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103)
가짜 용사 이야기-103화(103/310)
제103화
에필로그, 용사 여기 잠들다
「이제야 영원한 밤이 끝나고 아침의 빛이 비쳐 드는구나.」
<테르베노플>의 해안 절벽 위에 거대한 충혼비 하나가 세워졌다.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가 심연과 함께 소멸한,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바다였다.
뇌향의 세츠넨이 말을 이었다.
「죽어서, 죽어서 장작이 되어서, 이 빛을 지켜냈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기억하자.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지니라.」
장작이라 말할 때, 장작의 향기를 지니고 있던 죽은 누이의 미소가 영혼을 찌르는 슬픔으로 숨통을 눌렀다.
뇌향은 묘지를 올려다보았다.
기이하게도, 충혼비에 새겨진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샤릴리온
1692~1699
이제 여름이 끝나고 봄이 왔으니
용사여, 그만 안식을 얻으소서
그것이, 바로 전쟁을 끝낸 영웅의 유언이었으므로.
샤릴리온은 신들의 언어로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름은 왜인지 가슴에 사무치도록 눈물겨웠다.
「그들이 우리에게 삶으로 보여준 덕목은 용기……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헌신, 바로 <온 것들>이 보여주었던 사랑이다.」
샤릴리온이란 이름이, 하나의 마음으로 싸우고 죽어갔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보듬어 안기에 적합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그 이름 위에서는 가짜와 진짜가 구분되지 않았다.
마지막 용사는, 샤릴리온이라는 단 하나의 묘비명으로 함께 싸웠던 모두가 이 전쟁을 끝마친 용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천 년이 몇 번을 지나도 이 충혼의 자리는 영원히 남겨지기를. 세상의 빛으로서, 이 어두웠던 세계를 밝혔던 이들의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잊히는 것으로 완성되리니. 창세의 지존자들이시여, 언젠가는 이들의 무훈이 완전히 잊히게 되는 날이 오게 하소서.」
칼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면, 더 이상의 용사는 등장하지 않게 될 테니까.
용사의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이나 난롯가 앞에서 할머니에게서 듣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되어가게 될 테니까.
어른이 되어서는, 용사같이 유치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대체 누가 믿냐고 말하게 될 테니까.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여기 묻힌 이들이 진정 웃을 수 있을 것이오니…….」
여기 묻힌 샤릴리온들은 바로 그런 시대를 꿈꾸며 죽었다.
자신의 무훈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새기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용사라는 이름이 말장난으로 일컬어지며 더 이상 그 누구도 그 잔혹한 사명을 받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위해.
“받들어, 총!”
아인 육군 총사령관 라블세비츠의 명령에 아인 최정예 건슬링거 친위대, ‘황제의 목소리’들이 일제히 예포를 울렸다.
“저 위대한 형제들의 죽음에 영광을.”
요정 팔라딘 에베스란의 명령에 요정병들이 장창 쥔 손으로 방패를 크게 두들겨 경외심을 표했다.
“안식의 경례를…….”
마지막 페이쿼리어 리아 알터 타스알포는 흑, 하고 터져 나온 울음 때문에 명령을 마치지 못했다. 흑장미 병단 병사들이 예포의 총성으로 그 울음소리를 지웠다.
“엘디아 카타(05) 에누엘의 후계이자 용현 레인 루드윅의 후손이었던 엘디아 오메크(06), 샤릴리온에게 경의를.”
마지막으로, 라미네아의 동료이자 수인족의 대족장 그리프베런의 명령에 인간으로 돌아온 수인들이 목청을 높여 구슬피 울었다.
영웅들이 묘비 앞으로 나아갔다.
거울의 기사 리암과 붉은 폭풍, 삼미호 시렌과 만병기장 할바론.
떠날 때는 분명 다섯이었는데, 모든 여정을 끝마치고 돌아오니 셋이었다.
