”
“싫어, 싫다고요! 왜? 왜 그렇게 평생 못 돌아올 것처럼 말해? 왜 아빠랑 똑같이 말하냐고!”
“그리고 카이, 누나를 엄마처럼──”
그때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나는 그저.
어머니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내일도 평소와 같은 일상이 이어지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늘 숨던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숨은 것도, 거기에서 저녁이 되기까지 돌아가지 않은 것도.
그저.
정말로 그저.
그러면 어머니가 날 찾느라 떠나시지 않겠거니 싶어서 했을 뿐이었는데…….
그때 알고 있던 건 단 하나.
열 살 때 병으로 죽은 아버지가, 아무리 부르고 기다리고 또 울면서 찾아도 돌아오지 않았단 것.
그래서 어머니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아서 그랬던 것뿐인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겠는가.
설마 그 일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Kubeche ou tokose!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모두 죽여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사방에 화산재가 뿌옇게 날리고 있었다.
그 화산재 아래, 수평선을 가득 메운 군선들이 해풍과 만조를 타고 해안선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것이 6대 마족 중 하나인 우루크의 침략의 서막이었다는 사실도.
어머니께서 날 찾아다니시다 놈들과 맞서게 되었단 사실도.
“엄마.”
식은땀이 그치질 않는 불안감 속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내내 혼란스러운 풍경을 연신 망막에 새기기만 했을 뿐.
“누나.”
마을 쪽에서 새까맣게 솟구치는 연기.
끝없는 비명, 둔탁한 파열음.
사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흩날리는 화산재.
“엄마.”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나타났던 법황청 의전단 병사들은 사지가 찢어진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무슨 일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동란의 시대를 알지 못하는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참경 속에서, 불현듯 우악스러운 손이 나를 붙잡았다.
꼭 산이 움직여 날 붙잡은 것만 같았는데, 그것이 우루크 전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놈은 나를 군선이 무수히 정박된 해안가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 어머니가 계셨다.
“GWAAAAAAAAAAA……!”
“HARRRRRKKKKKKK……!”
소검 한 자루가 허공에 수놓는 핏빛 섬광.
그 섬광의 끝자락에서, 머리통들이 회전하며 선혈을 토해낸다.
무참히 고꾸라지는 우루크 전사들로 산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마치, 피에 절여진 초원 위로 붉게 피어난 꽃처럼 보였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칼은 그때 처음 보았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어머니께서는 홀로 우루크 전사 백여 명의 목을 잘랐고 또 백여 명을 상대하고 계셨던 것이다.
파츠츠츠츠츠츳……!
소검의 짧은 칼날을 신묘한 기운이 선홍빛으로 물결치며 휘감는다.
검강의 발현.
정점에 다다른 검사의 상징.
어머니께서는 누나와 의전단에게 날 찾게 한 다음, 이곳에서 적의 주력을 상대로 시간을 벌 생각이셨을 것이다. 그 계획조차도 나로 인하여 무너졌다.
“Horoku nena shi. 움직이지 마라, 인간.”
우루크 하나가 소리쳤다.
우루크들은 먼 심연의 시대부터 승리를 숭상하는 전투 민족이었다. 하지만 명예를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우루크들은 대부분의 경우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작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어, 엄마…….”
그렇기에 우루크들은 페이쿼리어 병단과 싸울 때 인질을 잡아서 협박하는 일을 즐겼다. 나를 붙잡아 어머니를 협박하던 그때처럼.
내가 아들이란 걸 알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방식을 자주 쓰는 것뿐이었다.
어머니께서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면서도 다음 우루크를 베어 넘기자, 날 붙잡은 우루크가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라면 이때 얼어붙었을까.
하지만 그때 어머니께서는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날 구해내기 위한 방법을, 둘 다 이곳에서 살아갈 유일한 방법을.
고개를, 시선을, 찰나조차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쒜에에에─── 티이이이이이잉!
다음 순간, 어머니께선 ‘그 방법’에게 소검을 매섭게 내던졌다.
무수한 동족상잔으로 단련된 우루크들조차도 한 박자 늦게 반응할 정도의 속도였다.
“Ogure wira Irishina ro Raminea(내 이름은 홍련의 라미네아).”
표적의 얼굴 바로 옆쪽, 군선의 뱃머리에 깊게 꽂히며 부르르 떨리는 소검의 칼날.
“Hishime ki KALTAKE ro gimarasu(네놈에게 칼타케를 신청한다).”