둘은 세상 너머의 세상으로 먼저 갔고, 오직 셋만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검은 여름 때가 기억나는군.”
할바론이 말했다.
“카밀라, 그놈이 자기가 제자를 잘 키울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제자를 받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반쯤 장난으로 ‘네 제자가 어쩌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라는 말장난으로 위로해 줬었는데…… 설마 그게 사실이 될 줄이야.”
그 말을 받은 건, 함께 검은 여름을 종군했던 요한 울프 프로스트였다.
“저는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습니다.”
“음?”
“카밀라와 같이 키랄에게 둘러싸여서, 이제 죽겠구나 하던 순간에 카이센이 달려왔었죠. 아직도 그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걸 보고 생각했거든요. 아, 용사란 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요한은 라미네아의 주검을 거두어 이곳으로 옮겨 매장했다.
카이센이 죽는 날까지 소중하게 품고 있던, 카밀라의 유골석을 하나로 짜 맞추어 함께 매장했다.
죽어서라도, 죽은 이후에라도, 셋이 함께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렌은 멍하니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없다시피 한 그녀였건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그 샤릴리온이 죽었다는 게…… 우리를 다 합친 것보다도 강했는데.”
용사 리암은 다시 절벽 끝에 솟아오른 석비를 올려다보았다.
샤릴리온
샤릴리온, 이라는 비명에 매달린 시선은 울음기 섞인 미소로도 끊어낼 수 없었다.
샤릴리온…….
당신은…….
당신은 안식에 들었나요……?
육신에 속박된 필멸의 한계조차도 검 한 자루로 베어내고, 심연의 절대자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를 상대로 호각을 이룬 뒤 죽은 당신은.
– 나아가……!
그것이 샤릴리온의 유언이었다. 근데 그건 말이라기보다는, 등을 미는 손길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살고.
당신은 죽어 없는 미래로.
‘나아가, 라는 그 짧은 말 속에, 당신의 죽음을 밟고 봄으로 나아가라는 뜻을 담아두었던 건가요?’
질문이란 상대가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요…….
이제 이 질문은 이제 질문으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거겠군요, 영원히.
– 너는 살아라, 리암.
천 번의 회귀 동안, 샤릴리온은 늘 그런 방식으로 죽었다.
천 번의 회귀 끝에서도, 샤릴리온은 저런 방식으로 죽었다.
– 앞으로 나아가, 리암. 절대 포기하지 마라.
어떤 모습, 어떤 시간에 마주치든 샤릴리온은 이런 형태의 죽음을 고수했다.
나를 살리고.
자신이 죽었다.
– 10초다.
섭리 밖의 다른 세계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생장하여 자랐다가 시들어서 죽는 시간 동안 샤릴리온은 절대자와 검을 맞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10초였다.
이 세계의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10초 동안 칼을 휘두른 뒤, 그는 평안한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 절대의 춤사위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동안, 그와 영원히 헤어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때라도, 되돌려야 했을까.
천 번의 회귀, 그 너머의 시간으로 나아가야 했을까.
– 이 세상은 주사위 게임이 아니란 말이다.
그 슬픈 의문에, 웃으면서 죽은 샤릴리온의 대답이 들려온 것만 같았다.
들릴 리 없는 대답이었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스스로의 착각이란 걸 알고 있는데도 다시 그 음성을 들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사무쳤다.
– 요토스를 쓰러뜨릴 수 있는 미래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도 단 한 명밖에 없다.
결국 모든 것이, ‘그 존재’의 말대로 되었다.
– 샤릴리온이 유르벨뭉의 그릇으로 각성하는 세계선, 그때 그는 요토스와도 호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저 먼 미래로부터 시간의 태엽을 되돌려, 미래의 베르켄시아를 가져다준 사내.
베르켄시아를 통해 들여다본 그 존재의 삶을 긍정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희생적 개입으로 전쟁이 끝났단 건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리고 그 미래는 이 시간대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코 포기하지 마라.
그 존재는 절실히 믿고 있었다.