다짜고짜 족장을 노린 것에 격분하던 우루크 전사들이 하나둘씩 멈춰 섰다.
“홍련……?”
“저 인간 계집이……?”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머니께서 스스로를 홍련의 라미네아라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전투와 승리를 숭상하는 우루크들에게 강자란 존경할 만한 존재.
그런데 홍련의 라미네아는 지난여름, 이 땅을 찾았던 우루크들 대부분을 소탕해 내쫓았다고 전해지는 인류의 영웅.
“KALTAKE……?”
그리고 칼타케 때문이었다.
칼타케는 우루크들에게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투 관습이었다.
모든 법과 상식을 초월하는 야만적인 전투의 율법.
정정당당한 일대일 전투.
그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는 어떤 짓을 저질렀어도 옳은 일을 한 것이 된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절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 같지도 않은──!”
날 붙든 우루크가 소리치려 하기 무섭게.
“──Greeshe(받아들이지).”
족장이 이물에 박힌 소검을 빼드는 것으로 그 결투를 받아들였다.
평균 신장이 7척에 달하는 우루크들보다 머리가 둘하고도 반은 더 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수염에서 지금껏 죽여 온 우루크 족장과 인간 전사들의 송곳니가 흉측하게 매달려 있었다.
“네가 진짜 홍련이라면 말이다. 너의 죽음이 우리 부족의 위업이 될 테니.”
뒤따라온 인간 노예가 통역했다.
손발이 족쇄로 구속된 채 개처럼 네 발로 기어온 노인이었는데, 아마 테르쉬 열도에서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페이쿼리어들은 모두 백발이고 성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우루크 족장이 당신의 소검으로 목을 겨누자, 어머니께서 그걸 낚아채며 조롱조로 답했다.
“이건 염색한 거야. 그리고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안 쓰는 주의라서.”
“패기는 좋군. 그렇다면 네게 홍련이란 증거가 없다.”
다시 우루크들이 병장기에 손을 얹었다.
긴장감은 일촉즉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짓으로 가리켰다.
당신의 칼에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우루크들의 수많은 사체를, 그리고 자신이 쥔 작은 소검을.
“…….”
족장은 어머니의 거만한 눈짓을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응시하나 싶더니, 다음 순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들었나! 이 쓸모없는 자식들아!”
그 웃음이 얼마나 큰지, 통역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지금 여기서 홍련의 라미네아와 나 발카로의 칼타케가 시작되었다!”
“WU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
함성, 함성의 도가니였다.
수백의 우루크들이 미친 듯한 환성을 토해내면서 발카로와 어머니를 겹겹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는 단지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가 죽기 전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야만적인 관습 중 하나일 뿐.
“원한다면 무기를 빌려주지. 인간들에게서 뺏어온 칼들이 몇 자루 있다.”
발카로의 무기는 특대 외날 도끼였다.
우루크 전사 두 마리가 겨우 낑낑거리며 옮길 정도의 중량과 크기였는데, 저 흉기로 다른 우루크 전투 족장 87명을 죽였다 했다.
그 도끼에 맞서는 어머니의 무기는 가냘픈 소검 한 자루. 무기라기보다는 항상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시던 물건이었다.
“닭 잡는 데 소 칼 안 쓴다니까?”
“하!”
그렇게 혈투가 시작되었고…….
누가 보아도 이 승부의 귀추는 명백했다. 당시 전투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발카로의 도끼날을 쉽사리 튕겨낸 어머니의 핏빛 검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자 핏물이 터져 나왔다.
발카로의 팔뚝에서, 옆구리에서, 오른쪽 볼에서.
무한히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검의 잔상.
환호성을 내지르던 우루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게 될 정도로, 어머니의 검세는 우아하고 환상적이었다.
마치 붉은 꽃처럼 보인다. 저래서 홍련이라는 이명이 붙은 것인가?
“소문이 사실이었나……?”
“홍련이 벤 우루크 족장의 숫자는 셀 수조차 없다던데…….”
승부의 흐름에 조바심을 느꼈을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발카로가 문득 일격 필살을 노리고 외날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어머니께서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SHeGAaaaaaaaaaa───!”
그리고 그 순간을 제대로 노려서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검강이 번뜩인 그 순간, 내가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더라면.
족장의 죽음을 지켜볼 수 없었던 우루크가 비겁하게도 내 척추를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지 않았더라면.