샤릴리온이라면 반드시 요토스를 저지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리암 또한 그 믿음에 자신의 미래를 기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정말 다 끝났군요.”
리암은 다시 비석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서, 그 차가운 표면 위로 손을 얹었다.
“정말로 다 끝나고 이제야 봄이 왔는데…….”
모든 것이 부서졌다.
시선에 걸리는 모든 게 깨졌다.
“그 봄에 당신은 없네요…….”
세상에 돌아온 봄 전부가, 망막 위에서 시리도록 희뿌옇게 무너져 내렸다.
“당신들은 없어요…….”
사무치는 슬픔이 눈앞을 희뿌옇게 적신다.
그 처절했던 회귀의 나날 속에서, 당신이, 당신들이 한순간이라도 없었더라면…… 저는 진작 무너졌을 겁니다.
그때 요한이 리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까지 카이센 곁을 지켜주어서 고맙습니다…….”
슬픈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며, 리암은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저에게는…….”
목소리가 고음으로 갈라진 바람에 목청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악수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지켜진 건 샤릴리온이 아니라 제 쪽이니까요. 저야말로 감사를 전해야 하는데, 이제는 방법이 없군요…….”
용사의 누이, 라텔은 초연했다.
이 상황에 가장 슬퍼해야 할 존재가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슬픔을 자아냈다.
“엄마, 삼춘은 이제 안 와요?”
그의 어린 아들이 물었다.
뇌향 곁에서 아들을 품에 안고 있던 라텔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건 질문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칼날이었는데, 대답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나버릴 것만 같아서.
“행복했을까요?”
그렇기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하게 된 것일까.
“카이센은, 그 어린 나이부터, 평생을 싸우기만 하다가 죽었는데, 한 번이라도 행복한 적이 있었을까요?”
뇌향은 눈물로 얼룩지려는 눈을 눈꺼풀로 덮으며 말했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나보다 혼의 격이 더 높아져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내전의 나날 속에서 그 아이는 꿈꾸며 싸웠다.」
“어떤 꿈을 꾸었나요?”
「네가 평화롭게 아이를 기르고 조모가 되어 손자들의 절을 받는 모습을…… 그 아이는 오직 그날만을 꿈꾸면서 행복해했다.」
라텔은 아들을 뇌향의 품에 안겨주고는 묘비 앞으로 나아갔다.
그 앞에 서 있던 영웅들이 기꺼이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열어 주었다.
나아갈 때, 땅에서 아스라이 밟히는 흙에서 고향의 향기가 났다.
그 누런 흙냄새 속에서, 동생은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 있었고, 살아서 방끗 웃고 있었다.
– 누, 누우나아아, 누우나아아.
그 흙냄새 한가운데에서.
동생은 라텔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면서 노을 무르익던 바닷가를 조용히 쳐다보던 여리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 누나, 바다다. 햇살이다.
– 저건 노을이라 하는 거야.
또 그 흙냄새 너머에서.
동생은 용사의 백발을 가진 청년으로서 네 자루의 극위성검을 차고 방그레 웃고 있었다.
– 행복해야 해, 누나.
흙냄새가 눈물의 짠 내에 가려지면서 동생의 환영이 사라졌다.
아…….
라텔은 쓰러지려는 몸을 묘비에 손을 얹는 것으로 간신히 지탱했다.
알았어, 바보야…….
행복해질게…….
누구보다도 행복해질게…….
나, 네가 행복하지 못했던 만큼 행복해질게. 자식들도 많이 낳고 손자들이 다 크는 모습까지 다 볼 정도로 행복해질게…….
그래서,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그 행복이 어떤 느낌인지, 네가 전해준 행복이 어떠했는지…… 너에게 이야기해줄게…….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 * *
바다를 건너오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 파도의 이랑에서 빛나는 노을의 무늬가 보인다.
고향의 정경…….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독할 정도로 차가워진다 싶더니, 이토록 따스한 곳에서 눈을 뜨게 되다니.
“이제 왔구나.”
그 붉게 물든 해변에 앉아서,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아 올리던 여자가 뒷짐을 지며 일어섰다.
이 재회가 전혀 놀랍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을 헤어질 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도, 미소가, 맑은 미소가 제멋대로 입매에 맺혀 나왔다.
“그렇게 안 늦었지?”
“모래성을 다 쌓을 때까지만 기다리려 했는데, 아슬아슬했어.”
“그래? 근데 저기 다른 모래성이 부서져 있는 건 뭐냐.”
타르시요가 시치미를 떼려다가 결국 아하하 맑게 웃었다.
덩달아 웃었다.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은 헤어지기 전에 듣던 웃음과 변한 것이 없어서, 그 변치 않음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다 끝냈구나.”
“어. 끝났지.”
“어떻게 됐어?”
“잘은 모르겠어. 요토스를 베고 나니까 무슨 파장이 느껴지긴 했는데…… 그 뒤로는 감각이 다 사라져서. 뭐, 분명 잘됐겠지.”
“해냈을 거야, 카이센. 심연, <잊혀진 왕들>, 외우주, 전부. 해낼 줄 알았어.”
“알잖아. 나 혼자서 해낸 게 아니야.”
그때였다.
작달막한 무언가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어깨로 올라타 시끄럽게 웃었다.
“왔나, 카이센! 해냈는가? 이슬라한테서 칭찬을 받으려고 힘냈는가?”
이슬라.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며 빙그레 웃는 세이라.
“미안해. 남녀의 데이트는 방해하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알잖아? 이슬라한테 그런 건 절대 안 통한다는 걸.”
“이슬라는 그런 거 모른다!”
“이슬라, 무언가를 모르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지적하시는……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까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모두가, 그 잔혹했고 고통스러운 길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던 모든 인연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이것 봐라, 우루크 슬레이어가 납셨잖아! 설마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다니지는 않겠지?”
장총 진.
“예의를 갖춰라, 진. 이제는 페이쿼리어시다.”
백곰 엘토람.
“하! 이놈한테 예의를 갖추라니 세상 다 끝났군!”
용창 트발.
“진짜 다 끝나버렸으니 뭐 누가 어쩌겠어?”
궁성 메른.
“아하하하하하하, 맞네. 맞아.”
무녀 알리도나를 위시한 백골 병단과 철십자 기사단의 맹우들.
그 떠들썩한 웃음소리 속에서, 문득 어깨에 손을 얹은 존재가 있었다.
수석 교관 올리에르 듄 제라예.
“정말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구나.”
“네, 교관님.”
모두와 다 함께 웃었다.
이렇게나 속 시원히 웃은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즐겁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로베리스가 말했다.
“먼저 가봐라, 카이센.”
“선배님께선?”
“나는 내 동생들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른 녀석들도 따로 가야할 곳이 있어. 올리에르 선배님도 마찬가지고. 모두 가족이 있으니 말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여기 와 있던 것뿐이야.”
“그렇군요……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로베리스가 씩 웃었다.
“당연히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는 곳이 있지 않겠나? 그때까지만 참아라.”
그 모든 소명의 인연들이 빛의 입자로 하나둘씩 사라질 때, 타르시요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안 가도 돼. 같이 가자.”
“간다니, 어딜?”
“갈 필요가 없겠다. 저기 오고 계시네. 계속 널 기다리고 계셨어.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말이야.”
타르시요가 손가락으로 저기 어딘가를 가리킨 그 순간, 그곳을 바라본 그 한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아픔에 숨이 막혔다.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여자는 백발이었고 한 남자는 금발이었다.
키가 살짝 작은 백발에 행복하게 재잘거리는 쪽은 카밀라 스승님이었고, 고요한 미소를 짓는 남자는 열 살 때 죽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존재가, 둘의 가운데에서 바구니를 팔짱에 낀 채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 순간, 가슴이 요동치며 숨이 막혔다.