고통에 겨운 그 비명이 어머니의 집중력을 무너뜨리지 않았더라면…….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명 같은 건, 조금도 흘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카이……?!”
라미네아는 허점이라고는 없었던 역대 최강의 페이쿼리어였지만, 그때 당신은 페이쿼리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들의 비명이 들린 순간 집중력이 흔들렸다.
검세가 흔들렸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자연스레 검강도 형태를 잃는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본래 검강과 맞부딪쳤어야 할 도끼날은 어떤 제지도 없이 어머니의 어깨 깊숙이 파고들었다.
푸하아아악……………….
쇄골을 부수고.
내장과 근육을 찢어발기며.
그대로 살(殺)의 경계까지 치고 들어간 도끼날은 순간 이변을 감지한 발카로에 의해 멈추었다.
“어, 엄마아아아아아아아아……!”
머리 전체에 멀미가 일었다.
현기증이 일고 심장이 붙들 수 없이 빨라졌다.
그때,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온 발카로가 포효를 터뜨리며 날 붙잡은 우루크의 얼굴을 핏물과 뼛조각으로 짓이겨 버렸다.
감히 내 칼타케를 더럽히다니, 라고 뇌까리며.
“엄마.”
그때 왜 자기 부하를 죽였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저 괴물 놈의 변덕 덕분에 날 붙들고 있던 힘이 사라졌단 것만 알면 충분했다.
백사장 위로 고꾸라지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어머니 쪽으로 달려가야 했으므로.
“엄마, 엄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밖에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달렸다.
그러다가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엄마……!”
어머니께서는 발카로의 흉악한 도끼가 어깨에 박힌 그대로 백사장에 꿇어앉아 있었다.
“우리 카이,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신들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숨을 쉬고 계셨다. 어머니는 살아 계셨다.
그래, ‘아직’까지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에 새하얀 송곳이 박혔는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뭘,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네놈은 홍련의 아들이냐?”
그때였다.
통역 노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내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모래밭 위로 등부터 처박히기 무섭게, 거대한 그림자가 내 평생의 기억 속으로 드리워졌다.
발카로.
흉흉한 눈동자로 내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놈의 면상은, 바로 그 순간 내 기억의 심층 속에 자리 잡았다.
“확실히, 자세히 뜯어보면 닮았군.”
이 자식이…….
통역 노예가 저 말을 옮기기 무섭게 분노가 치솟았다.
“놔, 죽여 버리겠어! 놔! 죽여버릴 거야. 너도, 너도 똑같이 죽여버릴 거라고……!”
발카로가 그 순간 자신의 송곳니 하나를 부러뜨렸다. 그러더니 그걸 내 왼쪽 볼에 박아 넣었다.
뭐였을까.
견딜 수 없는 격통에 나는 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단순한 물리적인 아픔이 아니었다.
“사냥감의 주박이다.”
송곳니가 순간 형태를 잃으며 녹아들더니, 내 핏물과 뒤엉키며 낙인으로 새겨졌다.
장대에 몸이 꿰뚫린 채.
거꾸로 매달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사람을 형상화한 낙인.
놈들은 실제로 살육이 끝난 민가의 사람들을 그렇게 매달아 깃발로 들고 다녔다.
그때는 몰랐으나 이는 발카로의 클랜 발크루쉬의 문장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루크 부족들에게도 두려움을 사고 있었다.
“우루크에게 승리는 무엇보다 중요하지. 하지만 칼타케에서, 그것도 전설의 홍련과의 승부에서 이딴 식으로 승리했다는 건 우스갯거리밖에 안 된다.”
“닥쳐…….”
“널 내 사냥감으로 정했다. 이 낙인이 있는 한, 날 두려워하는 놈들은 절대 널 해치지 않는다. 네가 먼저 덤비지 않는 한.”
“닥쳐, 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 닥치라고! 이거 놔, 지금 당장 토막을 내줄 테니까……!”
그 몸부림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냐.
발카로, 그때 네놈에게, 그리고 네 부하들에게.
그렇게 발버둥 치는 내가 도대체 얼마나 같잖게 보였냐.
“살려주마. 가라. 강해져서 어미의 복수를 하러 와라. 내 더럽혀진 칼타케를 씻을 방법은 전사가 된 널 죽이는 것뿐이니까.”
얼마나 우습고 같잖았기에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냐.
도대체 얼마나 하찮았으면.
내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의 어깨에 박아둔 도끼를 빼내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노략물들과 부상자들을 챙겨서 북상했냐.