“야 이 새캬! 바로 인사 안 박고 뭐 해? 더 열심히 패서 예의를 완벽하게 장착시켜 줬어야 했는데, 다 제 잘못이에요, 스승님.”
어떻게 되는 걸까.
나를 알아보실까.
어린 시절과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오직 피비린내만이 나는…….
“카이센!”
그 모든 근심과 염려를 칼로 단번에 끊어내듯이, 단번에 달려와 몸과 마음을 따스하고 아득하게 끌어안는 온기…….
예전에는 그렇게나 당연한 일상이었던 온기였으나 이 온기를 대체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 온기의 이름은 바로 어머니였다.
“이제 왔구나. 엄마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 않았다.
넘어졌을 때 당연하게 울던 꼬마 시절처럼, 그러면 어머니가 당연히 올 거란 걸 알던 마음 그대로.
눈물의 아득함 속에서 그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예, 어머니…….”
열세 살, 삶의 여름이 시작될 때 영혼 속에 품었던 그 말을.
그리고.
지금까지 눈물과 슬픔과 고통 가운데에서 걸어왔던 그 모든 여정을…… 끝마치게 되는 ‘이 말’을.
“……저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 * *
여기에, 한 묘비가 있다.
족히 몇천 년 이전의 역사에, 어떠한 전쟁의 종전을 기념하는 묘비였다는데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기억하는 이는 없다.
애초에 이제는 전쟁이란 개념이 대체 무엇인지 아는 이들조차 없다.
표면이 완전히 풍화되어, 이제는 하나의 거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묘비는 어느 오솔길의 한복판에 다만 고고하게 솟아 있다.
그 옆을 맑게 흐르는 강물과 고요하게 수런거리는 나무들이 그 위업을 찬양한다.
봄의 새들과 여름의 새들과 가을의 새들과 겨울의 새들이 지저귀며 그 영웅담을 노래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그 묘비의 이야기는 서서히 잊혀져 가다가 이제는 완벽히 잊혀졌다.
그 묘비 곁에서 자연의 변화는 그토록 아득하게 도드라진다.
오직 대자연만큼은, 그 대자연을 주재하는 창세의 어버이들만은.
그 묘비의 주인이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일들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저 모든 고요와 정적과 평화와 침묵은, 창세의 주재자들이 저 묘지의 주인에게 내리는 면류관(冕旒冠)일 것이다.
저 먼 시대에는 심연(深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마음에 악(惡)이 창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사람이 서로를 베고 죽이고 미워하고 증오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시대에는 늘 피가 대지를 적시고 강을 이루며 바다로 흘렀다고 한다.
이 묘지의 주인은 바로 그 동란의 시대를 똑바로 통과해서 소명(召命)의 자리까지 나아갔다.
그 소명은 형언할 수 없이 잔혹한 것이라 그 누구도 감히 떠받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잔혹하고 가엾고 참혹한 그 길.
그래서 세상은 감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지금은 사라진 이 단어로 불렀다고 한다.
용사(勇士)라고…….
세상의 근원이 심연에 묶여 있어서, 봄이 오지 않던 그 시대에, 이 마지막 용사는 봄으로 이어지는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열쇠로 그 문에 넣고 비틀어, 세상에 봄을 꽃피워냈다.
용사의 육신은 그 봄의 거름이 되어서 사라졌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은 충혼비를 세워 그 무훈을 영원히 기리고자 했다.
여기 새겨진 이름의 주인이 사실 여러 명이었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다고 하나 이제는 아무도 진위를 알 수 없다.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풍파 연속 속에서.
이 충혼비는 묘비가 되었고.
묘비는 다시 거석이 되는 것으로 ‘마지막 용사의 이야기’는 완성(完成)되었으므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이 충혼비 앞에 꽃을 바치거나 술을 따르며 흐느껴 울던 이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매년 어느 여름날.
꽃들이 화사한 극채색으로 세계를 물들이는 여름이면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자가 있었다.
그 방문자의 발자국에는 햇살의 따스함이 남았고 대자연마저 그 온기에 기뻐 춤추었다.
시대착오적인 낡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방문자는 매년 묘비 앞에서 무어라 소곤거린 다음, 한 송이의 푸른 꽃을 바치고 늘 햇살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 꽃의 이름은 도라지꽃이다.
<완결>
작가 후기
(후기가 끝난 뒤 시즌 2 예고편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가짜 용사 이야기>를 완결까지 따라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참…… 후기를 쓰는 것이 다른 원고를 마칠 때보다도 몇 배는 감개무량하네요.
이 <가짜 용사 이야기>는 제가 글을 처음 잡던 때부터 꼭 쓰고 싶었던 소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인 시절의 저에게는 이 글을 쓸 필력도 없었고 독자님들을 끌어모을 인지도도 없었지요.
그래서 방식을 바꿨습니다.
일단 인기가 많은 게임 판타지로 시작을 하자…… 필력과 인지도를 쌓고 난 뒤에 쓰기 시작하자…….
그 결과가 지금 이렇게 나온 것이거든요!
첫 작에서부터 언급되던 신화시대의 이야기 중 샤릴리온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필력은 부족하고 보잘것없으나,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에 이 글을 드디어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정말 기쁘고, 또 감사하고, 또 눈물겹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Q1 : 대체 ‘그 존재’가 누구죠?
Answer :
그건 차후 연재되는 시즌 2,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 전면개정판>과 리암이 나올 이야기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사실 <가짜 용사 이야기>는 군상극 느낌으로 쓰였어야 완벽했겠지만…….
첫 작품에서의 경험으로, 더블 주인공 이상의 소설은 일간 연재의 템포가 중요한 웹소설 시장에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그럴 만한 필력도 없었고요…….
그래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분리시키기로 했습니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분리시키되, 설정이나 스토리에 구멍이 뚫린 느낌은 들지 않게끔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게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부족하지만 즐겁게 봐주셨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1. 리암의 회귀록.
2. 더글라스의 제국 내전편.
차기작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은 위와 같겠습니다!
저 소설들이 언제쯤 준비가 되고 언제쯤 세상에 나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가짜 용사 이야기>에서 미처 설명드리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말 재밌게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Q2. 나 삼영룡 더 보고 싶은데.
그건…… 카카오페이지에 런칭된 <용사 파티 대마법사의 환생>이라는…… 전작에서…… 아주 귀여운…… 유년 시기의 삽화까지 수록되어 있으니…… (소근소근)
이러다가는 후기만 몇만 자를 쓸 것 같아서 그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새로 와주신 독자님들께.
그리고 첫 작품에서부터 절 응원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2023년 가정의 달, 가정과 일터에 늘 평안이 있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다음 페이지에 시즌2 예고편 있습니다!)
시즌2 예고편 :
이 모든 이야기의 서장,
이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그’는 웃었다.
그 덧없고도 쓰라린 미소가 한숨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마지막 일을 마치고 이제 완전히 소멸해가는 자신의 혼과, 유르벨뭉이 영혼에 새겨진 충격으로 혼절한 샤릴리온의 육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는 웃었다.
‘그래, 당신은…….’
역시나 어느 상황에서든 옳은 길을 가는군요. 어떤 상황에서든 빛의 길로 나아가는군요.
‘당신과 엇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다른 선택을 내렸는데…….’
그렇기에 당신 앞에 설 자격조차 없는 보잘것없는 놈인데, 이렇게 당신을 뵐 자격조차 없지만…….
그래도, 그러하나, 그랬으나.
이렇게, 삶의 끝자락에서나마, 당신을 직접 뵙고,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지극히도 큰 영광이었습니다…….
‘샤릴리온, 이 마지막 순간에서야 저 자신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었던 거군요…….