멍하니 네놈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운 건 뜨거운 살의(殺意)였다.
죽여 버리겠어…….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무 무기나 들고 놈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카이.”
몸이 굳었다.
모든 분노도 살의도 증오도 잊어버린 채,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거기 앉아 계셨다.
“이쪽으로 와줄래?”
“지금…….”
“부탁해. 엄마한테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 말에, 한순간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가 뾰족한 바늘로 찔린 듯한 아픔이 일었다.
아니야…….
어머니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건 미소뿐이었다.
모든 게, 모든 게 달랐다.
어머니의 어깨 깊숙이 절단면이 생긴 적도 없었고, 거기에서 핏물이 끝없이 흘러내려 백사장을 적시고 있던 적 또한 없었다.
“엄마한테 와주렴…… 자, 빨리.”
겨우 발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가, 멈췄다가, 뛰었다가, 다시 멈췄다.
무언가가 발목을 계속 움켜잡는 느낌이었다.
삶이, 행복했던 일상이…….
어머니에게 도달하는 순간 모두 끝나버릴 것만 같아서…….
어떻게 돌이킬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국 넘어지면 닿을 위치에 다다른 순간, 어머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너무 다행이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입으로 내쉬는 한숨이 아니라, 떨리는 목소리로도. 아들을 끌어안으며 아련한 웃음을 흘리며 내는 그런 한숨이었다.
“엄마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
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고통스럽게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덮친 덫의 이름은 현실이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란 덫.
“엄마가 미안해?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많아서…….”
천천히.
정말로, 정말 아주 천천히.
이 세상의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소중히, 나를 끌어안으셨던 어머니의 팔이 백사장으로 떨어졌다.
툭.
어머니의 몸이, 처음으로 어린 아들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어머니의 몸은 무거웠다.
심장의 고동이 천천히 사그라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희미했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엄, 마……?”
뻐끔뻐끔, 겨우겨우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불렀다. 겨우 혀를 굴려 목소리를 내는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의 웃음소리가…… 왜, 아들? 하고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당연하게 들려오는…… 당연하게…… 당연하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에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영원히.
엄마, 엄마, 세 번을 연이어 부른 뒤 나는 결국 마지막 적막 속에서 어머니의 주검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상은 언제나 아이러니했다.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을 지켜냈다던 그날,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렸으니까.
반나절.
한나절.
하루. 그리고 이튿날.
이틀 내리 울다가 끝내 어머니를 묻었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해안 절벽 위에.
어머니가 사랑한 자리였다.
아버지도 사랑한 자리였다.
여기서 아이처럼 아들과 뒹굴며 놀던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런데 지금 죽어서 묏자리에 누운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세계가 뿌옇게 부서졌다.
– 엄마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
입술을 언제 깨물었는지, 입 안에서 피의 비린 맛이 감돌았다.
라텔 누나는 행방조차 모른다. 마을이 잿더미로 변할 때 아마 죽어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유품인 소검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에서 열기마저 느껴졌다.
죽여 주겠어…….
똑같이, 하나하나, 모조리, 전부 다…….
시체만이 가득한 폐허로 변한 마을에서 삽을 가져와 구덩이를 덮었다. 덮을 때, 도토리들을 가져와 심었다.
언젠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분명 다시 이곳을 찾아오게 될 언젠가……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엄마.”
반쯤 쉰 목소리가 나오다가 끊겼다.
감정이, 감정이 북받쳐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뒤에야 겨우 말을 마칠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베고 또 베어서, 적의 시체로 길을 만들어서라도.
그래, 바로 그날부터였다.
세계에, 아니, 내 삶에…… 끝이 보이지 않는 여름이 시작된 것은.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그 순간 불현듯, 기억의 장막을 비집고 들어오는 현실의 목소리.
죽은 어머니를 땅과 마음에 묻던 소년은, 백발의 청년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선홍의 섬광이 아름답게 물결치는 태도……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의 칼날에 비치는 우루크의 무수한 사체들을 들여다보다가.
“도원수께서 부르십니다.”
탁, 즉시 성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순백의 칼집에 절도 있게 납도했다.
세상은 나를 페이쿼리어라고 불렀다. 저 머나먼 지난날, 어머니 또한 이렇게 불리셨다고 한다.
이 무너져가는 세계를 밝히는 마지막 불꽃…… 가짜 용사(勇士)라는 뜻으로.
“어, 지금 바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